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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 비평 2012년 2월호, 사색의 창] 아리랑고개 - 형효순

신아미디어 2012. 3. 3. 08:58

아리랑고개

   우리 마을 주민의 날 행사를 치렀다. 반별로 여러 가지 경기를 끝내고
뒤풀이로 모두 모여 춤을 추고 놀아도 흉이 되지 않는 시간이 되었다.
노래방 시설이 설치된 회관 마당에서 남녀노소 누구나 터놓고 그동안
쌓인 근심과 걱정, 미움을 훌훌 털어 버리고 모두가 흥겨워했다. 그러나
하나같이 즐거울 수 없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다. 남편이 아파 살아가
기가 팍팍한 젊은 아낙네가 기어코 눈물을 쏟았다. 삶에 지친 그녀가
안쓰러웠다. 한번 터진 서러움은 막을 수 없었다. 모처럼 즐거운 장소가
흐려질까 봐 그녀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저마다 가슴속에 묻어둔 아픈
사연에 전염되면 덩달아 모두 울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그
녀의 딸이 제 엄마 모습을 보더니 술 마시고 울려면 왜 마셨느냐고 따졌
다. 아직 힘든 엄마의 마음을 알아주기에는 너무 어린 딸이다.
   내가 저 아이만 했었을까. 어느 해 봄, 화전놀이에서 엄마가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던 모습이 서러워 치맛자락을 붙잡고 울던 생각이 났다. 그
시절에는 해마다 봄이 되면 연례행사처럼 화전놀이가 열렸다. 농사가
시작되기 전에 먹고 놀면서 공동체의식을 다지던 자리다. 장롱 속에 있
던 고운 한복을 꺼내 차려입고 여인들은 야트막한 마을 뒤 꼴감산으로
나비처럼 모여들었다. 백여 호가 되는 큰 마을의 여인들이 다 나오다시
피 했으니 꼴감산에는 색색 고운 여인들의 치맛자락이 봄바람에 휘날렸
다. 공연히 어린 우리들조차 즐거워 오르락내리락하며 뛰놀았다. 허가
된 하루 놀이에 마을 여인들의 억눌렸던 끼와 설움을 풀어놓아도 흉이
되지 않았다. 한 번쯤 찌든 생활을 잊고 마음껏 놀게 했던 선조들의 지혜
가 담긴 특별한 하루였다.
   공동으로 먹을 것을 장만하여 나눠 먹으면서 웃음꽃이 붉은 진달래꽃
보다도 더 화려한 날이었다. 동상네라고 불리던 단골이 장구를 메고 노
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목청 고운 동실댁은 언제나 장구 앞에서 춤을 추
었다. 무섭다는 시어머니도 그날만큼은 너그럽다고 했다. 사실 시어머
니들은 슬그머니 한쪽 산비탈로 비켜주어 며느리들이 마음껏 놀게 배려
하기도 했다.
   그날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게 생각난다. 날마다 흰 저고리
에 검은 무명치마를 입고 일만 하던 어머니가 아니었다. 남색치마에 살
구색 저고리를 입은 엄마가 <아리랑>을 구슬프게 불렀다. 그런 엄마는
너무도 낯설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나를 넹겨주소!”
   까닭 없이 자꾸만 눈물이 쏟아졌다.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진달래
꽃잎을 수북하게 발밑에 따서 버렸다. 해가 설핏하도록 엄마는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엄마는 춤도 추었다. 나는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잡
고 울다가 옆집 아줌마들에게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 엄마의 애달픈 마
음을 이해할 나이도, 호랑이 시부모님으로부터 얻은 단 하루의 시집살
이 해방을 이해할 나이가 아니었다. 엄마들의 노랫소리는 모두가 서러
운 넋두리 같았다. 하나같이 청승스럽도록 슬픈 가락을 끝도 없이 쏟아
놓는 것이었다. 엄마의 손을 잡고 돌아오면서 엄마가 그렇게 슬프게 부
르던 아리랑고개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했다. 나무 한 짐 짊어지고 넘어
오기 힘들다는 풍곡재보다 높으냐고 물어보았다. 외갓집을 가려면 언제
나 풍곡재를 넘어야 했는데 나에게는 엄청나게 높아 보였다. 하늘과 맞
닿아 보이는 천황봉만큼 높으냐고 연거푸 물었다.
   “아리랑고개는 사람 맴(마음)속에 있제. 산에는 없어. 수월한 사람도
있고 넹기기 어려운 사람도 있제. 아부지한테 노래 불렀단 소리 말어.
덴겁하실라. 알았제?”
   물론 나는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노래를 불렀다고 말하지 않았다. 어쩐
지 싫어할 것 같아서였다. 엄마가 다시 흰 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으니
우리 엄마 같아 안심했다. 조금 더 자란 뒤 나는 화전놀이가 열리는 꼴감
산에 가지 않았다. 어머니가 또 슬픈 소리로 아리랑을 부를 것 같아서였
다. 어머니는 그때 스무 살 꽃 같은 언니를 다시는 못 올 곳으로 보낸
뒤였다. 어머니의 화전놀이는 해마다 더 슬퍼졌다. 작은오빠도 큰오빠도
언니를 따라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마저 돌아가신 뒤 우리는 태산
보다 더 높은 산 뒤에 서 있었고, 어머니는 그 아리랑고개를 넘어야 우리
를 키울 수 있었다. 어머니는 더 이상 화전놀이에 가지 않았다.
   어머니의 아리랑고개를 이해하기까지는 그리 오래지 않았다. 화전놀
이는 시집온 동네에도 있었다. 장구를 치고 그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
습도 고향마을과 다름없었다. 어느 해 봄날, 장구 치는 마을 형님 앞에서
그날 어머니처럼 나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어머니의 아리랑이
목울대를 타고 넘어왔다. 꾸역꾸역 쏟아져 나오는 울음을 삼키느라고
노랫가락이 끊겼다. 장구 치던 마을 형님이 장구채로 내 어깨를 쳤다.
네 설움 때문에 우리 설움까지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였다. 결코 어머니
처럼 살지 않겠다고 해놓고 어머니만큼도 못하고 사는 자신이 서러웠다.
   시집간 딸이 IMF 때 빈손으로 바닥에 내려앉았었다. 세 살 난 외손녀
를 제 엄마에게서 데리고 오면서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어머니의 태산
보다 넘어가기가 힘들었다. 어머니가 넘어야 했던 절망의 고개에 비하
면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도 벅차서 헐떡거렸다. 힘들 때마다 어머니의
아리랑이 사무쳤었다.
   방바닥에 쓰러져 통곡하듯 우는 젊은이가 넘어야 할 이 고개도 혼자
넘어야 한다. 남편이 있어도 없는 것만 못한 그이는 오죽했으랴! 남편만
건강하다면 이 세상에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다면서 흐느끼는 그녀의
어깨가 가엾다. 봄바람은 따뜻한데 그녀의 마음에는 겨울 찬바람이 불
고 있었다. 방에 걸린 가족사진 속에서는 남편이 건강하게 웃고 있는데
병원에서 본 그녀의 남편은 허깨비 같았다. 아직 창창한 그녀의 앞날과
젊음이 안타까웠다.
   “산 너머 산이고 고개 너머 고개인 우리네 인생! 오늘만이라도 잊어보
자. 오늘이라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내일 괴로워하자. 다시 놀이판
으로 가자. 살다보면 아득하게 보이던 아리랑고개도 어느새 넘고 있을
거야!”
   그녀는 잡아끄는 나를 따라 다시 즐거운 놀이마당으로 나왔다. 노래
방 기계에서 쏟아져 나오는 음악은 흥겨웠다. 그녀가 동네 사람들 속에
서 신나게 몸을 흔들고 있었다. 훨훨 춤추는 그녀의 춤사위에서 고단한
어제의 일상과 내일의 희망이 너울거린다. 우리는 그 주위에서 원을 그
려 춤을 추었다. 그녀가 넘어야 할 아리랑고개가 노래 속에 잠시 내려앉
아 쉬고 있었다.

 

형효순 ------------------------------------------------------

2008년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재주넘기 삼십 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