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 비평』의 이달의 문제작인 김기동님의 마을주막집, 변애선님의 증평에 빠지다,
고해자님의 502호 모퉁이에 대한 박양근교수님의 작품평을 올립니다.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평을 올린다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고통스러운 일인지 생각해봅니다.
좋은 평을 읽고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있는 글, 씨앗이 더 알차게 될 수 있기를.....
바슐라르의 공간 시학과 작가의 공간의식
인간들은 항상 어디에선가 숙박宿泊을 한다. 인간의 삶이 이루어지는
곳이 시간일지라도 인식하는 차원은 공간이다. 과거를 떠올릴 때 시간
을 역류한다는 것은 구실일 뿐, 실제로 기억하는 무대는 생활공간이다.
어릴 때의 침묵 또한 어두운 다락으로 가시화된 심적 자아를 형성한다.
이것이 공간의식으로서 공간 이미지는 밖과 안, 친밀성과 적대성, 그리
고 진정성과 비진정성으로 조합된다.
지리학은 산, 강, 바다, 들판의 지형을 연구하고 토지를 구획하여 경제
적 소유권을 결정해준다. 지리학은 조형예술이나 문학과 달리 공간의식
에 접근하지 못하므로 공간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다루기 위해서는 현
상학적 접근이 요구된다. 그리하여 가스통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
에서 공간의식을 상상력으로 풀이하였다. 바슐라르가 공간시학을 정립
할 때 이미지의 중심에 둔 것이 콤플렉스이다. 요나 콤플렉스라는 현상
은 아이가 태반이라는 공간에 놓이면서 안온한 평화를 느끼는 것으로
태반은 친밀성과 행복이라는 이미지를 구현해 나간다. 자궁이나 집처럼
둥지, 서랍, 벽장도 은밀한 공간성을 지니며 바깥 장소가 내밀하지 않더
라도 개인의 호불호에 따라 이미지를 남다르게 변화시킬 수 있다. 개인
이 상황을 어떻게 인지하는가에 따라 병원, 감옥, 군대, 술집들은 각기
다른 실존성을 결정하는 것이다.
바슐라르가 말하는 공간과 행복의 상관관계는 기하학적 계측으로 따
질 수 없다. 행복한 공간의 반대개념은 적대적 공간이지만 보다 중요한
사실은 심리적 공간은 상상력이 만들어낸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적대적 공간은 매혹보다는 배척을, 자력磁力과 자성磁性에 끌리기보다는
충돌과 마찰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거주자가 밀폐된 공간에 저항하고
반발함에 따라 이미지는 불안정해진다. 상상으로 공간을 재해석하여 행
복과 적대의식, 안과 밖, 진정성과 비진정성의 좌표 사이를 오가기도 한
다. 이러한 차이는 모든 공간은 가변적 가치를 지닌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현실보다 상상에서 공간의식은 더 쉽게 바뀌어진다. 행동의 동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이유도 공간을 의식주衣食住의 일부로만 간주하
기 때문이다. 아무튼 인간의 삶이 공간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고려하
면 수필은 공간의식을 더욱 중요시할 필요가 있다. 본고에서는 행복한
공간, 적대적 공간 그리고 교차적 공간이 뚜렷이 구별되는 문제작을 선
정하여 작가의 공간의식이 작품의 흐름을 어떻게 변화시켜 나가는가를
분석하기로 한다.
1. 행복한 공간의식과 마을 주막집
가스통 바슐라르가 말한 공간 시학을 현상학적으로 다룬 대표적인 학
자는 에드워드 렐프(Edward Relph)이다. 토론토 대학 지리학과에 재직하
고 있는 그는 현상학적 장소이론을 설명하는 키워드로서 진정성과 비진
정성을 제시하였다. 장소는 보편적으로 개방성과 폐쇄성을 지니지만 렐
프는 사람들이 동질의 연대감을 느낀다면 그 장소는 진정성을 지닌다고
보았다. 그가 말하는 진정성은 바슐라르가 언급한 적이 있는 행복한 장
소애와 비슷한 것으로 농촌사회가 진정성을 중시한다면 산업사회는 비
진정성에 지배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비진정성은 이동수단이 발전하면
서 보편적인 공간의식에만 관심을 갖는 안일한 태도를 말한다. 현대 도
시인이 동일한 실내장식으로 꾸며진 프랜차이즈의 편리성을 선호하고
농촌주민이 토착 장소에 평안함과 행복감을 느끼는 점도 이것으로 설명
할 수 있다.
김기동의 <마을 주막집>은 농촌 주막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세계적
으로 알려진 목사로서 국제적 감각을 갖춘 그가 도시적인 호프집을 마
다하고 시골이라는 공간을 선택한 이유는 고향에 대한 깊은 그리움을
재현하기 위해서다. 주막집은 원래 나그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곳이었
다. 선비와 장사치들이 잠자리와 끼니를 해결하고 때로는 회포를 풀기
도 하는 주막은 근현대 소설에서 중요한 무대로 자리해왔다. 나그네의
이동경로에 따라 세워진 길가 주막이 마을과 마을 간의 소식을 서로 주
고받는다면 오백 년의 느티나무 아래에 자리한 마을 주막은 사랑방 다
음으로 마을 젊은이들이 모이는 장소이다. 나아가 겨울이면 “갓소년기
를 벗어난 청년과 장년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며 공동체 의식을 형상
해가는 주막은 대안교실로서 작가의 사춘기호기심과 또래문화를 점하
게 되는 과정을 수채화처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에게는 여느 곳보다
남다른 공간으로 자리한다.
동네 주막집에 술을 파는 아가씨가 왔다는 소문이 사랑방에 퍼지면서
겨울 농한기를 맞이한 술집은 남자들로 법석거린다. 술 파는 아가씨인
‘보익이’는 도회적이다. 미모와 세련된 말씨와 노래 솜씨는 어수룩한 농
촌 청년을 유혹하기에 충분하다. “예쁜 보조개”는 김기동에게 유별난 매
력으로 보인다. 동네청년들은 그녀의 환심을 끌기 위해 경쟁하듯 주막
을 드나들고 김기동보다 어린 소년도 그곳에서 들은 유행가를 배우려고
극성을 부린다. 마을 전체가 보익이로 술렁거린다.
마을에서 김기동은 성실하고 순진한 어린 청년으로 알려져 있다.
“세련된 말씨”를 외지에서 배운 그는 “공부밖에 모르는 애”라는 평판
답게 술집을 드나들지 않았다. 어린 만큼 미지의 경험이 은밀하게 일
어날 수 있는 술집에 두려움을 품기도 한다. 그러한 그도 성인의 입구
에 놓인 만큼 보익이라는 존재에 점점 관심을 갖는다. 60년 후, 그가
오래전 청년기의 주막집을 기억하는 원인이 있다면 주막이라는 토속
적 이미지와 서울아가씨인 보익이라는 여성이미지가 결합하였기 때
문이다.
술집 아가씨를 만나기 전에 그는 여자를 사귄 적이 없다. 착실하였던
그는 또래의 청년들이 술 담배를 하고 희롱질하는 광경을 지켜보는 동
안 “어린애”의 단계에서 벗어난다. 보익이와 김기동은 “우리는 남다르
다”는 공통점을 찾으면서 관심을 주고받는다. 그는 보익이가 자신을 “동
생으로 여겨서인지”, 아니면 “아예 유혹하기 위해서인지” 모르겠다고 말
하지만 여자라는 존재에 눈을 뜬 것은 사실이다. 마을 청년들은 “그 애는
놔둬.”라고 질투하면서 보익이의 환심을 빼앗으려고 하지만 주막집과
그녀는 그를 남자로 성숙시켜 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실제 그의 동네는
“학교에 대한 관심이 없고 청소년들은 대개 소학교에 들어가지 못했다.”
어느 날 그는 그날 밤 “등잔불 밑의 그 젊은 여인”이 자신을 유혹한 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나는 오히려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을 잊으려고 애썼으나 나 역시 그날
밤 등잔 불빛에 보조개가 깊숙한 그 젊은 여인의 모습이 예뻐 보이기도
했고, 수많은 시골 청년들 사이에 끼어 앉아 유행가를 부르는 모습이 가
련하게도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왠지 또 보고 싶은 인상처럼 느껴져 내
어린 가슴에도 무엇인지 모를 유혹이 침범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보익이의 존재를 묘사할 때 아가씨에서 여인으로 호칭이 달라졌음은
매우 흥미롭다. 아가씨는 처녀성이라는 정신적 이미지를, 여인은 경험
성이라는 육체적 이미지를 은유하듯 그녀를 통하여 여성을 알게 되었음
을 고백하는 셈이다. 보익이와 합석했던 그는 형님 청년들에게 “몹쓸
자리에서 몹쓸 모습을 보여준 것”은 아닌가 걱정되어 술집에 가는 행동
을 그만둔다. 동네 남자들이 이제 “보익이 아가씨에게 혼을 빼앗긴 사람
들”로 보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일하는 집 할아버지의 막내딸인
내 의누나” 에게 알려질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는 여전히 순진하고 순수
하다. 의누나로 표상되는 여성 숭배감이 보익이로 인하여 더럽혀지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 하여 술집이 그에게 적대적인 공간은 아
니다. 주막에 대한 부정적인 공간의식은 마을이 강요한 일종의 강박관
념으로서 김기동이 의식하는 주막은 두려움이 아니라 추억과 그리움의
대상이다.
어쨌든 보익이가 한 달 후 마을을 떠나지만 김기동에게 남겨진 심리
적 파문은 적지 않다. 우선 술집 아가씨를 통하여 인간은 정신과 육체
를 함께 지니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나아가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 보익이는 주막집 여자가 아니라 “문득 어디선가 다시 볼 듯한
가련하고 순수한 여성의 대리인”이라는 점이다. 이처럼 보익이에게는
시간을 초월하는 사랑과 그리움의 대상이라는 언어적 고백이 내포된
다. 김기동은 어려운 삶을 이어가는 여인을 만날 때마다 느티나무 주막
집에 왔던, 나아가 그 옆에 다가온 보익이를 떠올리는 것이다. 시간은
사라져도 주막집은 그의 의식에 남아 현재의 도시공간과 고향을 이어
주는 매체로 자리한다. 60년 전의 첫사랑을 기억한다면 그것은 주막집
이라는 공간에 등잔불과 “빨간 보조개”가 함께하는 공간의식에 기인하
기 때문일 것이다.
근대소설에서 묘사되는 길가 주막집에서 펼쳐지는 남녀 간의 사랑은
보통 일회성에 그치기 쉽다. 하지만 마을 주막은 첫사랑과 행복한 공간
의식이 합쳐 세월의 흐름을 이겨낸다. 그 진정성만으로 <마을 주막집>
은 성장수필의 모티프인 청년기의 사랑을 회상시켜주는 공간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2. 적대적 공간의식과 군대
변애선의 <증평에 빠지다>에 설정된 이미지는 극히 단순하다. 증평의
현실적 상황을 외면해버린 작가는 오직 상상과 심리적 현상에만 의존하
려 한다. 대부분의 장소가 현실적이면서 상상적이고, 행복하면서 적대
적으로 비친 공간 이미지임에도 증평은 위험하고 믿을 수 없는 장소에
머물러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다. 증평에는 신병훈련소가 있고 그의 아들
이 지금 그곳에서 신병훈련을 받고 있다.
군대는 국가를 지키는 병사를 양성하는 곳이다. 군대의 미덕은 충성
과 복종이며 군인은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사명감을 배운다.
한국남성이라면 피할 수 없는 국방의 의무는 “아버지가 지킨 조국- 이
제 내가 책임진다.”라는 언술의 구호로 전달된다. 당연히 인명의 부분적
인 손실이 불가피하고 일단 군대에 들어가면 누구도 그 가능성에서 벗
어날 수 없다. 군대가 불안한 공간으로 여겨지면서 아들을 입대시킨 어
머니들은 쉽사리 불신과 불안에 젖어든다.
하지만 변애선의 반응은 남다르다. 아들이 군대에 갔을 때의 첫 반응
은 무덤덤이었다. 그녀의 천성이 느리거나, 아니면 시간이 지나면 감정
이 증폭하는 기질 탓인지는 진단하기 어렵지만 ‘나는 맹렬하다.’는 자의
식은 나날이 높아진다. 저항의식을 행동화하여 군대라는 공간에 침투할
때 그녀가 선택한 방식은 편지와 인터넷이다. 가족을 위시하여 아들의
친구와 일가친척들에게 애걸 반 협박 반으로 위문편지를 보내도록 강요
한다. “가 버린 아이”와 연락하기 위해 인터넷에 빠지는 괴이한 습성은
마침내 “거기 붙어서 살았다.”라는 자가진단에 다다른다. “모든 것이 나
의 업보”라는 자책과 “세상은 냉정했다.”라는 무관심한 현실에 직면할수
록 훈련병 아들을 지키려는 그의 결심은 더욱 굳어간다. 더군다나 군대
는 여성금지 구역이고 전쟁이라는 야만성을 장려하는 곳이므로 여성과
어머니로서 그는 자식이 야만성에 길들여지는 현실을 참을 수 없다. 군
대를 감시하고 있던 인터넷 접속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군대가 재생산하
는 이데올로기에 가위눌려 “눈가가 벌겋게 될 정도로 불안하고 슬퍼진
다.” 그 결과 “아예 충용부대 카페지기”로 처신할 작정을 한다.
변애선이 수행하는 스토리텔링은 허구는 아닐지라도 과장된 표현에
는 관용을 보여준다. 군대 체험을 이야기할 때 남성은 사실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거짓과 과장을 종종 사용한다. 남성 전유의 과장된 전쟁 모험
담은 재미와 흥미를 불러일으키면서 군대가 지닌 형식주의와 권위를 허
물기도 한다. 변애선은 물론 군대라는 영역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러
나 현실공간의 벽을 뛰어넘는 인터넷 덕분에 매일이다시피 편지를 보내
고 부대를 감시하는 동안 군인들의 과장법을 모방하게 된다. 과장된 그
의 언술은 자식을 군대에 보냈다는 죄의식을 감소시키는 효과를 발휘한
다. “어떻게 내가 기른 자식인데.”라는 반복되는 독백은 아들에 대한 절
대적 소유권을 재확인시켜 준다. 지나치게 과장된 수사법은 변애선을
여타 어머니와 다른 보이마마로 전락시킨다. 물론 이런 결과는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불분명하다.
군대를 적대적 공간으로 설정하여 ‘내 아들은 내가 지킨다.’는 주제를
구체화한 수필쓰기 전략은 독자에게 재미를 준다는 점에서 거의 성공적
이다. 극성 아줌마라는 별명을 얻은 희생조차 불가피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문체는 <증평에 빠지다>를 위문형 수필이 아니라 유쾌한 수다거
리로 바꾸어 버렸다. 2주차 아들의 인터넷 사진에서 목에 비친 보랏빛을
구타당한(?) 흔적으로 간주하는 상황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것이다. 아
들을 수호하는 입장에서 보면 당장에 증평 훈련소로 달려가 힘 있는 빽
을 찾으려는 극성은 이해가 되고 남음이 있다. 중대장에게 “목에 난 멍”
을 해명하도록 보낸 편지의 답장으로 받은 답변은 안도감을 준다.
어둡고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숨이 끊어지다가 구명정에 올라탄 심정
이 그럴 것이다. 하느님, 천주님, 예수님, 석가님, 누구라도 좋으니 붙들
고 껴안고 고맙다 하고 싶어지는.
“사진이 잘못되었다.”라는 사실적 설명에도 불구하고 변애선의 불신
은 줄어들지 않는다. 군대가 진실을 숨긴다는 그녀의 생각은 갈수록 자
의적이 되면서 해학미와 긴장미는 고조된다.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들”,
“내가 너무 유별나다고, 천만에”, “그때부터 울었다”, “군복만 입으면 모
두 내 아들인 것을”, “그래서 보초를 강화했다” 등의 센티멘털한 언술을
접하다 보면 독자는 아들이 실제 구타를 당하였는가, 아닌가라는 문제
보다 자기확신에 몰두한 어머니에게 웃음을 터뜨린다. 불안감이 웃음거
리가 되고 독자와 공유했던 군대에 대한 적대감이 희석된다. 그 희화성
은 통절한 아픔이 아니라 과잉된 자기 희롱에 불과한 것이다. 수필의
재미가 가벼운 농에 있다 할지라도 유머는 인간사에 대한 성찰과 열린
공간 의식에서 나온다는 점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변애선의 고조된 감정을 진정시켜주는 것은 역설적으로 직업군인 남
성의 담론이다. 그것은 “여기는 군대입니다. 학교가 아닙니다.”라고 은
근히 나무라는 군사우편과 훈련병 수료식에서 아들을 뺨을 쓸어내릴 때
“그만하시라”고 말하는 대꾸로 구체화된다. 군사우편과 아들이 보여주
는 말과 행동은 변애선의 이야기에 빠져있던 독자를 일깨운다. 무엇보
다 “아무 일 없습니다.”라는 중대장의 냉정한 자세는 군대는 언제 어디
서나 존재하는 현실적 공간임을 재확인시켜 준다.
변애선은 군대가 어떤 곳임을 스스로 자각할 수밖에 없다. 변화된 공
간의식은 군인들을 “나의 아들들”로 부르고, 아들이 훈련소를 퇴소한 후
에도 자신은 “마음이 너무 뜨거워 (증평을) 떠날 수 없다.”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가 자각해온 공간의식은 현재형이 아니라 과거형이다. 아들이
다른 부대로 전출하면 당연히 그의 공간의식은 증평에서 벗어나 아들
따라 이동한다. 변애선이 감시해온 군대마저 실재 부대가 아니라 인터
넷에서 작가가 만들어낸 가상공간이다. 이리하여 “<증평에 빠지다>”가
아니라 “증평에서 빠지다”가 더 적절하다고 하겠다.
3. 교차적 공간의식과 병실
문학은 이미지를 찾는 상상의 작업에 속한다. 공간을 이미지화하면
은밀한 곳이 폐쇄적으로 열리고 불편한 곳이 즐거워지고 부정적인 상황
이 긍정적 현상으로 변할 수 있다. 이러한 유동성은 작가가 보편적인
공간의식을 거부하고 체험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장소성을 모색한 결과
라고 하겠다.
바슐라르가 예로 든 대표적으로 행복한 공간은 가족으로 이루어진 집
이다. 집과 거리를 둔 불편하고 적대적인 장소도 집에 못지않은 즐거운
분위기를 가질 수 있다고 그는 말하였다. 주유소, 백화점, 터미널과 같은
도시 공간이 처음에는 토포포비아를 갖지만 상황이 바뀌고 인식의 주체
가 누구인가에 따라 장소애를 드러낸다.
고해자가 <502호 모퉁이>로 이름 붙인 장소는 노인 병실이다. 병실이
라는 공간에서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은 환자와 의료인과 가족들이다. 의
사와 달리 환자들은 희망과 절망의 순간을 오가면서 투병 생활을 꾸려
간다. 병원에 반응하는 공간의식은 환자 상태에 비추어 경외감과 두려
움의 사이를 오간다. 시나 소설이 병원을 묘사할 때 흰 벽, 침묵, 신음,
비명을 강조하는 이유는 환자는 자유의지로 퇴원할 수 없다는 폐쇄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이렇듯이 병원은 삶과 죽음, 고통과 웃음이 교차하
는 중간지대에 해당한다.
병원은 환자들에게 절대적인 희망을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본질적으
로 친숙하기 어려운 공간에 속한다. “502호 모퉁이”는 작가의 어머니가
입원한 병실이라는 점에서 두려움과 좌절감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닌다. 작가가 502호 병실을 “경계의 모퉁이”로 풀이하는 까닭도 일반
적인 관념과 개별적인 상황이 어울려 있어서라고 하겠다.
고해자의 병상기는 환자들의 나이를 소개하는 서두로 시작한다. 나이
를 기준으로 서열을 정하는 것은 사회적 신분이 무시되고 오직 생존 가
능성만이 사실을 보여줄 뿐 아니라 다른 병실의 질박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강조하는 이중 효과를 지닌다. 다른 병실의 주거자들이 무력
한 환자에 머물러 있다면 502호 환자들은 병원의 기존 체계를 바꾸어
간다. 그들이 병실의 주역이 된 것이다. 환자 개개인이 모여 “낯설지만
정감있는 병원살이 식구”로 살아가므로 음료수가 들어오면 “그거 한 병
씩 다 돌리라”는 나눔을 실천한다. 병실 식구로서 음식을 나누어 먹고
함께 노래를 부른다. 작가도 병실을 행복한 공간으로 묘사하기 위해 “웃
음바다”라는 이미지를 빌려온다. 환자가족이 아니라 가족환자라는 집단
의식은 91세 할머니의 퇴원 고별식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필시 당신의 봄날, 어느 하루를 퍼 나르는 것 같습니다. 사는 일과
떠날 일의 경계를 들락거리고, 가두었던 것을 토해내는 것이지요. ……
팔랑거리는 날갯짓과 소리꾼인 양 가락을 타는 심지로는 치매를 앓던
할머니가 아닙니다. 대체 누가 태엽을 돌려놓았던 것일까요.
범벅이 된 병실 안의 웃음소리와 추임새, 박수소리가 새어나갔는지
구경꾼들이 모였습니다. 그들도 한 무리가 되어 물살을 탑니다.
할머니 환자가 부르는 노래는 잊혀진 생명을 새롭게 꽃피운다. 실낙
원이었던 병실이 복락원으로 전환하는 것은 과거라는 시간을 되살린 덕
분이다. 그러나 그 변화를 가시화해주는 곳은 병실이라는 공간이다. 환
자들의 기쁨도 링거수액과 보약이 아니라 노래와 박수에서 나온다. 노
래가 마법처럼 추억을 병실에 가득 채우는 동안 노인병실에서 생긴 감
동적인 파장은 다른 병실로 퍼져간다. 몰려든 구경꾼들조차 군대에 아
들을 보낸 어머니의 수다를 엿들을 때와 달리 박수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행복하고 즐거웠던 병실은 ‘병원신세’라는 언어에 의하여 침울
한 공간으로 되돌아간다. 병원신세는 “김장배추를 사다놓고 입원한” 어
머니를 간호하는 동안 지친 작가가 꺼낸 푸념의 표현이다. 푸념은 지금
까지의 즐거운 현상을 전복시킨다. 우선 작가의 관점은 6인실 병실에서
1인실 병상으로 축소되고 웃음바다가 사라진 병상에는 ‘어머니는 환자’
라는 현실이 남는다. 병원신세를 견뎌야 하는 24시간도 쪽잠을 자고 목
울음을 삼키는 불편한 공간으로 바뀐다. 이렇듯 작가의 공간의식은 고
통과 절망의 이미지와 재결합한다.
어머니를 간호하는 고해자의 공간의식에는 “병실인지 놀이터인지 분
간 못하는” 혼돈이 깔려있다. 그의 혼돈은 병실에 대한 공간의식이 아
니라 502호 환자들을 지켜보는 이중적 관점에서 비롯한다. 그래서 병실
은 환자들과 어울리면 놀이터가 되고 어머니에게 시선을 돌리면 생사
의 모퉁이로 바뀐다. 병실이 장소애의 대상인가, 장소공포심의 대상인
가라는 문제가 작가의 공간의식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502호 병실이
어느 곳보다 유동성과 교차성을 지니고 있다는 상황은 “그날 아침 병원
살이 7개월째인 분이 음료수를 돌립니다.”라고 말하는 순환구조가 재
확인해주고 있다. 그만큼 주인공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어 병실을 교차
적 공간으로 묘사한 것에서 밝혀지듯이 고해자의 공간의식은 열려있다
고 말할 수 있다.
닫으며
인간의 행위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루어진다면 시간과 공간은 행위
자의 심리와 정서를 지배한다. 동일한 장소에 자리하는 사람들은 자기
들만의 장소가 지니고 있는 진정성을 공유해 나간다. 그동안 작가는 자
신의 체험에 맞게 상황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거나 부정적으로 그려내어
‘장소의 정체성’을 표현한다. 작가들이 의식하는 장소를 설명하는 이항
대립은 ‘진정성과 비진정성’과 ‘내부성과 외부성’과 ‘장소와 무장소’로 구
분된다. 이러한 요소들이 어떻게 결합하는가에 따라 행복한 공간, 적대
적 공간, 혹은 교차적 공간이 만들어진다. 수필작가는 등장인물의 행동
이 전개되는 장소를 입체적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공간은 사건이 일
어나는 배경이기도 하지만 등장인물들과 심리적으로 교감하는 또 다른
등장인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 공간시학을 인지한 수필가일수록 인간
의 삶을 더 깊게 통찰할 수 있을 것이다.
박양근 -----------------------------------------------------
부경대 영문과 교수. 문학평론가, 수필가, 칼럼니스트, 영남수필학회장.
수필집: ≪길을 줍다≫, ≪서 있는 자≫, ≪문자도≫ 등.
저서: ≪사이버리즘과 수필미학≫, ≪좋은 수필 창작론≫, ≪미국수필 200년≫ 등.
수상: 신곡문학대상, 구름카페문학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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