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을 여행하면서 한계주님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셨을까요?
여러분들도 《수필과 비평》에서 같이 느껴보세요.
해를 안고 날다
1부. 마드리드에서 톨레도로
언젠가 한번은 스페인 땅을 밟아 보고 싶었다. 이슬람과 가톨릭이 공
존하고 피카소와 가우디, 그런 독창적이며 틀에 매이지 않는 자유분방
한 천재를 낳은 스페인은 대체 어떤 나라인가. 눈으로 보고 발로 뛰며
자유로운 공기를 마음껏 마셔보리라, 하는 마음이 딸과 외손녀들 틈에
끼여 나를 마드리드행 비행기에 몸을 싣게 했다.
내 옆 좌석의 사진작가도 스페인의 공기를 카메라에 담으려고 길을
떠난다 했다. 딸아이 옆 좌석의 대학교수도 세미나에 참석하려고 나왔
으나 세미나는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이지만 스페인 남부 안다루시아
지방은 열 일 제쳐두고 돌아볼 것이라 했다. 저 사람이 사비로 왔나 출장
비를 받고 왔나, 잠시 궁금했지만 그건 내 알 바가 아니고 스페인이라는
곳은 묘하게 사람을 들뜨게 하는, 일상의 틀에서 무장해제시키는 그런
무언가가 있다.
못말리는 방랑객들을 실은 비행기는 가도 가도 해가 지지 않는 하늘
을 날고 있다. 오전 8시 40분에 인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암스테르담
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다시 떴다. 열다섯 시간을 날아가는데도 해는
가서 잠들 생각을 않고 여전히 머리 위에 있다. 해도 나를 닮았나, 아니
면 시차 때문인가.
비행기는 으레 구름 위를 나는 줄 알고 있는데 여기 스페인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다. 일 만 미터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지상의 산과
들, 집과 도로들이 지도를 펴놓은 듯이 선명하다. 이윽고 비행기는 현지
시간 16시 20분에 마드리드의 바라하스 공항에 닿았다.
‘태양의 나라’ 스페인은 햇살이 강렬하다. 먼지나 황사라는 여과물 없
이 햇빛이 그대로 땅에 내리꽂히니 애인은 동반하지 않아도 선글라스와
모자는 필수라고 한다. 참을성 없는 한국관광객들이 버스 안에서도 파
라솔을 편다는 가이드의 말이 그저 해본 소리는 아닌 것 같다.
스페인 광장의 세르반테스 기념탑
호텔을 찾아 짐을 푸는 것으로 오늘의 일정은 끝나는데 태양은 아직
도 머리 위에 있다. 일행은 50인승 최신형 버스에 몸을 싣고 마드리드
거리로 나갔다. 3백 년 전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신시가지와 오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구시가지가 그대로 보존되어 조화를 이룬 고풍스럽고
도 단아한 거리.
서울의 명동 같은 중심가 그랑비아는 피카소가 자주 찾던 곳이라 하
고, 17세기에 지어진 건물들로 둘러싸인 마요르 광장은 17세기부터 19세
기까지 각종 공연장 ․ 마녀 재판과 사형 집행장, 왕가의 결혼 행사장 등
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스페인 사람들의 예인기질은 도로와 광장을 그냥 버려두지 않고 한
폭의 그림으로 탈바꿈시켰다. 칠기공이 조개를 박듯이 동글동글한 자갈
들을 정성스레 박아서 새도 그리고 동물도 그렸다. 당초무늬로 고전미
를 살리기도 하고 기하학적 무늬로 현대 감각을 살려 멋을 부리기도 한
다. 열하를 간 연암 박지원이 돌을 배열해서 만든 아름다운 문양을 보고
‘돌이나 깨어진 기왓장도 이렇듯 ‘장관’을 이룰 수 있구나.’ 하고 감탄을
했는데, 그 기법은 로마나 스페인에서 건너간 것이 아닌가 싶다.
스페인 광장에는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1547-1616) 서거
300주년을 기념해서 세운 높은 기념탑이 있다. 탑 상단에는 책을 읽는
여인상이 부각되어 있고, 하단에는 책을 무릎에 세우고 앉아있는 세르
반테스 상이 있다. ≪돈키호떼≫에서 연상되는 희극적인 이미지와는 달
리 날카롭고 근엄한 모습이 장기판 위에 ‘돈키호테’라는 주사위를 굴리
는 냉철한 ‘작가의 눈’을 의식하게 한다.
그 앞에 로시난테을 탄 돈키호테와 당나귀를 탄 산초의 동상이 있다.
긴 창을 들고 “자, 가자.” 하고 서두르는 돈키호테는 말 위에서도 가만
있질 못하고 벌떡 서 있고, 그를 따르는 산초는 바쁠 게 없다는 듯이
느긋하다. 하나는 비쩍 마르고, 하나는 뚱뚱하고 몸집에서 이미 두 캐릭
터의 성격이 드러난다. 근엄한 세르반테스보다는 익살스런 돈키호테와
산초에게 카메라가 몰린다. 나도 산초의 일행이 되어 찰깍, 카메라에
몸을 담았다.
600미터 고지에 자리잡은 호텔은 공기가 쌀쌀하고 청량하다. 세계적
▲ 근엄한 세르반테스와 말 위에서도 가만 있질 못하는 돈키호테
인 경제위기를 감안해서인지 호텔 로비는 어둠을 밝히는 최소한의 조명
으로 불필요한 경비를 줄이고, 우리를 맞는 직원도 지배인 한 사람이다.
그러나 깔끔한 실내 인테리어는 간소하면서도 세련된 것이 스페인답다
고 여겨진다. 20밀리 두께의 통유리로 된 넓은 세면대는 세수대야 두
개를 바가지처럼 파 놓은 것이 어찌나 정갈한지, 이런 세면대를 우리네
가정에도 도입했으면 하는 욕심을 부려 본다.
스페인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는 가이드는 아침마다 우리에게 뉴
스를 전해준다. 그들이 보는 눈은 우리와는 다르다. LPGA에서 미셸 위가
준우승을 했을 때 우리는 ‘아깝다’ 했는데, 스페인 사람들은 ‘화려한 복귀’
라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 우승자보다 준우승한 미셸 위의 인기가 높다
며, 한국의 대통령은 몰라도 미셸 위는 알고 있으니 잘 키운 딸 하나가
열 대통령 부럽지 않다. 박지성을 응원할 때도 ‘꼬레안 박’이라 한다며
스포츠 스타가 애국자가 아니냐고 되묻는다.
스페인 가톨릭의 총본산 톨레도 대성당
유네스코에 등재된 문화유산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나라가 스페인
이다. 그중에도 동물의 뼈와 사람의 손으로 그린 스페인 북부의 알타미
라 동굴 암벽화는 BC 3500년 전의 것으로, 많은 학자들이 ‘구석기 시대의
박물관’으로 인정을 해서 스페인 사람들의 코를 높여 주었다.
마드리드에서 남쪽으로 약 70킬로 떨어진 톨레도는 기독교와 이슬
람·유대교가 오랫동안 공존했던 도시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어 있다.
타호 강이 휘감아 흐르는 언덕 위에 자리 잡은 톨레도는 영화 <엘 시
드>의 배경 도시이기도 한데, 2100년 전 로마의 집정관에 의해 로마제국
의 변방지역으로 합병되었다. 그 후 아랍왕국에 점령되어 400년간 아랍
통치하에 놓여 있다가 1087년 알폰소 6세에 의해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
가 되어 약 5백년간 정치 문화 종교의 중심지였다. 수도가 마드리드로
이전된 후에도 종교적인 위상
은 변함이 없다고 한다.
스페인 가톨릭의 총본산인
톨레도 대성당은 이슬람 왕국
시대에는 회교사원이 있었던
곳으로, 톨레도 수복으로 가톨
릭 성당으로 개조되었다. 266
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완공된
대성당은 길이 120미터, 넓이
60미터, 가장 높은 천장이 33미
터에 이르며, 웅장한 규모와
화려한 장식, 수많은 그림과
조각품, 고문서, 피아노, 보석
과 장신구 등, 내부를 더없이
▲ 스페인 가톨릭의 총본산인 톨레도 대성당 아름답게 장식했다.
이 성당은 천장을 넓히고 조명을 주기 위한 ‘뜨란스빠렌떼’라는 특수
공법으로 유명하다. 돔을 통해서 들어오는 빛이 대리석 기둥의 아름다
운 조각들과 아우르는 모습은 신비롭고 환상적이다. 성물실의 대형 천
장화는 나폴리 출신의 화가 루카 지오르다노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일
데폰소 성인에게 제의祭衣를 내리는 그림이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색상,
수많은 천사들과 인물들이 280평방미터 공간을 메우고 있는 모습이 참
으로 장관이다.
사면의 벽은 고야의 <유다의 입맞춤>과 <잡혀가는 예수님>, 벨라스케
스의 <리베라> 등 이렇다 하는 성화들이 벽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중에
도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엘 그레코의 <엘 에스폴리오>와 <베드로의
눈물>이다. 십자가에 매달기 위해 그리스도의 옷을 벗기는 장면을 그린
그레코의 <엘 에스폴리오>는 증오와 살기가 가득한 군중들 속에서 모든
것을 용서하고 관용寬容하는 그리스도의 온화한 얼굴이 진한 감동으로
다가오고, 예수를 세 번 부인한 후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베드로의 눈
물>은 베드로의 회한이 그림을 알지 못하는 내게도 절절히 와 닿는다.
톨레도를 사랑하고 그곳에서 작품 활동을 한 엘 그레코는 영혼이 담긴
수많은 작품들을 톨레도에 남기고 갔다. 산토 토메 성당에 전시된 엘
그레코의 명작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은 그 그림으로 해서 수많은 사
람들의 발길을 모으고 있다.
수년 전 대전시에서 조루즈 루오의 그림전시회를 가진 일이 있는데,
그림을 반입 ․ 전시하는 보험금만도 어마어마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
다. “이런 명작들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스페인에 온
보람이 있지 않습니까.”
스페인이라는 나라는 가이드의 어깨를 으쓱하게 한다.
성당의 귀중품들을 전시한 보물실에는 수많은 보물들이 전시되어 있
다. 백미로 꼽히는 ‘성체 현시대’의 내부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서 가져온 순금 18킬로로 되어 있다 하며, 중의실에는 역대 교황들의
호화로운 가운이 즐비한데, 진주가 만이천 개나 박힌 가운이 눈에 들어
왔다. 저 무거운 것을 어떻게 걸쳤을까 걱정스럽기도 했다.
제단을 장식하는 금빛 찬란한 병풍과 그 맞은편의 성가대실, 그리고
그 위에 설치된 장엄한 파이프 오르간, 거듭되는 장관에 말을 잃고
“장하다, 참으로 장하다.”하고 탄복만 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만유 주의 이름 영화롭도다/ 영화롭도다/ 영화롭도다
주의 이름 영화롭다/ 주의 이름 영화롭도다/ 주의 이름 영화롭도다
주의 이름 영화롭도다/ 모든 천사들 보좌
하는 찬송가가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여고시절 합창 콩쿠르에서 불렀던
<영화롭도다>라는 노래가 가사 하나 곡 하나 틀리지 않고, 지휘를 했던
음악선생의 손놀림 몸놀림까지 생생하게 되살아난 것이다. 자그마치 64
년 전 일이다. 그런 노래가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긴
세월 죽은 듯이 잊혀져 있던 노래가 이렇듯 선명하게 되살아날 줄이야.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그건 마치 내 영혼이 수백 미터 땅 속에 묻혀
있던 수맥에 닿아, 그 수맥이 물줄기가 되어 튀어나온 듯한 경이로움이
었다.
‘보고 듣고 생각한 것들은 지워지지 않고 아뢰아식*에 저장된다.’는 말
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을 예사롭게 들었는데 마치 그 사실을 증명이라
도 하듯 오랜 세월 의식 밑바닥에 잠재해 있던 노래가 교감이 되는 대상
을 만나자 자신도 모르게 뛰쳐나온 것이다.
핸델이나 모차르트도 그런 영험을 얻었으리라 여겨진다. 위대한 작품
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영감으로 해서 탄생한다는 것을 불현듯 깨
닫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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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뢰아식: 제 8식이라고도 한다. 불가에서는 보고 듣고 생각한 모두가 업이 되어
의식 밑바닥에 쌓여 있다고 한다. 사람이 죽으면 몸은 썩어 흙이 되고 물이 되고
바람이 되고 불이 되지만 아뢰아식에 저장되어 있는 업이 들어서 다음 생의 몸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한계주 -----------------------------------------------------------
'수필공원'으로 등단
17회 현대 수필 문학상 수상,
한국 수필 문학 진흥회 기획위원, 에세이문학회, 송현수필문학회,한국문인협회,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수필집 『전화여행』, 『아들네 집에 자 주러갔다가』, 『둘이 하나 되어』, 『백제 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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