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학과 풍자가 가득한 다시 읽는 좋은 수필이 『좋은 수필』에 수록되어 소개합니다.
지뢰밭
터질듯이 부푼 홍시 앞에 멈춘다. 가게를 그냥 지나칠 수 없
다. 어느 시인이 그 안에 해님이 들어 있다고 한 다음부턴 감이 더
욱 좋다. 생전의 아버지가 즐기시던 과일, 마지막까지 아버지의 혀
돌기를 즐겁게 해주었던 효성스런 열매.
우리 집 몫에다 한 바구니를 더 얹어 산다. 친구에게 주려는 것이
다. 친정식구와 위아래 층을 나누어 한 집에 사는 그 친구와 그녀의
아버님도 필시 감을 좋아하실 것이다.
지장地藏보살은 남에게 나눠주는 걸 하도 좋아해서 나중엔 속옷
까지 벗어주고는 부끄러워 땅속에 몸을 숨겼다는데 그 정도는 아니
지만 자꾸 무언가 주고 싶은 친구가 있다. 어쩌면 내가 받는 게 더
많기 때문인지 모른다. 고교동창인 그녀와는 30년 지기이다.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한 것이 없이 내가 노상 출렁이는 파도같이 요
동친다면 그녀는 수호바위처럼 묵묵하다. 사람 많은 곳에 가면 해
파리마냥 더욱 부산해지는 나와는 대조적으로 그녀는 따개비라도
되는 듯 바위에 들러붙어 누구와도 어울리질 않는다. 달라도 아주
많이 다르다는 점 때문에 우리는 서로에게 더욱 끌리는 것 같다.
아버지가 국어 교사였던 그녀는 어릴 때부터 한국소설을 많이 읽
느라 인생을 망쳤다고 주장한다. 감자 한 소쿠리를 얻기 위해 몸을
주는 여자에게서 삶이 너무 우중충하게 느껴졌단다. 반대로 나는
영문학을 번역하던 아버지 덕에 조숙하게 세계문학을 읽고 인생을
망쳤다고 말한다. 파티석상에서 손수건을 떨어뜨리는 신호로 밀애
를 즐기는 백작부인들이 내게 너무 큰 환상을 심어준 탓이다. 서로
자기 인생이 더 많이 망가졌다고 우기다 보면 결국 우리는 같은 말
을 하고 있다. 인생이란 원래 망치기 마련이라고…….
함께 문학수업을 받게 된 건 우연이자 행운이다. 아마 조상의 은
덕이 작용했으리라고 믿는다. 그런 조상의 은덕처럼 눈에 보이지
않게 날 도와주고 조종하는 기운을 바로 그녀가 갖고 있다. 내가 첫
수필집을 발간할 때도 그녀는 따뜻한 교정을 봐주었을 뿐 아니라
언제나 신명나도록 박수를 쳐주었다. 아무리 실없는 소리를 해도
더욱 실없는 소리로 맞장구를 치는 그녀이기에 우리 사이엔 못할
소리가 없다. 그런 친구에게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는 일이 생겼다.
보란 듯이 백일장에 입상하여 수필가로 등단한 그녀는 좀처럼 글
을 쓸 생각을 하지 않더니 이윽고 작품 하나를 내밀었다.
수년 전부터 혼자 아이들을 키우는 자신에게 남자를 만나보라고
친구가 권했는데 그게 유부남이라서 당황했다는 내용이었다. 유부
남을 사귀는 것은 일본의‘기미가요’를 부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는 비유를 들어 우회적으로 나를 비난했다.
글을 읽고는 일순간 그녀에게 미안했다. 막역한 사이라 여과 없
이 말한 탓에 친구에게 상처를 준 것 같았다. 내게 지적인 여성 하
나만 소개시켜 달라고 집요하게 졸라댄 그 유부남이 미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황금빛 감이 검게 변하듯 노란 해님이 때
마다 붉게 물들듯 내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자꾸 나를 변호하
고 싶어졌다. 나는 단지 소통하는 삶을 권했을 뿐인데 그게 섭섭
하다니.
밀폐된 방에 갇힌 듯 갑갑해 보이는 그녀에게 창문을 한번 열어
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면 아침마다 까치가 들여다봐주고 바람
이 안부를 전할 거라고…….
그건 내가 만남에 대해 지대한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에 나온 말
이다. 마치 지뢰밭을 걷다가 폭탄이 터지듯이 어느 순간 예쁜 사랑
이 다가와 나를 폭파시킬 때의 기쁨을 그녀에게 꼭 알려주고 싶었
다. 체온이 3도쯤 상승한 듯 달뜨고, 맥박이 1분에 10회쯤 올라 숨
가쁘고, 혈압도 20~30 높아져 발그레한 상태. 그가 산다는 이유만
으로 그의 마을, 그의 도시, 그의 나라, 결국 온 지구까지 죄다 사랑
하다가 우주의 주인공인 나를 더욱 중요시하게 되는 그런 감정을
말이다.
그녀는 유부남을 만나면 가정파괴범이 되기 십상이란 위험론을
펼쳤다. 하긴 세상엔 그런 일이 흔하니까 소심하고 단정한 그녀다
운 우려이다. 하지만 내가 말한 건 남자와 여자가 만나 서로의 뇌세
포를 비빌 때 얻어지는 빛나는 절정감인데 그녀는 말초신경을 먼저
비벼서 사회의 질서와 윤리를 뭉개는 걸 떠올렸나 보다.
최근에 읽은 파올로 코엘료의 소설 중에는 세상에 금지된 건 단
두 가지뿐이란 얘기가 나온다. 하나는 절대 누군가에게 성관계를
강요하지 말 것, 그리고 절대 어린아이와 관계를 갖지 말 것. 그 외
엔 무어든 허용된다는 코엘료는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해보고 꼭 끝
까지 가보라는 걸 강조하는 작가이다. 하긴 간통죄 같은 건 우리나
라에만 있다고 하니까.
하지만 나는 결코 코엘료에게 동조하고 싶지 않다.
그보다 “모든 고귀한 것은 무릇 어렵고도 드물다.”란 멋진 말로
《에티카》의 마지막장을 장식한 스피노자가 더 좋다. “너를 사랑한
다.”는 말은 “너로 인해 내가 더 완벽해진다.” 또는 “너는 나를 기쁘
게 한다.”와 같다고 설명한 그 철학자는 진정한 사랑과 소유욕은 별
개의 것이라 알려준다. 대개의 인간은 상대를 욕망의 대상으로 보
는 견해에서 벗어나지 못하므로 불행한 것이라고……. 사랑을 소유
와 이기적인 쾌락이 아닌 자유와 행복의 가능성으로 정의한 그의
이론이 바로 내가 추구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기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스피노자의 시선으로 보면 만남에는 결코 그 친구가 생각하는 위
험의 요소가 들어 있지 않다. 내 어찌하면 호두껍데기 안에 들어앉
은 그녀에게 사랑의 지뢰밭을 걷는 기쁨을 알려줄 수 있을까? 세상
의 온갖 꽃들이 가슴에 가득 차 더 이상 계절을 느낄 수 없고, 세상
의 모든 별들이 두 눈에 들어와 밤과 낮을 구분 못 하는 그런 황홀
경을 너도 한 번쯤 느껴보면 안 되겠니?
황진이처럼 둥근 그녀의 얼굴 속에 숨겨진 뭉근한 고집스러움을
훔쳐보다 지레 포기한 나는 혼자 뇌까린다.
‘남자? 흥! 유부남이고 무부남이고 이제 네겐 국물도 없다.’
김애양 --------------------------------------------------
(1959년 서울 출생. 은혜산부인과 원장. 1998년 <책과 인생>으로 등단.
제4회 남촌문학상 수상. 저서로《초대》,《의사로 산다는 것》,《위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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