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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2012년 봄호, 다시 읽는 좋은 수필] 공지에서 - 이상

신아미디어 2012. 3. 16. 12:38

매일신보(1936. 3. 3.~26.)에 <조춘점묘早春點描>라는 표제 아래 연재했

'이상'님의 7편 수필 중의 한 작품을 소개합니다.

 

공지空地에서

   얼음이 아직 풀리기 전 어느 날 덕수궁德壽宮마당에 혼자 서 있
었다. 마른 잔디 위에 날이 따뜻하면 여기저기 쌍쌍이 벌려놓일 사
람더미가 이날은 그림자도 안 보인다. 이렇게 넓은 마당을 텅 이렇
게 비워 두는 뜻이 알 길 없다. 땅이 심심할 것 같다. 땅도 이제는
초목이 우거지고 기암괴석奇巖怪石이 배치되는 데만 만족해하지는
않을 게다. 차라리 초목이 없고 괴석이 없더라도 집이 서고 집 속에
사람들이 북적북적하고 또 집과 집 사이에 참 아끼고 아껴서 남겨
놓은 가늘고 길고 요리 휘고 조리 휘인 얼마간의 지면地面─즉 길에
는 늘 구두 신은 남녀가 뚜걱뚜걱 오고 가고 여러 가지 차량들이 굴
러가고 하기를 희망할 것이다. 이렇게 땅의 성격도 기호도 변하였
을 것이다.
   그래 이건 아마 겨울 동안에는 인마人馬의 통행을 격별格別한 땅
이나 아닌가 하고 대단히 겸연쩍어서 부리나케 대한문大漢文으로
내달으려니까 하늘에 소리 있으니 사람의 소리로다─ 그러나 역시
잔디밭 위에는 아무도 없고 지난 가을에 헤뜨리고 간 캐러멜 싸개
가 바람에 이리 날고 저리 날고 할 뿐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반드시 덕수궁에 적籍을 둔 금리金鯉(금잉어-편
집자 주) 떼나 놀아야 할 연못 속에 겨울 차림을 한 남녀가 무수히
헤어져 놀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하나도 육지에 올라선 이가 없
이 말짱 그 손바닥만 한 연못에 들어서서는 스마트한 스케이팅을
즐기는 것이 아닌가.
   요컨대 새로 발견된 공지로군─하고 경이의 눈을 옮길 길이 없어
가까이 다가가서는 그 새로 점령된 미끈미끈한 공지를 조심성스러
히 좀 들여다보았다. 그러니 금리어들은 다 어디로 쫓겨갔을까? 어
족은 냉혈동물이니 물이 얼어도 밑바닥까지만 얼지 않으면 그 얼음
짱 밑 냉수 속에서 족히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 예리
한 스케이트 날로 너무 걸커미어 놓아서 얼음은 영 불투명하다. 투
명만 하면 불그스레한 금리어 꽁지가 더러 들여다보이기도 하련만
─여하간 이 손바닥만 한 연못이 깊으면 얼마나 깊을까─바탕까지
다 꽝꽝 얼었다면 어족은 일거一擧에 몰사沒死하였을 것이고 얼음짱
밑에 물이 흐르고 있다면 이 까닭 모를 소요에 얼마나 어족들이 골
치를 앓을까? 이 신기한 공지를 즐기기 위해서는 물론 그들은 어족
의 두통 같은 것은 가산加算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날 황혼 천하에 공지 없음을 한탄하며 뉘 집 이층에서 저물어
가는 도회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실로 덕수궁 연못 같은, 날만
따뜻해지면 제출몰에 해소될 엉성한 공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참
훌륭한 공지를 하나 발견하였다.
   XX보험회사 신축 용지라고 대서특필한 높다란 판장板墻으로 둘
러막은 목산目算천여 평 이상의 명실상부의 공지가 아닌가. 잡초가
우거졌다가 우거진 채 말라서 일면이 세피아 빛으로 덮인 실로 황
량한 공지인 것이다. 입추의 여지가 가히 없는 이 대도시 한복판에
이런 인외경人外境의 감感을 풍기는 적지 않은 공지가 있다는 것은
기적 아닐 수 없다.
   인마의 발자취가 끊인 지─아니 그건 또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
르지만─ 오랜 이 공지에는 강아지가 서너 마리 모여 석양의 그림
자를 끌고 희롱한다. 정말 공지─참말이지 이 세상에는 인제는 공
지라고는 없다. 아스팔트를 깐 뻔질한 길도 공지가 아니다. 질펀한
논밭, 임야, 석산, 다 아무개의 소유답이요, 아무개 소유의 산© (산
갓, 산림_편집자 주)이요, 아무개 소유의 광산인 것이다. 생각하면
들에 나는 풀 한 포기가 공지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이치대로 하
자면 우리는 소유자의 허락이 없이 일 보의 반보半步를 어찌 옮겨
놓으리오. 오늘 우리가 제법 교외로 산보도 할 수 있는 것은 아직도
세상 인심이 좋아서 모두들 묵허默許를 해 주니까 향유할 수 있는
사치다. 하나도 공지가 없는 이 세상에 어디로 갈까 하던 차에 이런
공지다운 공지를 발견하고 저기 가서 두 다리 쭉 뻗고 누워서 담배
나 한 대 피웠으면 하고 나서 또 생각해 보니까 이것도 역시 XX보
험회사가 이윤을 기다리고 있는 건조물인 것을 깨달았다. 다만 이
건조물은 콘크리트로 여러 층을 쌓아올린 것과 달라 잡초가 우거진
형태를 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봄이 왔다. 가난한 방 안에 왜꼬아리 분盆하나가 철을 찾아서 요
리조리 싹이 튼다. 그 닷곱 한 되도 안 되는 흙 위에다가 늘 잉크병
을 올려놓곤 하다가 싹트는 것을 보고 잉크병을 치우고 겨우내 그
대로 두었던 낙엽을 거두고 맑은 물을 한 주발 주었다. 그리고 천하
에 공지라곤 요 분 안에 놓인 땅 한 군데밖에는 없다고 좋아하였다.
그러나 두 다리를 뻗고 누워서 담배를 피우기에는 이 동글납작한
공지는 너무 좁다.

출전 : 매일신보(1936. 3. 3.~26.)에 <조춘점묘早春點描>라는 표제

아래 연재했던 7편 수필 중의 한 작품이다.

 


이상(李箱,1910~1937) ------------------------------------------

 시인·소설가. 본명은 김해경(金海卿).《날개》를 발표하여

큰 화제를 일으켰고 같은 해에《동해童骸》,《봉별기逢別記》등을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