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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 비평 2012년 3월호, 신작에세이 특집] 허락된 연륜 - 김규련

신아미디어 2012. 3. 26. 15:00

수필과 비평에서 신곡문학상 대상을 받으셨던 작가들의 신작에세이를 특집으로 꾸몄네요.

고수의 햇살과 숨결을 같이 느껴보시고, 신인작가들에게 좋은 영양분이 되었으면 합니다.

 

 

 

허락된 연륜年輪

 


   인간의 욕구는 한이 없다.
   온갖 욕구 중에서도 가장 원초적이고 강렬하고 집요한 것은 생존의
욕구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쩌다 친구들과 술 한 잔 하게 되면 흔히 건배사로 ‘9988234’
를 외쳐대기도 한다. 그것은 단순한 건배사가 아니라 우리의 가슴 깊숙
한 곳에 숨어 있는 간절한 소망의 발현인지도 모른다.
   한데 한 젊은 지식인이 신문 칼럼에서 ‘7788234’가 생존의 기본 철학이
라 주장했다. 77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삼 일 앓고 죽겠다는 뜻이
아닌가. 과연 생사가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것일까. 그렇게 된다면 그는
만인의 존경과 신앙의 대상이 되는 도인이라 하겠다.


   조용히 혼자 앉아 지나온 나의 발자취를 되돌아본다.
   젊은 시절 결핵이 재발해서 휴직계를 내고 집에서 요양한 때가 있었
다. 수시로 붉은 피를 토해 내며 겁에 질려 넋을 놓곤 했다. 극심한 가난
과 질병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약물치료와 안정
그리고 하늘에 대고 살려 달라 빌고 또 비는 수밖에 없었다. 나의 핏줄에
딸려 온 어린 사 남매를 중등학교라도 졸업시킬 때까지 살아남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었다.
   이 년 만에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어 직장으로 돌아왔다. 살얼음
위를 걷듯 조심스레 근무하다 보니 십 년 세월은 쏜살같이 흘렀다. 생활
환경도 바뀌고 아들 딸은 중고등학교와 대학에 재학 중이었다. 나는 평
교사에서 교육연구사로 신분이 달라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심중에 은밀히 남아있는 욕구도 변해 있었다. 정년퇴임
때까지 무사히 생존하기를 바라고 있지 않는가. 세월 따라 나의 욕구도
진화하고 발전해서 스스로 경악을 느끼곤 했다. 교육연구사에서 장학사
로 변신했다. 인간의 욕구는 무한한 것인가. 장학관이 되고 교육장이
되어 봤으면 했다. 뜻이 이루어졌다.
   교육장 임기를 끝내고 도내 일번지 고등학교장으로 물러났다. 교원
연수원이 창설되자 떠밀려서 초대 원장으로 나왔다.
   인간의 욕구는 생존의 욕구에서 안전의 욕구로, 참여의 욕구로, 존경
의 욕구로, 자아실현의 욕구로 상승한다고 했다. 나는 어쩌면 존경의
욕구와 자아실현의 욕구를 즐기려고 연수원장직을 수행하고 있었는지
도 모른다.
   연수원을 찾아오는 여러 교사들 앞에서 퇴계 선생의 말씀을 얼마나
많이 도용했던가.


思無邪(사무사) 간사한 생각 품지 마라.
愼其獨(신기독) 홀로 있어도 늘 조심하라.
毋自欺(무자기) 자기 스스로를 속이지 마라.
毋不敬(무불경) 모든 것을 공경하라.


등은 나의 입버릇이 되어 있었다. 위선의 탈을 쓰고 말과 행동과 속마음
이 서로 맞지 않는 몸짓을 때때로 감행했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한
없이 부끄럽다. 그때 수필 창작이 나의 취미요 보람이요 자아실현의 삶
이었다고 하리라. 분망한 생활 속에서도 틈을 내어 글짓기를 한다며 사
유의 심연 속에 푹 빠져도 봤다.
   아직 내 마음에 쏙 드는 수필 한 편도 남기지 못했지만 수필 쓰기에
바친 시간과 정성이 스스로 대견스럽고 행복했다.
   마침내 별 탈 없이 정년퇴임을 했다. 자녀들도 저마다 가정을 이뤄
열심히 살고 있다. 천지신명에게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퇴임 후 팔순의 유역에 이르기까지를 제2의 청춘이라 할까. 미국 시인
사무엘 울먼의 시 <청춘>을 절감했다. 교육위원 활동, 수필 창작, 교육
특강, 수필 강의, 여행, 주례 등, 즐겁고 여유 있고 활달한 생의 황금기를
마음껏 즐겼다.
   어느덧 내 가슴 밑바닥에는 생존에 대한 새로운 탐욕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기왕에 왔으니 구순은 넘겨야
된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팔순 중반에 이른 지금은 몸도 마음도 조금씩 부서지고 무너져서 힘
을 잃어가고 있다. 절친한 친구들이 하나 둘 오간다 말도 없이 훌쩍 자리
를 떴다. 허무와 무상과 고독감이 서서히 가슴의 뜨락에 깔려 왔다.
   이제 겨우 철이 드는 것일까. 농진弄眞 반반의 ‘9988234’가 턱도 없는
과욕이란 것을 깨닫는다. ‘7788234’는 경망스런 속단이란 생각이 든다.
지금부터는 ‘천수天壽 88234’라 할 것이다. 천수를 다할 때까지 팔팔하고
품위 있게 늙다가 이삼일 앓고 가야겠다.
   천수도 그냥 누릴 수 있는 복이 아니리라. 묵언정진黙言精進은 아닐지
라도 꾸준한 조신操身과 수행이 있어야 할 터이다. 어릴 적 하동 포구
강변에서 친구들과 무심히 놀던 그때의 동심으로 돌아가야겠다.
   더 바라고 기대하고 원하는 바 없이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리
라. 더 배우고 익히고 알려고 하는 지식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하리라.
더 취하고 갖고 누리고자 하는 소유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하리라.
   오늘도 황혼 붉게 깔려드는 광야를 홀로 지나가고 있다. 천진한 동심
으로 춤추듯 노래하듯 일상을 즐기며 허락된 연륜을 쌓아 가리라.


 

김규련  ------------------------------------------------------------------
1929년 경남 하동.
1968년 ≪수필문학≫ 등단.
저서: ≪강마을≫, ≪종교보다 거룩한≫, ≪素木의 횡설수설≫, ≪높고 낮은 목소리≫, ≪귀로의 사색≫,

≪즐거운 소음≫.
수상: 한국수필문학상(1980년), 신곡문학대상(2003년), 향토아카데미문학상(2004년), 한흑구문학상(2009년).
활동: 영남수필문학회장, 형산수필문학회장, 한국문협구미시문협회장, 한국수필가협회고문,

한국불교문인협회고문, 펜클럽한국지부자문위원, 에세이21자문위원, 수필문우회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