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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2012년 봄호, 다시 읽는 좋은수필] 뒷모습 - 김태길

신아미디어 2012. 3. 6. 12:00

좋은수필 2012년 봄호에서 해학과 풍자가 가득한 다시 읽는 좋은 수필을 소개합니다.

 

뒷모습

   “너는 숫기가 없어서 탈이다.”
   이런 말을 자주 들으며 자랐다. 사내자식이 숫기가 없으니 아무
짝에도 못쓰겠다고 아버지는 걱정을 하셨다.‘ 숫기’가 무엇인지 잘
은 몰랐지만, 좌우간 남자에게 필요한 것인데, 그것이 나에게 없는
모양이었다.
   남의 시선을 정면에서 마주친다는 것은 늘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
이었다. 남자의 시선보다도 여자의 시선이 더욱 부담스러웠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감당하기 힘든 것은 예쁘고 동백기름 냄새 그윽한
누나들의 시선이었다. 무섭지는 않은데 공연히 고개를 들고 마주보
기가 어려웠다.
   남의 얼굴을 정면에서 바라보지 못하는 한심한 버릇은 나이가 든
뒤에도 고쳐지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이 버릇으로
말미암아 나는 본의 아닌 오해를 자주 받았다. 일단 인사를 한 사람
은 다음에 만났을 때 척 알아보아야 예절에 맞을 것인데, 나는 그것
이 잘 안 되기 때문에 교만한 자라는 오해를 받기 쉬웠던 것이다.
   사람을 대하면 늘 고개를 숙이는 버릇이 있으므로, 내 시선은 자연
히 상대편의 하의나 신발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같은 사람이 항상
같은 옷과 같은 신을 사용한다면 문제가 없겠으나, 놀라운 경제 성
장 덕분에 매일같이 갈아입고 갈아 신는 것이 요즈음의 풍속이다.
그러므로 나는 매일 딴사람을 만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숫기가 넘쳐흘러서 남의 얼굴을 뜯어보기에 아무런 주저도 느끼
지 않는 어떤 친구의 솔직한 고백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아름다운
여인들의 매혹적인 모습을 감상하는 취미를 갖게 되었고, 그 취미
덕분에 적지 않은 위안을 느끼며 세상을 살고 있노라고 넉살을 떨
었던 것이다.
   어떠한 자연보다도 아름답고 누구의 예술품보다도 뛰어난 여자
의 자태를 황홀히 바라보는 순간, 속세의 시름을 잊고 삶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고 그는 말하였다. 뿐만 아니라, 여자
에게는 깡패가 없으므로 “왜 쳐다보느냐?”며 시비를 걸어올 염려도
없으며, 대개 숙녀들은 본 척 만 척 외면하는 남정네에 대해서 은근
히 분노를 느끼는 법이라고 덧붙이기도 하였다.
   그 친구가 그의 은밀한 취미를 나에게 귀띔해 준 것은 세상을 무
미건조하게 살아가는 나에 대한 뜨거운 우정의 표시였다. 그의 낭
만적인 취미를 나도 본받으라는 충고의 뜻을 담았던 것이다. 그러
나 나로서는 도저히 실천에 옮길 수 없는 충고였다. 남의 얼굴을 감
상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예절에 맞느냐 하는 도학자적 문제
를 떠나서, 내 숫기 가지고는 감불생심 그럴 수가 없었으니, 모처럼
우정어린 그의 충고도 나에게는 한갓 탁상공론일 수밖에 없었다.
   그 친구의 충고가 있은 뒤에 나에게는 엉뚱한 버릇이 하나 생겼
다. 길을 걸으며 여자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버릇이다. 그 친구의
말대로 여자의 얼굴을 정면에서 바라볼 용기가 없으므로, 나도 모
르는 사이에 여자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버릇이 생긴 것이라고 단정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어쨌든 별로 고상하지 못한 버릇 하나가 생
긴 것은 사실이다.
   약간 비굴하다는 자책감이 따르기는 했으나, 뒤통수를 바라보는
것이 유리한 점도 있었다. 첫째로 앞 얼굴 미인은 그리 흔하지 않지
만, 뒤통수 미인은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근래에 발달한 머리 미용
술 덕분이기는 하겠지만, 뒷모습이 보기 싫은 여자는 그리 흔하지
않다. 둘째로, 노상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앞모습은 잠깐 스쳐가
게 마련이므로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포착할 시간을 갖기 어렵다.
그러나 뒷모습의 경우에는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므로, 느긋하
게 포착할 시간의 여유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마魔가 끼여들었다. 시쳇말로 ‘유니섹스’라던가
뭐 해괴한 풍조가 생겨서 뒤통수만 보고는 남녀를 구별하기가 어려
웠던 것이다. 뒤통수를 믿을 수 없게 되자 관찰의 시선은 자연히 아
래로 내려가게 되었다. 시선의 높이를 낮춘 뒤에 내가 발견한 실상
實相은 간단명료하다. 다리로 걷는 것은 남자임에 틀림이 없고, 엉덩
이로 걷는 것은 여자임에 틀림이 없다는 공통성을 찾아낸 것이다.
   남자는 제아무리 애를 써도 여자들처럼 그렇게 멋있고 볼품 있는
걸음을 걸을 재간이 없다. 남자에게는 볼기와 궁둥이가 있을 뿐 엉
덩이다운 엉덩이는 없는 까닭에, 여자의 우아한 걸음걸이를 모방하
고자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다 하더라도 헛수고에 그치고 만다. 그
러나 여자의 경우는 별다른 교육 과정을 밟지 않더라도 저 원圓에
서 원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보행법을 쉽게 익힐 수 있다.
   그 원이 움직이는 모습은 철 따라 유행 따라 바뀌는 옷과 신의 종
류를 따라 각양각색이다. 걸음걸이는 매양 같으나 옷과 신에 따라
서 그 효과가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인지, 옷과 신에 따라서 보행법
에도 약간의 변화를 가하는 것인지, 감히 물어 볼 숫기가 나에게는
없다.
   오늘 우연히 나는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무심
코 시선이 갔고, 다음에는 잠시 눈여겨보았다. 생각 탓일까, 희끗
희끗한 뒷모습이 그지없이 쓸쓸하다. 처음 맞선을 모았을 때 열아
홉 살 처녀의 뒷머리는 두 갈래로 나누어져 고무줄로 묶여 있었다.
그 뒤로 어언 38년, 변모한 뒷모습에 흘러간 세월의 그림자가 어른
거린다.
   아내보다도 더 늙었을 나 자신의 뒷모습을 내 눈으로 볼 수 없음
을 다행으로 여길 것인가. 나와는 상관없는 젊은 여인들의 뒷모습
을 가지고 어릿광대 같은 농담을 늘어놓을 때가 아니다. 시간이 무

료하기에 허튼소리라도 적어서 잠시 웃어 보려 한 것인데, 상념이
엉뚱한 곳으로 흐르고 말았다.


김태길(金泰吉, 1920년 ~ 2009년).----------------------------------

충청북도 충주 출생. 수필가·철학자. 호는 우송(牛松).

1961년 처녀 수필집《웃는 갈대》를 발간, 이어《빛이 그리운 생각들》(65),

《 검은 마음 흰 마음》(68), 장편수필《흐르지 않는 세월歲月》(73)을 내놓았다.

이밖의 저서로《한국인과 문학사상文學思想》(共著)이 있다. 주목받은 논문으로

《이조소설李朝小說에 나타난 한국인의 가치관價値觀연구》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