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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문학 2012년 1월호, 연재동화] 일송정 푸른 솔은(13) - 김선태

신아미디어 2012. 3. 20. 12:00

김선태선생님의 연재동화를 소개합니다. 우리의 민족정신을 느껴보세요.

 

 

일송정 푸른 솔은 (13)

 

11. ‘정의부’의 깃발 아래
   그는 다시 효과 있는 항일운동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만주에 있
는 독립운동단체가 재통합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을 하고, 1924
년 7월 10일 재만통일회 준비회를 열기로 하고 남만주에 있는 각
단체를 돌아다니며 이에 참가할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그 결과 통
의부를 비롯하여 광정단, 의성단, 길림주민회, 노동친목회, 자치회,
고본계, 대한독립단(중도에 떨어져나감), 학우회(중도에 떨어져나
감) 등의 대표로 김동삼, 고할신, 이진산, 이천민, 김거, 홍진, 최명

 

 

수, 이승범, 윤하진, 이형규, 이장령, 김철 등 25명이 모여 의장에
김동삼을 선출하고 통합기구를 만들기로 의결하기에 이르렀습니
다. 그리하여 “인류 평등의 정의 민족생영의 정신으로 조국 독립의
대업을 완수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헌장 아래에 1925년 1월 ‘정의
부’를 새로 결성하였습니다. 결성 당시에 의결된 사항은 다음과 같
습니다.

     (1) 지방의 치안 유지를 위해 무장대를 둔다.
     (2) 통치 구역은 당분간 하얼빈 액목 북간도의 선을 그어 그
           이남의 만주 전부로 한다.
     (3) 세입으로 매년 호당 연액 6원과 따로 소득세를 부과한다.

   조직은 중앙집행위원장 이탁(만주사변이 있은 후에 변절함), 총
무위원장 김이대, 군사위원장 지청천, 재무위원장 오동진, 민사위
원장 김호, 법무위원장 이진산, 외무위원장 현익철, 검무감 최명수,
사령장 지청천, 참모장 김동삼, 사령부관 정이형으로 하고, 그 본
부는 길림성 화전현 성내에 두고, 군사활동을 영구적이며 전면적
으로 실천하기 위하여 교포들에게 경제시설과 문화기관을 설립하
기로 하였습니다.
   당시 장교 중에서 우수한 인재는 운남, 광동의 군관학교에 유학
시키는 한편 교육기관으로 각지에 있는 한국인 마을에 소학교를
설립하고, 또 중등교육을 위해 흥업현에 화흥중학교, 유하현에는
동명중학교, 그리고 화전에는 화성의숙 등의 중학 교육기관을 열
어 혁명간부 양성에 힘을 썼습니다. 또 기관지로 ≪성우≫와 ≪대
동민보≫를 펴내어서 민족정신을 높이고, 혁명이념을 고취는 데
애를 썼습니다. 뿐만 아니라, 농민조합과 농업공사를 창설하여 황
무지를 개척하여 독립운동가의 가족들이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아울러 청년 훈련소를 각지에 설립하였습니다. 또한
교포들에게 세금을 내게 하여 무기를 사들이고 군사훈련을 꾸준히
실시하여 국내 진출을 위한 항일전에 대비하였습니다.
   이 무렵 정의부 소속 7개 중대의 독립군 활동은 아주 눈부신 것
이었는데, 참모장 김동삼은 국내공작을 계획하기에 매우 바쁜 나
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정의부는 1925년 3월에 국내 공작을 시
작하여, 3월 19일에는 초산 일본경찰의 수목주재소를 습격하여 일
본 경찰관 5명을 사살했고, 바로 이날에 송암 주재소를 습격하여
무기를 다수 빼앗아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습니다. 이어서 7월
4일에는 이진무, 김귀진, 김승엽 등 7명의 독립군이 농민으로 가장
하고 숨어들어 평안북도 철산군 차련관 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
경찰 4명을 사살하고, 무기를 전부 빼앗아 왔습니다.
   또한 그들은 부근의 부잣집인 양조장에 들어가 주인을 불러앉히
고 말했습니다.
   “너는 지금 우리나라를 팔아먹은 역적들과도 같은 짓을 하고 있
는 것이다. 우리 동포들에게 술을 팔아 얻은 이익을 일본 놈들에게
세금으로 바치고 있으니, 이것은 일본을 돕고 있는 것이 아니냐?

 

지금 우리는 일본주재소의 순사들을 죽이고 무기를 빼앗아 가는
길인데, 만약 네가 우리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나라 독립을 찾겠다는 우리가 우리 동포를
괴롭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으니, 우리에게 독립운동 자
금을 좀 내어주기 바란다. 다만 네가 나중에 일본 놈들의 등살에
견딜 수 있도록 너를 결박하여 놓을 테니 너는 결박을 당한 채 돈
을 빼앗겼다고만 하면 될 것이니라.”
   그러자 그도 우리 민족이었기에 기꺼이 돈을 내어주었습니다.
이렇게 군사자금으로 4천 원을 거두어 가지고, 선천을 거쳐 무사히
돌아와서 독립군의 용맹은 국내에서 크게 떨치게 되었습니다.
   제 5중대장 김석하와 제 7중대장 정이형은 대원 30여 명을 거느
리고 국내에 들어와서 8월 18일 벽동 일본 경찰 여해 출장소를 습
격하여서, 이곳에서 일본경찰 3명을 사살하고 출장소를 불태웠으
며 무기 전부를 빼앗았습니다. 이렇게 마음놓고 독립운동을 하게
되자, 독립군들은 압록강을 건너서 평안도의 벽동, 초산, 철산 등
에서 일본 경찰의 주재소(지금의 지서)를 자주 습격하여 위력을
떨쳤습니다. 특히 의용대원들 가운데는 관서총관소의 재무를 맡아
보던 김희진이 뛰어나서 1923년부터 많은 활동을 해왔으며, 이진
무는 뒤에 왜적과 싸우다가 한쪽 눈을 잃어 독안장군(애꾸눈 장군)
이란 별명으로 평안북도 일대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이
름을 떨치다가 1932년에 체포되어서 2년 뒤인 1934년 평양 감옥에
서 처형이 되었습니다.
   1925년 3월 상해 임시의정원에서는 이승만에 대한 탄핵안(대통
령의 잘못을 국회에서 결의하여 책임을 묻자는 안건)이 정식으로
논의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제출된 위임통
치안(우리나라를 맡아서 다스려 달라는 안건)은 임시정부의 위신
을 크게 떨어뜨리는 일이라는 것과, 재정을 바르게 사용하지 못하
였다는 등 5가지를 들어서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승만은 대통령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임시의정원은 국무령 중심의 내각책임제(국무
총리와 장관이 중심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제도)로 그 체제를
바꾸고, 박은식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하였습니다. 박은식은 개정
헌법에서 정한 대로 3개월 만에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1925
년 7월에는 초대 국무령으로 정의부의 간부이며 서로군정서의 독
판을 지낸 적이 있는 이상룡을 선출하였습니다. 이상룡은 서간도
로부터 상해에 부임하기 앞서 평소부터 서로 믿고 신망하는 김동
삼을 만났습니다.
   “일송 선생, 당신과 같은 인물이 임시정부에서 일을 맡아 주어야
합니다. 이번에 내가 국무령으로 선출되어 갑니다만 곁에서 도와
줄 믿음직한 인물이 필요해요. 나와 함께 가서 군무를 좀 맡아 주
었으면 감사하겠소. 김 동지 도와주시오.”
   이상룡은 김동삼에게 국무위원으로 입각(장관이 되어)하여 같이
가주기를 청했습니다.
   “제가 이곳의 동포들을 버리고 내 일신의 영달을 위해 이곳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이곳에는 수십만의 우리 동포가 나라 잃은
슬픔을 안고 만리타국에 와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애쓰고 있습니
다.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이들을 끌어안고 다독거리면서 독립의
그날까지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김동삼은 만주의 일을 버리고 갈 수 없다고 사양하였습니다. 여
러 차례에 걸쳐 권유했으나, 김동삼은 끝내 사절하였고, 하는 수
없이 이상룡은 서둘러 내각을 꾸미는 일에 착수하여 그를 노동총
판에 발령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김좌진, 오동진 등 주로 만주에서
군사지도자로 활동하던 분들을 중심으로 내각을 짜려 했으나, 당
사자들은 모두 부임하지 않겠다고 사절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상룡은 이듬해 2월까지 내각을 꾸미는 데 실패하고 결국은 국무
령을 사임하고 다시 서간도로 돌아오고야 말았습니다. 당시 김동
삼이 임정에 참여하기를 사양한 것은 일찍이 임시정부의 내부 갈
등에 큰 충격을 받은 바가 있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는 그가 오랫동
안 독립기지로 터전을 닦아온 만주가 독립운동을 실천하는 데 큰
힘이 될 것임을 깊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무렵
동만주의 정의부 내에서는 이상룡이 임시정부의 국무령으로 부임
해 가자 중앙행정위원회와 중앙의회 사이에 의견 대립이 심각하여
서로 불신임결의와 의회 해산을 시키는 등으로 혼란이 일어났습니
다. 그러자 김동삼이 나서서 중간에서 잘 조정을 하여 그 다음 해
에 국민대표자회와 새로운 중앙의회를 소집하여 원만하게 수습이
되어 정의부는 남만주의 지방의 한족 행정부로서 그 기반을 점차
굳혀 나갔습니다. 그리하여 1926년 11월경에 이르러 정의부는 길

 

 

림성과 봉천성의 양쪽 성 관내에서 15,362호의 우리나라 교포를
통치하는 한편 조국광복을 위한 항일 독립운동의 중심기관이 되어
그 임무를 수행해 나가게 되었습니다.
   한편 1926년 6월에 이르러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삼시궁송과 중
국 봉천성경찰청장 사이에 체결된 ‘삼시협정’이라 불리는 조약으로
인해서 만주에 있는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항일전쟁을 계속해 나가
는 데 큰 제약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협정은 간사하고 교활한 일
본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만주에 사는 우리 동포
들의 활동을 함부로 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만든 취재법이었므
로, 이때부터는 독립운동의 어려움은 더욱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
습니다. 우리 동포들이 오가는 길목에서 검문을 해서 독립운동을
하는 동포들을 잡겠다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김
동삼은 남만주를 근거로 한 항일운동이 어려움이 더해 갈수록 흩
어진 힘을 모아 적과 대항하려는 굳은 신념이 더욱 굳어갈 뿐이었
습니다.
   “일본이 우리의 목을 죄기 위해서 삼시협정으로 자기 나라도 아
닌 이곳에서도 일본 경찰이나 헌병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검문
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 것이니, 우리 동지들은 이제 더욱 조심
스럽게 활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소.”
   그는 독립운동을 하는 동지들의 파벌싸움과 서로 헐뜯고 한데
뭉치지 못함을 슬퍼하면서도 동지들과 함께 단합할 꿈을 버리지
않고, 독립군에게 계속해서 할 일을 명령하여 속속 국내로 들어가
일제와의 항쟁을 잠시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남만주의 각 단체와 군단들은 정의부의 결성이 되므로 해서 일
단은 통합하자는 운동에 성공은 했으나, 자체 조직 안에서 파벌이
생기기 시작했고, 남북 만주의 독립운동의 단체들이 모이고 흩어
짐이 하도 자주 있어서 각 단체 지도자들의 사이에는 알력과 대립
이 그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 무렵에 만주를 근거로 하는 독립운
동을 하는 단체로는 남만주의 정의부와 참의부, 그리고 북만주의
신민부로 크게 세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1927년 봄 마침 안창호가 상해에서 길림으로 들어와서 조양문
밖 대동공창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순국한 나석
주 의사의 추도식을 갖고, 민족운동의 장래에 대한 강연을 겸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동지들은 안창호 선생의 강연도 듣고 나석주 의사의 그
빛나는 애국정신을 본받아서 더 옹골찬 독립운동을 하자는 결의를
다지기로 합시다. 여러분들은 모두 한데 모여서 우리의 결의를 다
시 한 번 다집시다.”
   정의부 간부를 비롯한 만주의 각 운동단체의 지도자, 지방유지
등은 서로 연락을 하여 500여 명을 초청하여 민족운동자들의 단결
을 위한 좋은 기회로 삼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본경찰의
첩보원에게 비밀이 새어나가, 안창호를 비롯한 300여 명이나 되는
유지와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관헌에게 체포되어서 갇히고 마는 우


리 독립운동사에서 ‘길림대검거’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들은 수십여 일 동안이나 중국 관헌들에게 갖은 고초를 다 겪었습
니다.
   “우리가 조선의 독립을 돕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독립운동을 하
는 지도자들을 모두 잡아 가둔다면, 일본과 싸우고 있는 우리는
일본의 편인가 아니면 조선을 돕는 편인가?”
   “그들은 우리의 독립을 위협하는 사람들도 아니고, 단지 잃어버
린 자기 나라를 되찾겠다고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싸움
이 우리에게 이로움이 있을망정 해로움이 없는데, 우리가 그들을
잡아 가두고 고생을 시키거나 일본에 넘기는 일은 크게 잘못된 일
이라 생각하니 어서 풀어주도록 하라.”
   빗발치는 중국 안에서의 여론과 산서성 독군 민석산의 호의가
있어서 겨우 석방은 되었는데, 이 일을 기회로 군사운동의 통합운
동을 더욱 서둘러 조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927년 8월 하순에
길림에서 각 부대 대표자들이 모여 통일된 독립운동의 이념 아래
뭉쳐서 계속하여 통합문제를 논의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의부 안에
서는 촉성회파와 협의회파가 대립되어 분열의 위기를 겪고 있었
고, 신민부에도 공산당의 지휘를 받은 공산주의자들의 방해 공작
으로 알력이 겉으로 드러나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한편 1927년 4월 1일 오동진 등 35명의 동지들은 모여서 ‘농민호
조사’를 만들어서 농민 운동을 시작했었습니다. 이는 만주 지방에
이주해온 한국 농민의 생활안정과 산업, 교육, 위생보건의 향상을
위해서는 우리 동포들의 단계적 협동이 가장 크게 요구되었기 때
문이었습니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열두 항의 ‘농민호조사약속’을
정하고, 우리 교포들을 계몽하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대대로 농사를 지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
들은 품앗이 같은 좋은 제도를 스스로 만들어서 바쁜 농촌의 일손
을 한데 모아 일을 능률적으로 해나갔습니다. 이 천만 리 먼 땅에
모인 우리들이 서로 돕지 않고 서로 헐뜯기나 한다면 중국 사람들
은 그런 우리를 고소해 하면서 우리를 이용하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 서로 돕고 한마음 한뜻이 되어서 뭉칩시다.”
   이런 그들의 외침은 우리 동포들을 조금씩 깨우치게 해주었습니
다. 마침 만주에 와서 길림대검거 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석방이
된 안창호는 이 농민호조사 운동을 매우 좋은 의견으로 받아들여
길림성 안의 각 마을을 돌아다니며, 한국과 중국이 연합하여 함께
농민호조사를 만들어 보자고 노력을 하였으나 결국 큰 성과를 거
두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김선태 선생님은 -----------------------------------------
∙ 1968년 삼남교육신문 신춘문예 동화 당선.

∙ 한국문인협회 이사 2회 역임.

∙ 한국아동문학회 부회장, 한글학회 정회원, 녹원환경신문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