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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 비평 2012년 2월호, 내게로 가는 여정] 도깨비를 손에 쥐고 - 김정화

신아미디어 2012. 3. 5. 06:30

 

도깨비를 손에 쥐고

 

   퉁방울눈을 부라린다. 주먹코를 씰룩거리니 함지박 같은 입속의 뻐드
러진 송곳니가 드러난다. 치켜진 수염이 당당하고 쩍 벌린 발끝에서조
차 기운이 솟는 듯하다. 요기를 뿜은 장비처럼 범접할 수 없는 기품이
실려 있지만 불룩한 젖가슴의 힘 준 꼭지에 눈길이 닿으면 누구든 엷은
웃음을 물게 된다. 도깨비무늬 벽돌이 익살스러운 매력을 풍긴다.
   부여 박물관에는 여덟 개의 무늬전돌이 전시되어 있다. 도깨비문양도
두 점 섞여 있는데 모두 사비시대 절터에서 옮겨온 것이다. 사각 모양의
네 귀퉁이마다 홈이 파인 것으로 보아 벽돌을 엮어 만든 장식품 걸개가
아닐까 추측된다. 그중 내 발길을 멈추게 한 것은 연대귀문전이라고 불
리는 연꽃도깨비무늬 벽돌이다. 풍만한 몸체를 떡하니 버티며 활짝 핀
연꽃 위에 발을 딛고 선 형상이 예사롭지 않다.
   옛사람들은 도깨비를 가까이 두었다. 장승은 물론 수막새와 서까래에
문양을 새기고 무기고의 문짝과 쌀통에 붙였으며 비석과 계단석에도 도
깨비를 앉혔다. 오늘날에는 도깨비 형상의 치우장수를 본뜬 응원 군단
까지 만들었다. 그러한 도깨비는 지붕에 걸터앉아 천하를 호령하고, 문
지기로서 집안과 마을의 삿됨을 물리치고 신성한 사찰을 보살폈다. 꺾
을 수 없는 위용으로 벽사僻邪 역할을 충실히 해온 셈이다.
   도깨비가 상서롭게만 표현된 것은 아니다. 두 눈 사이로 쇠못이 박히
고 소용돌이 수염도 깎인 채 지옥 옥졸이나 금강역사로 좌천되기도 했
다. 도깨비 형상을 바꾼 것은 사람 마음이 치졸한 탓이 아닐까. 자신에게
패악을 부리지 않아도 대중의 인기가 높아지면 슬며시 깎아내리는 게
인간이 가진 심술이라 여겨본다. 하지만 도깨비는 꿈쩍도 않는다. 날카
로운 이빨 사이로 익살스러운 웃음을 띨 뿐, 이매탈 같은 표정으로 이웃
들을 다독여오고 있다.
   그만큼 탄생설화도 순박하다. 사람들이 버린 몽당비나 도리깨와 절굿
공이에서 생겨나 뒷간이나 빈집같이 허름한 곳에 산다고 한다. 메밀묵
과 막걸리에 사족을 못 쓰고 노래와 춤을 즐기는 심성은 사람이나 다름
없다. 내 어린 시절에는 외다리 도깨비를 ‘한 다리 김 서방’이라고 불렀
다. 도깨비들은 우직하여 아는 성이라고는 김씨밖에 없다고 한다. 같은
성을 가진 나로서는 먼 친척 아재처럼 만만하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도깨비에게는 어리숙한 면이 더 많다. 수탉 울음이나 개암 깨무는 소
리에 화들짝 놀라 도망가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흉을 보거나 시기하
는 것을 싫어하고 빌린 것을 갚을 줄 안다. 잘 사귀면 신통력으로 금은보
화를 안겨주거나 기적 같은 도움을 주기도 한다. 장난이 심하고 씨름을
좋아하지만 꾀가 없어 번번이 지는데 낙담하지 않는 천성을 가졌다. 그
나마 희번득한 도깨비불을 켜고 제대로 간수도 못하는 방망이라도 지녔
기에 체면치레는 할 수 있다. 무엇보다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뻔뻔
한 악인을 호리거나 곯려주며 진실하지 않은 사람은 철저히 응징한다.
   이러한 도깨비는 팔도에 걸쳐있다. 아리랑처럼 유래도 많고 모습과
별칭도 다양하다. 그러나 백제 연꽃도깨비는 여느 도깨비와 확연히 다르
다. 볼수록 다이내믹한 캐릭터다. 시시각각 표정과 형상이 바뀐다. 금방
이라도 벽돌에서 뛰쳐나올 듯 생기가 넘쳐난다. 양어깨에 힘을 준 채 상
체를 기울인 모습에서는 무대 위 보디빌더나 다름없고 탄탄한 허리 근육
과 허벅지를 보면 천하장사 타이틀을 거머쥔 씨름선수 같아 보인다. 꼼
지락거리는 발가락의 율동에서는 K-pop을 부르는 아이돌 가수가 연상되
고 연꽃을 디디고 선 유연한 몸짓은 영락없는 근육질의 남성 무용수다.
어린아이들 눈에는 마징가제트나 태권브이 같은 로봇 장난감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짓궂으면서도 위엄 있고 험상궂다가도 싱겁고 우스꽝스럽
다. 인간이 나타낼 수 있는 모든 감정과 표정이 녹아있는 듯하다.
   천년의 미소가 벽돌 속에 담겨 있다. 도깨비에게 눈웃음을 지어 본다.
그도 따라 히죽이 입을 벌리더니 이내 커다란 젖퉁이를 들썩이며 호탕
하게 웃는다. 웃음으로 재앙을 달래고 웃음으로 화를 주춤거리게 하는
도깨비의 참모습을 보라는 몸짓이다. 도깨비의 기행奇行은 인간을 지키
고 복을 가져다주는 일인 것을. 진정한 도깨비놀음은 사람도 도깨비처
럼 덕행을 베풀 때가 아닐까.
   박물관 기념관에서 연대귀문전 열쇠고리를 하나 골랐다. 도깨비의 힘
으로 태평성대가 이루어지기를 염원한 백제인의 징표를 지니고 싶은 마
음에서다. 요즈음 나는 그 열쇠고리를 손바닥에 놓고 종종 들여다보는
데 묘한 일은 그때마다 도깨비의 표정이 다르다. 내 기분에 따라 울고
웃고 찡그린다. 그러니 이것이야말로 일면만상一面萬像의 귀불鬼佛이 아
닐까 여겨본다.
   낄. 낄. 낄……. 도깨비 웃음소리가 점점 더 커진다.

 

 

김정화 -------------------------------------------------------

2006년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새에게는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