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 2012년 봄호에서 해학과 풍자가 가득한 다시 읽는 좋은 수필을 소개합니다.
낮은목소리
어느 방송국 인터뷰에 나간 적이 있다. 인터뷰는 질색이다.
구변이 없기 때문. 텔레비전은 더욱 질색이다. 상판이 틀렸으니까.
그런데 어쩌다 감쪽같이 속아 <명사와의 대담>이란 라디오 프로
에 끌려 나간 적이 있다. 물론 그 명사라는 칭호에 끌린 것은 아니
다. 대담을 청하는 여자 아나운서의 곱고 낮은 목소리.
대담 중 음악을 곁들인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하이든의 <전시戰
時미사곡>을 청했다. 미사곡이 작곡된 사연을 말하면 웬만큼 시간
이 때워지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1809년의 비엔나.
하이든은 죽어 가고 있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전투는 치열했고, 끝내 나폴레옹은 비엔
나에 입성하고 말았다. 나폴레옹이 우선 한 일은 하이든 집에 보초
를 세우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그런 배우이기도 했던 것이다. 며
칠 후 하이든 앞에 프랑스 장교가 나타났다.
살아생전 존경하던 분, 하이든 앞에서 그 프랑스 장교는 하이든
곡 <천지 창조>에 나오는 아리아를 노래했다. 낮은 목소리, 눈물을
흘리면서─.
‘적과 나’가 없는 순간.
며칠 후 그 장교는 전사했다.
“왜 싸우는가, 무리들아!”
그 전사 소식을 듣자, 임종의 병상에서 일어난 하이든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전시 미사곡>을 작곡했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인터뷰를 청한 방송국에는 그 <전시 미사곡>이 없었
다. 난감, 화제가 없어진 것이다.
대신 바하의 칸타타가 흘러나왔다. 좋아하는 곡이다.
대학 거리에 있던 다방 마담은 내가 그 곡을 좋아하였기에 들어
설 때마다 늘 그 곡을 들려주었던 것이다. 알토보다 낮은 그 마담의
목소리가 어쩌면 그렇게도 매력적이었을까.
근 20년을 대학에서 지냈지만 이른바 ‘명강의’라는 걸 해본 적이
없다. 목소리가 낮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강의를 시작한 지 10분쯤 되면 뒷자리 학생들이 슬금슬금 뺑소니
를 치는 것이다. 몇 번인가 참았지만, 매번인지라 울화가 치밀었다.
“야, 이 친구들아! 왜 허락없이 내빼는 거야?”
“선생님 말씀이 들려야죠! 앉아 있으나마납니다.”
그 <명사와의 대담>을 듣고 있던 아내는 몇 번인가 아이들에게
“진짜 아버지야?”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그 여자 아나운서의 매혹
적인 낮은 목소리가 나에게 없는 구변을, 나에게 없는 화제를 끄집
어내게 하여 아내를 놀라게 했던 것이다.
실험적으로 입증된 것은 아니지만 지능과 목소리는 반비례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큰소리 치는 남자는 사기꾼이 될 소질이 있다.
큰소리 치는 여자는 소박데기가 될 소질이 있다.
“왜 소리치는가, 무리들아!”
이장규(李章圭) ---------------------------------------------
전 원자력병원장, 수필가. 수필집으로《눈사람》,《 속상한원숭이》,
《 낮은목소리》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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