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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2012년 봄호, 다시 읽는 좋은 수필] 조침문 - 유씨부인

신아미디어 2012. 3. 13. 09:25

바늘을 의인화하여 제문형식으로 쓴 유씨부인의 '조침문' 을 다시 읽는 좋은 수필로 선정하여 수록해봅니다.

 

조침문 弔針文

   유세차維歲次 모년某年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미망인未亡人 모
씨某氏는 두어 자 글로써 침자針者에게 고告하노니, 인간 부녀人間婦
女의 손 가운데 종요로운 것이 바늘이로대, 세상 사람이 귀히 아니
여기는 것은 도처到處에 흔한 바이로다. 이 바늘은 한낱 작은 물건物
件이나, 이렇듯이 슬퍼함은 나의 정회情懷가 남과 다름이라. 오호
통재嗚呼痛哉라, 아깝고 불쌍하다. 너를 얻어 손 가운데 지닌 지 우
금于今 이십칠 년이라. 어이 인정人情이 그렇지 아니하리오. 슬프다.
눈물을 잠깐 거두고 심신心身을 겨우 진정鎭定하여, 너의 행장行狀과
나의 회포懷抱를 총총히 적어 영결永訣하노라.
   연전年前에 우리 시삼촌媤三村께옵서 동지상사冬至上使 낙점落點을
무르와, 북경北京에 다녀오신 후에, 바늘 여러 쌈을 주시거늘, 친정
親庭과 원근 일가遠近一家에게 보내고, 비복婢僕들도 쌈쌈이 나눠주
고, 그 중에 너를 택擇하여 손에 익히고 익히어 지금까지 해포되었
더니, 슬프다, 연분緣分이 비상非常하여, 너희를 무수無數히 잃고 부
러뜨렸으되, 오직 너 하나를 연구年久히 보전保全하니, 비록 무심無
心한 물건物件이나 어찌 사랑스럽고 미혹迷惑지 아니하리오. 아깝고
불쌍하며, 또한 섭섭하도다.
   나의 신세身世박 명薄命하여 슬하膝下에 한 자녀子女없고, 인명人命
이 흉완凶頑하여 일찍 죽지 못하고, 가산家産이 빈궁貧窮하여 침선針
線에 마음을 붙여, 널로 하여 생애生涯를 도움이 적지 아니하더니,
오늘날 너를 영결永訣하니, 오호 통재嗚呼痛哉라, 이는 귀신鬼神이 시
기猜忌하고 하늘이 미워하심이로다.
   아깝다 바늘이여, 어여쁘다 바늘이여, 너는 미묘微妙한 품질品質
과 특별特別한 재치才致를 가졌으니, 물중物中의 명물名物이요, 철중
鐵中의 쟁쟁錚錚이라. 민첩敏捷하고 날래기는 백대百代의 협객俠客이
요, 굳세고 곧기는 만고萬古의 충절忠節이라. 추호秋毫같은 부리는
말하는 듯하고, 두렷한 귀는 소리를 듣는 듯한지라. 능라綾羅와 비
단緋緞에 난봉鸞鳳과 공작孔雀을 수놓을 제, 그 민첩하고 신기神奇함
은 귀신鬼神이 돕는 듯하니, 어찌 인력人力이 미칠 바리오.
   오호 통재嗚呼痛哉라, 자식子息이 귀貴하나 손에서 놓일 때도 있고,
비복婢僕이 순順하나 명命을 거스를 때 있나니, 너의 미묘微妙한 재
질才質이 나의 전후前後에 수응酬應함을 생각하면, 자식에게 지나고
비복婢僕에게 지나는지라. 천은天銀으로 집을 하고, 오색五色으로 파
란을 놓아 곁고름에 채였으니, 부녀婦女의 노리개라. 밥 먹을 적 만
져 보고 잠잘 적 만져 보아, 널로 더불어 벗이 되어, 여름 낮에 주렴
珠簾이며, 겨울밤에 등잔燈盞을 상대相對하여, 누비며, 호며, 감치며,
박으며, 공그릴 때에, 겹실을 꿰었으니 봉미鳳尾를 두르는 듯, 땀땀
이 떠 갈 적에, 수미首尾가 상응相應하고, 솔솔이 붙여내매 조화造化
가 무궁無窮하다. 이생에 백 년 동거百年同居하렸더니, 오호 애재嗚呼
哀哉라, 바늘이여.
   금년 시월 초십일 술시戌時에, 희미한 등잔 아래서 관대冠帶깃을
달다가, 무심중간無心中間에 자끈동 부러지니 깜짝 놀라와라. 아야
아야 바늘이여, 두 동강이 났구나. 정신精神이 아득하고 혼백魂魄이
산란散亂하여, 마음을 빻아내는 듯, 두골頭骨을 깨쳐내는 듯, 이윽도
록 기색 혼절氣塞昏絶하였다가 겨우 정신을 차려, 만져 보고 이어 본
들 속절없고 하릴없다. 편작扁鵲의 신술神術로도 장생불사長生不死
못하였네. 동네 장인匠人에게 때이련들 어찌 능히 때일쏜가. 한 팔
을 베어낸 듯, 한 다리를 베어낸 듯, 아깝다 바늘이여, 옷섶을 만져
보니, 꽂혔던 자리 없네. 오호 통재嗚呼痛哉라, 내 삼가지 못한 탓이
로다.
   무죄無罪한 너를 마치니, 백인伯仁이 유아이사由我而死라, 뉘를 한
恨하며 뉘를 원怨하리오. 능란能爛한 성품性品과 공교工巧한 재질을
나의 힘으로 어찌 다시 바라리오. 절묘絶妙한 의형儀形은 눈 속에 삼
삼하고, 특별한 품재稟才는 심회心懷가 삭막索莫하다. 네 비록 물건物
件이나 무심無心하지 아니하면, 후세後世에 다시 만나 평생 동거지정
平生同居之情을 다시 이어, 백 년 고락百年苦樂과 일시 생사一時生死를
한가지로 하기를 바라노라. 오호 애재嗚呼哀哉라, 바늘이여.


─ 참고 : 조선 순조(純祖: 1800~34) 연간에 유씨兪氏부인이 지은 수필. 국문
체. <제침문祭針文>이라고도 한다. 바늘을 의인화擬人化하여 제문祭文형
식으로 쓴 글이다.


─ 어구풀이 :
*유세차 : 해의 차례는. 제문祭文의 첫머리에 쓰는 상투어.
*종요로운 : 매우 긴요한.
*침자 : 바늘.
*정회 : 생각하는 마음. 또는 정과 회포를 아울러 이르는 말.
*오호嗚呼: 아아.
*통재라 : 슬프고 원통하도다!
*우금: 지금까지.
*행장 : ① 몸가짐과 품행을 통틀어 이르는 말. ② 죽은 사람이 평생 살아온 일
을 적은 글.
*회포 : 마음속에 품은 생각이나 정.
*총총 : 간략하게.
*영결 :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서로 영원히 헤어짐.
*낙점 : 조선시대에, 이품 이상의 벼슬아치를 뽑을 때 임금이 이조에서 추천된
           세 후보자 가운데 마땅한 사람의 이름 위에 점을 찍던 일. 여러 후보가
           있을 때 그 중에 마땅한 대상을 고름.
*동지상사 : 해마다 동짓달에 중국으로 보내던 사신의 우두머리.
*쌈 : 바늘 24개를 묶는 단위.
*미혹 : 무엇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함.
*슬하 : 무릎의 아래라는 뜻으로, 어버이나 조부모의 보살핌 아래. 주로 부모의
           보호를 받는 테두리 안을 이른다.
*흉안 : 모질게 질김.
*두렷한 : 둥근.
*쟁쟁 : 가장 뛰어난.
*누비며 : 두 겹의 천 사이에 솜을 넣고 줄이 죽죽 지게 박으며.
*호며 : 헝겊을 겹쳐 바늘땀을 성기게 꿰매다.
*감치며 : 바느질감의 가장자리나 솔기를 실올이 풀리지 않게 용수철이 감긴

              모양으로 감아 꿰매다.
*박으며 : 실을 곱걸어서 꿰매다.
*공글며 : 기본형은‘공그르다’로 헝겊의 시접을 접어 맞대어 바늘을 양쪽의

             접힌 시접 속으로 번갈아 넣어 가며 실 땀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속
            으로 떠서 꿰매다.
*기색혼절 : 기가 막히고 혼이 나감.
*편작 : 중국의 신화적인 의사.
*섶 : 저고리나 두루마기 따위의 깃 아래쪽에 달린 길쭉한 헝겊.
*백인유아이사 :‘ 백인’이란 사람이 나로 인하여 죽음.
*삼삼하다 : 기억이 또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