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기운이 푸석한 몸에 새살을 만들어낸다. 치열하게 사랑하고 나눌 수 있는 오늘, 살아있음이 황홀하다.'
《수필과 비평》에 수록된 고영욱님의 봄기운.. 이제인지, 벌써인지... 봄입니다.
봄기운
며칠 전 가까운 친척이 예고 없는 질환으로 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다. 후배가 갑작스러운 폐암 말기 선고를 받고 당혹스러워한다는
얘기를 듣고 섬뜩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죽음을 예고하는 병들이 앙
세게 달려들고 있다. 그러나 한 의사의 고백처럼 의학의 치료는 25%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두려움이 생겼다. 왼쪽 가슴이 뭉근하
게 아프고, 직장에 갔다 오면 씻는 것도 귀찮을 만큼 피곤에 찌들어 있기
때문이다. ‘감기에 걸려도 약 한 번 먹지 않고 버텨낸다.’며 몸이 약한
남편에게 종종 건강함을 과시했는데 할 말이 없게 되었다.
주위에서 ‘건강검진 한번 받아보라.’는 권유를 해서 거금을 주고 검사
를 받았다. 결과를 보는 날이다.
병원에 가기 싫은 발걸음이어서인지 약속한 시간보다 30분이나 늦었
다. 간호사가 남의 속도 모르고 힐책한다. 촬영한 여러 곳의 사진을 걸어
놓고 이리저리 살펴보는 의사의 모습에 숨을 죽였다.
“골다공증에 만성 위궤양이군요. 운동부족에 복부비만이 가장 큰 원
인입니다.”
“네?”
물어볼 겨를도 없이 의사는 속도감 있게 충고했다.
“진행 중인 골다공증을 지금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운동 많이
하시고, 음식 조절하세요.”
한 보따리 약봉지를 가지고 집에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겁다. 몸의 균
형과 힘을 지탱해 주는 뼈가 치명타를 입었다. 벌써 이런 나이가 된 것이
서글프고 짜증이 났다.
남편에게 진단 결과를 말했더니 “나이가 들면 그 정도의 병은 다 있는
것 아니에요?”라며 무덤덤하게 얘기했다.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10년
동안 당뇨병을 앓고 있는 친구와 갑상선 약을 먹고 있는 친구가 한목소
리로 “사람이 늙으면 몸에 고장이 나는 것은 당연하고, 수리하면서 사용
해야지. 우리 나이에 아무 이상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 아냐?”라며
너무 욕심 부린다는 투로 내뱉었다.
친구의 얘기를 구태여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전적으로 동의하고 싶
지 않은 마음이 더 많다. 목욕탕에 가면 가끔 나이가 지긋한 것 같은데도
허리가 꼿꼿하고 당당한 체격을 가지고 있는 분들을 만난다. 내 나이
비슷해 보이기도 한데 물어보면 70세가 넘은 나이들이다. 어떤 할머니
는 새로운 비법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하루 1시간 이상 운동하면 웬만한
병은 달아나요.”라고 진지하게 목소리를 높인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40세가 된 어머니가 많이 늙어 보였다. 돌아가실
까 봐 항상 불안했다. 그런데 요즘은 100세 시대에 사는 것이 눈에 보인
다. 둘러보면 90세는 보통이다. 친구 어머니도 93세인데 꼿꼿하게 사신
다. 그러고 보면 나름은 건강하게 사는 방법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50
대부터는 체력싸움’이라며 틈만 있으면 꾸준히 탁구를 하시던 선배 교장
이 요즘 들어서 존경스럽다.
겨울의 끝은 봄이다. 겨우내 춥고 힘들었던지 잎사귀를 다 털어내고
가지만 앙상하게 있던 베란다의 은사철 화분에 기운이 생겼다. 연한 싹
이 뾰족뾰족 돋아나고 있다. 순식간에 봄기운이 돌면서 앙상한 가지를
아우르기 시작했다. 누런 가지가 초록색의 잎사귀로 덮이면서 알 수 없
는 힘이 솟구치고 있다.
맛있는 식사 한 끼 앞에서도 입이 벌어지게 감사한다. 그러나 지금까
지 살아온 엄청난 시간과 생명 앞에서는 한 번도 감사가 없었다. 오히려
현재와 미래의 찌그러진 모습에 매여 자기 연민에 빠져 있다.
말라죽은 줄 알았던 은사철을 일으킨 봄기운이 나에게 생기를 불어
넣었다.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여보, 물 한 컵, 그리고 과일도 가져다
주세요. 먹고 운동하러 갑시다.” 사과 먹는 소리와 물 마시는 소리가 유
난히 크게 들렸다. 밤 10시였다. 남편은 얼떨떨한 눈으로 바라보며 “그럽
시다. 꿈쩍거리기라도 해야지.”라며 빗나간 마음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듯 장단을 맞춰줬다.
모자를 힘주어 쓰고, 운동화 끈을 단단히 매었다. 밖에는 꽃샘바람이
불고 있었다.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운동장 한 바퀴를 돌 때마다 연민이
사라진다. 두 바퀴, 세 바퀴, 네 바퀴……. 숨을 뱃속 깊이 들이쉬며 계속
달린다.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공기가 상쾌하다. “그 나이에 병 없이 살
려는 것은 지나친 욕심 아니야?”라는 친구의 말이 점점 작아진다. 봄기
운이 푸석한 몸에 새살을 만들어낸다. 치열하게 사랑하고 나눌 수 있는
오늘, 살아있음이 황홀하다.
고영옥 ------------------------------------------------------
2011년 ≪수필과비평≫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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