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바쁜 날
친구야, 올해 우리 시골집 포도 알이 왜 이렇게 자잘하게 되었는지
아니? 올봄에 내가 너무 바빠 손질해주러 여기 내려오지 못한 탓이야.
그래도 두 나무 다 맛은 훌륭하지 않니? 얘, 얘, 이것 봐라. 개미도 포도
먹으러 오는 것. 야! 그런데 이 개미는 정말 크다. 물리면 꽤 아프겠는데.
이 개미와 저 개미 그리고 저어기 저 개미는 모두 다른 집 애들인가 봐.
크기도 다르고 색깔도 다르잖아. 어디에 집 짓고 사는지 우리 따라 가보
자. 여기다! 큰 개미는 이 너도밤나무 밑에 집이 있나 보다.
친구야, 이러다 우리 오늘도 목장구경 못 가겠다. 그만 나서자. 빤히
보이는 것 같아도 프랑스와 아저씨네 목장까지 적어도 30분은 걸릴 걸.
자두 몇 알 따서 주머니에 넣고 가면서 먹을까? 여기는 이렇게 아무데나
자두나무가 참 흔하네. 블루베리도 많고. 자두에 벌 꼬이는 것 좀 봐.
빨간색 자두가 더 달까 노란색 자두가 더 달까? 아무래도 노란 자두가
더 단 것 같지 않니? 내 입에는 모두가 꿀 같기만 해.
친구야 잠깐만. 여기가 앙리 씨 집이야. 어제 저 모퉁이에서 만났던
할머니 있잖아. 파리에서 어제 내려왔다던. 이 집도 마당에 배가 다 떨어
져 쌓였네. 일손이 부족해서 아무도 거두지 않으니까 그냥 다 썩어서
거름 되고 마는 거야. 우리 수일 내로 아이들 데리고 인사도 올 겸 오랜
만에 이 집 뒷마당 숲으로 소풍 가자. 우리 애들 어렸을 적엔 여름방학마
다 도시락 싸서 참 자주 갔는데. 숲이 워낙 깊어서 너무 들어가면 길
잃기 쉬워. 앙리 씨는 여기 숲속에서 며칠씩 사냥하고 돌아오곤 하지.
멧돼지도 잡아 오고 노루도 여러 마리씩 잡아 와. 이젠 나이가 많아 사냥
도 잘 안 하신대.
친구야, 여기 이 오른쪽 해바라기 밭길로 곧장 가면 우리 시댁 조카
샤를네 집이 있어. 이번 주말에는 아기도 볼 겸 너랑 같이 가겠다고 했
어. 샤를은 쟌느와 아들 하나 낳고 사는데 그 애들 어쩌면 결혼할지도
모르겠어. 그래서 집안사람들 모두 지금 굉장히 기대하고 있어. 뭐? 그
럼 아이 낳고 사는 여자와 결혼 안 할 참이었어? 여기는 결혼 안 하고
사는 사람이 더 많거든. 하하- 그렇구나, 여긴 프랑스지.
친구야, 저 앞에 우리 시부모님 묘소가 있어. 너도 인사할 겸 잠시
들렀다 가자. 어머나!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넘어가는 길가에 아무렇지
도 않게 이렇게 작고 예쁜 공동묘지가 있네. 여긴 다들 이렇게 동네마다
작은 공동묘지에 가족 묘지를 가지고 있어. 세상 떠난 가족이 생각날
때면 언제라도 와서 만난다고 여기기 때문에 여기서는 묘지가 참 포근
한 곳이야. 나도 죽으면 이곳으로 오겠지. 묘지 걱정이 없다니 정말 부럽
다. 여기 이 다 꺼져가는 무덤은 자손이 아무도 손질을 안 하나 보다.
2차대전 때 싸우지도 않고 독일군에게 파리를 내주었던 고위관리 집 가
족묘지야. 본인 말로는 파리가 폐허가 되는 것을 막으려고 그랬다고 하
지만 그렇다고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었지. 전쟁 후 집안이 완전히 몰락
해서 이젠 아무도 이곳에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아.
친구야, 부모님께 인사도 했으니 우리 이제 그만 가볼까? 그런데 이
지방은 물이 많은 땅인가 보다. 여기 저기 물웅덩이가 많잖아. 그러니까
산이 아닌데도 이렇게 숲이 울창하겠지? 맞아, 그래서 마을 이름도 아예
그로셴느야. 저런 큰 나무가 엄청 많은 곳이라는 뜻이야. 저기 웅덩이에
낚싯대가 그냥 있다. 우리 가서 낚시 한번 해볼까? 그런데 아무래도 이
곳 풍경은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아. 아주 낯이 익어. 인상파 화가들이
그린 풀밭 그림과 똑 같잖아. 혹시 그 그림들 모두 여기서 그린 것 아니
야? 후후-.
친구야, 여기가 바로 프랑스와 아저씨네 목장이야. 저쪽에 아기 젖소
들 많이 보이지? 와- 소들이 모두 우리한테로 오고 있어. 누가 왔나
보러 오는 건가? 항상 저렇게 몰려오곤 해. 저희도 하루 종일 사람 구경
하기 힘들거든. 이 송아지들 좀 봐, 어쩌면 이렇게 귀여울 수가! 정말
엄마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 아기소 눈에 흰 구름 떠가는 것 좀 봐.
요 신기한 까만 코 좀 만져보면 안 될까. 젖소들 옷이 우리 옷보다 훨씬
더 멋지지 않니? 어느 송아지가 제일 예쁘게 입었는지 우리 찾아보자.
얘들 봐라. 이젠 슬슬 가버리잖아. 우리에게서 구경할 것 다 했다 이건
가? 녀석들아 우리도 너희 구경할 것 다 했으니 이제 갈 테다. 아기들아
또 보자 안녕-.
친구야, 집까지 가면서 우리 이 블루베리들 좀 딸까? 다 떨어지기 전에
잼 좀 많이 만들고 싶어. 방학 끝나고 파리에 돌아가면 나누어 줄 집이
많거든. 후유- 우리 매일 왜 이렇게 바쁜 거지?
김예경 ---------------------------------------------------
1998년 ≪에세이문학≫ 등단.
수필집: ≪나는 마음씨 좋은 여왕≫, ≪여왕 호사를 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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