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손님
오랜만에 잡은 운전대에 힘이 실린다. 벼르고 벼르던 겨울 바다를 보
러 떠났다. 나에게 여행은 특별한 일이다. 바쁜 일상에 쫓기다 보니 좀체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다. 아이들과 여행을 하지 못해 늘 마음에 걸리던
터라 열 일 제쳐놓고 무작정 떠났다. 기름을 가득 채우고 동해로 향했다.
새로 난 고속도로는 바다에 대한 기대로 설렘을 더해 주었다. 반야월
에서 장모님을 태우니 마음이 푸근하다. 장인어른의 갑작스러운 사고사
로 장모님은 상심이 많던 터였다. 나는 사위로서 그 고통을 같이 나누지
못해 늘 송구스러웠다. 장모님은 불편하신 몸으로 상추며, 배추며, 푸성
귀를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갖다 주신다. 칠십이 넘은 연세에도 출가한
딸에게 쏟는 사랑은 변함이 없다. 젊을 때 농사일을 많이 하신 탓에 몸도
성하지 않다. 그런데도 틈만 나면, 이웃 과수원에서 일을 거들어주고
과일과 채소를 얻어다 주신다. 세상에 어느 부모가 이렇게 지극정성으
로 자식에게 사랑을 쏟을까? 나는 그 사랑에 보답하지 못해 죄스러움을
느낀다.
동해안 국도는 생각보다 차가 많지 않았다. 바닷가 절벽 위, 휴게소
하나가 홀로 바람을 맞고 있었다. 커피자판기 앞에만 사람들이 옹기종
기 모여 있을 뿐 휴게소는 썰렁했다. 거센 바람이 수평선을 지워버려
어디가 바다 끝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파도는 하얀 거품을 쉴 새 없이
몰고 와 모래 속에 파묻어 버린다. 때 묻은 욕심과 구겨진 양심을, 장모
님을 잘 모시지 못한 죄책감도 말끔히 씻어줄 것 같다. 파도에 부서진
짠내가 내 몸도 절여주었으면 좋겠다.
가끔 지나가는 관광버스도 동해의 절경이 아쉬운지 속도를 줄인다.
군데군데 남은 군사용 철조망은 분단의 세월만큼이나 까만 녹이 묻어
있고 초소 지붕에는 갈매기가 날개를 말리고 있었다. 출근도 퇴근도 없
는 갈매기가 부럽다. 바다는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하고 힘
이 솟는다.
다시 북쪽으로 달렸다. 차창에 스치는 바람도 추위가 싫은지 윙윙 울
음소리를 낸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해 닿는 곳까지 가기로 했는데,
육지의 동쪽 끝이라 날이 더 빨리 저물었다. 가속페달을 깊게 밟았다.
“김 서방, 좀 천천히 가게나!” 장모님의 염려스러운 표정이 룸 미러에
비쳤다. 좀 더 멀리 갔으면 좋으련만, 장모님은 나의 밤길 운전이 불안하
신 모양이다.
도로가 휘어지는 곳에 후포를 알리는 이정표가 보였다. 야트막한 산
을 둘러업고 들어선 후포항. 희미한 가로등만이 우리 일행을 맞이해 줄
뿐, 적막감이 돌았다. 전등을 촘촘히 매단 고깃배가 먼 바다를 지나가고
방파제도 바람이 싫은 듯 철썩철썩 소리를 내고 있었다. 후포는 결혼
전 아내와 간혹 들르던 곳이다. 하얀 모래알과 파도에 씻긴 조개껍데기
가 참 인상적이었다. 그때, 우리는 빈 배에 걸터앉아 모래알보다 더 많은
꿈을 꾸기도 했었다.
수소문 끝에 간신히 민박집을 구했다. 방이 깨끗하여 편히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보일러를 세게 틀어 놓겠다는 주인아주머니의 말에 몸이 녹
는 것 같았다. 짐을 챙겨놓고 횟감을 사러 나섰다. 인적이 끊긴 바닷가,
부두 한쪽에 횟집이 보였다. 날씨가 추운 탓인지 어항 속 고기들도 일찍
잠들어 있었다. 뜰채를 쥔 주인과 흥정이 시작되었다. 한 마리를 더 주면
남는 게 없다는 주인의 장삿속이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장모님의 에누
리 실력도 만만치 않았다. 끈질긴 흥정 끝에 작은 놈 몇 마리를 덤으로
얻었다.
그런데 민박집에 돌아오니 어찌된 일인지 방 안 공기가 냉랭하다. 시
장기와 함께 냉기가 몸을 파고드는데, 아내의 불평은 속사포를 방불케
한다. 장모님은 좌불안석이고 아이들도 표정이 굳어졌다. 밥을 짓고 매
운탕을 끓여 둘러앉았으나 침묵만 흘렀다. 계속되는 아내의 투정에 장
모님은 마치 당신이 잘못하신 양, 애써 나의 처지를 대변하신다. 그러나
방바닥은 눈치도 없이 여전히 차갑다. 아이들도 목도리를 풀지 않은 채
말이 없다. 주인아주머니는 조금만 있으면 방이 데워질 것이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문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이 분위기를 점점 더 어색하게 만들었다. 할
수 없이 숙소를 옮기기로 했다. 짐을 챙기기 시작하자, 아주머니는 방값
으로 받은 돈을 획 던져버리고 문을 쾅 닫아버렸다. 쫓겨나듯이 밖으로
나오니 바람 끝이 더 차갑다. 장모님을 모시고, 이 밤중에 무슨 변고란
말인가? 나의 불효를 반전시킬 기회는 쉽게 오지 않을 모양이다. 밤이
깊은지라 숙소를 구하지 못하면 낭패다. 차를 몰고 남쪽으로 향했다.
붉은 간판이 보였다. 여관이었다. 민박보다 오히려 숙박비도 쌀뿐더러
방바닥이 자글자글 끓었다.
장모님과 한 방에서 밤을 새워 보기는 처음이다. 간혹 자동차 경적만
들릴 뿐, 장모님과 아내의 정담은 밤이 새도록 이어졌다. 지금까지 살아
오신 이야기이며, 우리 내외를 지켜보며 가슴 조였던 일들을 다 털어놓
으셨다. 무심결에 지나쳤던 일인데도 장모님은 신경을 많이 쓰셨던 모
양이다. 처가에 갈 때마다 밥상을 따로 차려 반가이 맞이해 주시던 장모
님, 나는 그 사랑의 무게를 모르고 삼십 년을 살아왔다. 잘못을 보고도
꾸중 한 번 제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이 사위란 말인가?
동해안의 아침은 화려했다. 일출의 위력 때문인지 바다는 평온을 되
찾았지만, 공기는 유난히 차가웠다. 방바닥에 허리를 지지시는 장모님
은 “아이고, 시원하다!”를 연발하셨다. 그렇다! 그날 장모님은 정말 시원
하셨을 것이다. 허리만 시원하신 게 아니라 모든 것이 다 시원하였을
것이다.
김정구 --------------------------------------------------------
2008년 ≪수필과비평≫ 등단.
'월간 수필과 비평 > 수필과비평 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수필과 비평 2012년 2월호, 내게로 가는 여정] 어느 바쁜 날 - 김예경 (0) | 2012.03.05 |
|---|---|
| [수필과 비평 2012년 2월호, 사색의 창] 아리랑고개 - 형효순 (0) | 2012.03.03 |
| [수필과 비평 2012년 2월호, 사색의 창] 밥을 굶었는가 - 김세관 (0) | 2012.03.03 |
| [수필과 비평 2012년 2월호, 한국 수필문학사 기획연재-14] 제4장 현대 수필문학의 전개(2) - 한상렬 (2) | 2012.03.02 |
| [수필과 비평 2012년 2월호, 나의 대표작] 현관에서 - 김대원 (0) | 2012.03.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