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 비평에 수록된 권중대님의 '각하라 불린 사람'을 소개합니다. 왜 각하라고 불리었을까요 ??
각하라 불린 사람
물맛 같기도 하고 무 맛 같기도 한 인연은, 어느 책에서 내 글을 보았
다는 메일을 어떤 아줌마로부터 받으면서 시작됐다.
그 아줌마는 한마디로 조용하고 영혼이 깨끗한 사람이었다. 그의 말
에 의하면 직장에 다니면서도 여러 가지 김치를 잘 담그고 식혜를 잘
만드는 요즘에는 보기 드문 토종 주부였다. 또 그 아줌마는 강한 사람에
게 약하고 약한 사람에게 강한 사람을 몹시 싫어한다는 정의감이 넘치
는 사람이기도 했다.
집에 나 혼자 있다고 했을 때는 식사 잘하고 이불 잘 덮고 자라는 메일
을 보내준 일이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 있다. 식사는 몰라도 이불 이야
기까지 할 수 있는 것은 평소의 마음씀씀이가 짐작되어 정이 많은 사람
으로 느끼게 했다.
……
대통령. 대통령이라!
왜 나는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그 룸에 들어선 순간 그런 단어가 떠
올랐을까요?
좀 더 자세히 표현하자면 <피아노 치는 대통령>이란 영화에서 안성
기 씨를요.
어떻든 대통령입니다요.
대통령.
저도 의아했습니다.
지금도요. 왜 그렇게 느꼈을까 하고요.
결론은 복합성입니다.
내 생각보다 멋있으셨어요, 양복이 잘 어울리시더군요.
그리고 젊어 보이셨구요. 키도 크시고.
무엇보다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선입견을 제가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
그 아줌마를 알게 된 10여 년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인 단 5분도 안
되는 유일한 만남 후에 그 아줌마가 보낸 메일이다. 이렇게 나를 대통령
이라고 했고 그 뒤부터는 종종 각하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것은 너무
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아줌마는 영락없이 호기심 많은 소녀처럼 별별 것을 다 물어 보았고
자기 생일날 축하 메시지를 보내지 않으면 대단히 서운해 했다. 분명히
실례가 되는 물음이었지만 나는 웃음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선생님!”이라는 글머리로 시작되는 호칭이, 또 글 마지막에 빠지지 않고
쓰이는 “안녕”이라는 말이 너무 부드럽고 천진스럽게 들렸기 때문이다.
사랑한 이야기를 하랍니다.
무구하고 나 어린 소녀라
무슨 원이 행여 죄되리까만
사랑한 이야기야 허구한 날
사무쳐도 못내 말하고
죽을 때나 가만가만 뇌어 볼 이름임을
소녀는 아직 어려 세상도 몰라
사랑한 이야기를 하랍니다.
기막힌 이야기를 하랍니다.
이런 김남조의 시를 연상하면서 나 역시 무슨 원이 행여 죄가 될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또 있다.
달 밝은 밤에 그대는 누구를 생각하세요.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 꾸시나요
깊은 밤에 홀로 깨어 눈물 흘린 적 없나요
때로는 일기장에 내 얘기도 쓰시나요
그대 생각하다 보면 모든 게 궁금해요
이런 이선희의 노래가 생각나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고, 순진한 사람은
누구나 아무것도 아닌 것이 그렇게 궁금한 모양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제 그 아줌마의 메일은 더 이상 오지 않는다.
“가을이 슬픈 것은 우리 곁을 떠나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의 글 <낙엽이 하는 말>에 쓰인 구절이다. 그런데 갑자기
가을보다, 떠난 흔적만 남은 겨울이 더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에 우체국 직원 하나가 고향으로 발령이 났다고 의례적인 인
사를 왔었다. 정말, 나하고는 거의 친분이 없는 사람이지만 혼자 살면서
저녁때가 되면 주변을 배회하며 외로워하던 그 딱한 모습도 다시는 볼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한 뒤부터 그런 생각이 깊어진 것 같다. 그러나 인생
이라는 것이 모두 지나가버리기만 한다면 얼마나 허망하겠는가. 아쉬울
망정 지난날의 흔적이 남기에 삶은 그만큼 풍요로운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그 아줌마와 나와의 인연은 더욱 그렇다. 서로가 아무 사이
도 아닌 관계라는 말을 여러 번 주고받아도 조금도 서운함이 없던 처지
였지만 짧지 않은 시간에 메일을 통한 많은 대화를 한 사이가 아니던가.
접촉하는 두 개체는 서로 흔적을 주고받는다고 했다. 그러니 서운한 마
음이 조금도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선생님이 그 자리에 있다면 나도 그 자리에 있을 것입니다.”라고 아
줌마가 보냈던 메일이 생각난다. 오래전에 내가 어떤 사정으로 메일을
중단한다고 했을 때, 이유를 말하라고 당당하게 말하던 아줌마였다.
물론 내가 모를 뿐 아줌마가 메일을 중단한 이유는 있을 것이다. 정말
내 사정은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아줌마의 표현대로 메일을 많이 ‘떼먹
은’ 것이 성의 없는 모습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절대 소홀한 것은 아니
었지만 미안한 마음은 많았다. 지금도 그런 나의 사정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어서 그 이상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일이 다 답하지는 못했
지만 그렇게 우아하고 유머 넘치게 대꾸해 줄 사람이 과연 있겠느냐는
것이다. 사실 그렇다. 무슨 말이라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상대가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있다.
오랫동안 임금 역을 맡은 어떤 탤런트가 일상생활도 극중 인물처럼
되어간다는 말을 한 일이 있다. 어디서나 거드름이 피워지고 심지어 화
장실에 가서도 폼이 잡혀지더라는 얘기였다. 그렇다. 나도 그 소녀 같은
아줌마 앞에서는 그 아줌마를 실망시키지 않는 좋은 선생님이 되어야
했고 계속 멋있는 대통령으로 남고 싶었던 것이 사실이다. 영혼이 깨끗
한 소녀 같다고 느낄 때마다 조그만 상처도 주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에
더 조심스러워지기도 했다. 이런 나의 행동이 이것도 저것도 아니게 어
색해 보일 수도 있었겠다.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이 켜 놓은 아주 작은 인연의 호롱불이 꺼지지
않게 함은 물론, 더 커지지도 않게, 또 그을음이 나지 않으면서 빛나도록
강약 완급을 조절해야 하는 의무가 나에게 있다고 생각했었다.
우리는 자주 말했다.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닌 관계라고…….
그러나 아무 맛도 아닌 것 같은 물맛, 무 맛은 물과 무우가 아니면
낼 수 없는 시원하고 개운한 독특한 맛을 가진 것이다.
우리가 바로 그랬다고 생각한다. 요즘 같은 세상에 있을 수도 없고
누구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관계였다. 또, 그 맛을 변질시키지 않고
유지하기에는 남모르는 노력이 필요했던 긴 시간이었다.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나 아닌 누가 이런 일을 표 나지 않게 할 수 있으랴!”
그러니까 대통령이지.
권중대 ----------------------------------------------
1996년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사람 그리운 날에≫, ≪행복한 착각≫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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