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호탁님이 수필과 비평에 연재하고 계시는 의학에세이를 소개합니다.
나도 꾸고 싶다, 그런 꿈을
달갑잖은 표정으로 우리는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44세의 여자 환
자는 못마땅한 표정을 한 채 연신 입을 실룩거리며 구시렁댔다. 의사
라지만 그런 환자와 대화를 나누기란 눈곱만치도 내키지 않는 일이었
다. 차라리 아프다며 소리를 지르거나 오만상을 찌푸리면 모를까, 자
신이 병원을 찾은 이유를 모르겠다니……. 부적절하고 어색한 만남이
었다.
“무슨 일로 병원을 찾으셨습니까?”
나는 뭐라도 물어야 했다. 영문도 모른 채 생면부지의 여자가 늘어놓
는 해괴한 독백을 잠자코 들어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나도 그걸 모르겠다니까요, 선생님.”
여자 환자는 왜 자신에게 그걸 묻느냐며 오히려 내게 따지듯 물었다.
단호한 그녀의 말투와 황당해 하는 표정만으로 놓고 보면 누구라도 그
녀가 병원을 찾은 이유를 모른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않은 채 여자의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다봤다.
“불편한 증상이 있어야 말씀을 드리죠.”
나의 불편한 심기를 눈치챘음인지 여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덧붙였
다. 나는 한 번 더 침묵하기로 했다. 환자 옆에 뻘쭘히 서 있던 정 간호
사가 가만히 몸을 틀고는 벽에 걸려 있던 달력을 느릿느릿 넘기기 시작
했다.
“딸아이 때문이에요.”
형사 앞에서 마지못해 진실을 털어놓는 범인마냥 여자 환자가 한마디
툭 내뱉었다.
“그게 무슨.”
구색을 맞추기라도 하려는 듯 나 역시 형사처럼 단서가 될 만한 말꼬
리를 넌지시 물고 늘어졌다.
“딸아이가 하도 검진을 받아보라고 하기에 어쩔 수 없이 병원에 오게
된 겁니다.”
마침내 여자 환자는 입을 열었고, 나와 정 간호사의 얼굴엔 희색이
돌았다.
“그러시군요.”
굳어 있던 나의 입술 근육도 슬슬 풀리기 시작했다.
“스물넷 된 딸아이가 있는데, 하도 건강검진을 받아보라며 애원하는
통에…….”
“따님이 여간 기특한 게 아니군요.”
“제 딸이라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여간 효녀가 아닙니다.”
돌연 여자 환자의 얼굴이 거짓말처럼 환히 밝아졌다.
“말썽 한번 부린 일이 없고 어찌나 내게 잘하는지. 그런 딸의 부탁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어요? 딸아이만 아니었으면 병원에 오는 일은 결
단코 없었을 겁니다. 불편한 증상이라곤 없었으니까요.”
그렇게 해서 여자 환자는 내게 대장내시경검사를 받았다.
에스결장에서 용종이 발견되었다. 용종은 1.5cm 정도의 크기로 울퉁
불퉁 못생긴 감자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대장내시경을 이용한 용종
절제술이 이루어졌고, 제거된 용종의 일부에서 암세포가 발견되었다.
다행히 0기암이었다. 환자가 기다려졌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일이라면
굳이 의사가 아니라도 누가 되었든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깃털처
럼 사소한 일들이 쌓여 개인의 삶을 이루듯, 지극히 사소한 일에 의해
개인이나 국가의 운명이 통째로 뒤바뀌기도 하는 것을 우리는 주변이나
역사를 통해 목격하기도 하는 것인데, 나는 바로 그 현장에 서 있었던
것이다. 용종이 이미 암세포로 변신을 마쳤다면 주변 조직으로 뿌리를
뻗어 번져나가는 건 시간 문제였다. 일이 년 정도만 늦게 대장내시경검
사를 받았더라면 분명 여자 환자의 운명은 백팔십 도 달라졌을 것이다.
한 인간의 운명이 선한 결과를 향해 일순간에 극적으로 뒤바뀌는 것을
바로 눈앞에서 목격한 것인데 어찌 짜릿하고 흥분되지 않으랴. 마침내
여자 환자가 내 앞에 나타났다. 조직검사 결과를 알아보기 위해. 황홀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조직검사는 어떻게 나왔나요?”
딸로 인해 쓸데없는 검사를 받았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기에, 여자
환자의 태도는 전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축하드립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하셨습니다.”
아리송한 나의 대답에 환자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다행히 아주 초기에 발견되어 내시경만으로도 암세포를 완벽하게 제
거할 수 있었습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아무튼
축하드립니다.”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 들뜬 표정으로 말을 건네는 나를 보고서
야 안심이 되었던지 그제야 여자 환자의 얼굴에서도 환한 웃음이 피어
올랐다.
“제 딸이 나를 살린 거로군요.”
고개를 약간 뒤로 젖힌 채 천장을 응시하며 말을 건네는 여자 환자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잠시 후 그녀가 내게 들려준 얘기는 범상치가
않았다.
“얼마 전부터 딸애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거예요. 원래 밝고 명랑한
아이였거든요. 안 되겠다 싶어 딸애에게 이유를 캐물었더니 주저하다가
는 엄마인 제가 죽는 꿈을 자주 꾼다고 하는 거예요. 어이가 없더라구요.
한데 아이는 아닌 거예요. 어찌나 진지하고 슬픈 표정을 하고 있는지,
남이 보면 엄마인 제가 죽은 걸로 착각할 정도지 뭐예요. 다른 건 다
그만두고 딸아이를 위해서라도 검사를 받아봐야겠다는 결심을 하지 않
을 수 없었어요. 그랬던 건데…….”
여자 환자는 그 대목에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내게 눈물을
보였다. 동영상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
에 내보내도 손색을 없을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고. 해서
나는 지금 글로나마 기록을 남기고자 어쭙잖은 손놀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여자 환자는 두 차례 더 병원을 방문했다. 0기암이라고
는 하지만 다른 부위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추가적인 검
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여자 환자에게 넌지시 물었다.
혹시 따님이 지금도 엄마가 죽는 꿈을 꾸느냐고. 다행히 꾸지 않는다
고 했다. 그제야 나는 안심이 되었다. CT나 혈액검사보다 환자의 딸
이 꾸는 꿈에 더 위안과 확신을 얻는 것이라니, 혹여 이런 내 마음을
동료의사들이 훔쳐보면 뭐라 할지 두렵다. 하지만 어쩌랴, 그게 사실
인 걸.
갑작스레 몰아닥친 한파로 세상이 얼어붙은 듯하다. 진료실 구석에
놓여있는 라디에이터는 요란한 소리만 낼 뿐 주변에 온기를 전해주지는
못하고 있다. 그런 라디에이터가 나를 닮았다는 생각에 더없이 측은하
게만 느껴진다. 창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한기가 제법 매섭다. 나는 의사
가운을 외투마냥 걸쳐 입은 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자판을 두드린다.
그러다가는 의자에 몸을 묻고 잠깐 잠깐 공상에 젖는다. 나도 꾸고 싶다,
그런 꿈을. 내 꿈으로 인해 누군가가 생명을 얻는 그런 꿈을.
남호탁 ------------------------------------------------------
의학박사.
일반외과 전문의 예일병원 원장.
저서 : ≪대장항문병의 이해≫, ≪똥꼬의사≫, ≪똥꼬이야기≫,
≪수면내시경과 붕어빵≫,≪똥은 기똥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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