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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5월호, 방송인 장기오의 일과 삶] 오만과 품격  - 장기오

신아미디어 2013. 7. 5. 08:31

"이제 이만큼 물욕과 치기와 방종이 판을 쳤으니 지금쯤은 방송도 산업으로써 콘텐츠의 경쟁력만 따질 것이 아니라 문화매체로서의 거시적이고 근본적인 삶의 문제를 생각해 보는 지성적 매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이들이 사탕을 좋아하다고 사탕만을 줄 수는 없다. 억지로라도 밥을 먹여야 한다. 이것이 어머니의 역할이고 문화의 역할이다."

 

 

 

 

 오만과 품격  장기오


   현대 대중문화의 총아로 영화, TV드라마, 연극 등을 꼽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야기를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는 의미에서 세 매체는 동일하다. 그러나 제작기법은 상당히 다르다. 우선 영화와 TV드라마는 ‘카메라’라는 기계를 통해 표현하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관점은 다르다.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집에서 밖으로 나가야 하지만 TV드라마를 보기 위해서는 밖에서 집으로 들어와야 한다. TV드라마는 온 가족이 함께 보는 가족매체지만 영화는 개인의 선택에 의한 개별매체다. 그래서 TV드라마는 보다 높은 도덕성이 요구된다. 연극은 영화나 TV드라마와 같이 ‘이야기’로 대중과 소통하지만 그것의 언어는 영화나 TV드라마에 비해 보다 철학적이고 사변적이다. 그러나 영화나 TV드라마의 언어는 일상의 언어다. 같은 것 같으면서도 서로 상이한 이런 차이점은 매체의 존재 방식의 차이로 나타난다.
   우선 영화는 감독의 매체다. 영화는 감독이 누구냐를 제일 먼저 따진다. 그리고 영화를 기억하는 것은 그 감독의 명성과 함께다. 영화제작의 전 과정은 감독의 판단으로 만들어진다. 말하자면 감독이 모든 전권을 쥐고 자기의 이름을 걸고 제작하는 시스템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나리오를 쓴 작가를 기억하지 못한다. 모든 것은 감독으로 통한다. 그러나 TV드라마는 다르다. 사람들은 감독보다는 작가를 기억한다. 누가 극본을 썼는가를 따진다. 그래서 모 작가의 작품은 질의 좋고 나쁨을 떠나 일단 한번 본다. 그래서 영화를 ‘감독의 매체’라고 하고 TV드라마는 ‘작가의 매체’라고 한다. 연극은 연출이나 작가보다는 배우가 누구인가를 먼저 살핀다. 그래서 연극은 ‘배우의 매체’라고 한다.
   이러한 매체 간의 차이가 그 매체 안의 특별한 권력관계를 만들어 낸다. TV드라마작가로 대단한 명성을 지닌 여류작가 한 사람은 시나리오 한 편을 써주었다가 영화감독이 다 뜯어고치는 바람에 그 대본을 회수해 버린 일도 있었다. 영화는 감독이 시나리오 대부분을 자신의 이미지에 맞게 손질한다. 그래서 작가는 사라지고 감독만 남는 형상이 되고 만다.
   그러나 TV드라마에서의 작가의 권력은 상상 이상이다. 모 작가는 50부작 드라마가 이제 막 2회가 방영되었는데도 그 연출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방송국에 교체를 요구했고 방송국은 작가의 파워에 밀려 원로연출자를 교체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권력은 시청자들의 볼 권리 때문이다. 방송국은 일단 한 번 시청자와 약속한 드라마는 불의의 사고가 아닌 한 반드시 방송되어야 한다. 이 시청자와의 약속 때문에 작가가 무슨 이유이든 간에 못 쓰겠다고 버티면 방송국은 그 작가를 어떻게든 달래야 한다. 그리고 TV드라마의 성공여부는 전적으로 작가의 역량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간 단위로 방송되는 TV드라마의 특성상 연출이 어떻게 연출하느냐보다는 작가가 어떻게 써주느냐가 성패의 관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존심 강한 연출자는 인기 있는 연속드라마보다는 단막드라마를 더 선호한다. 단막드라마는 연출의 의지가 반영될 수 있고 또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작가를 교체할 수도 있지만 연속극은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작가의 파워가 커지면서 눈살 찌푸리는 일들이 심심찮게 일어난다.
   연말이 되면 거의 모든 지상파 방송국들이 그 해를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연말연기대상’ 같은 행사를 한다. 이 시상식은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연출자와 출입기자들이 비밀투표를 하고 고위간부들이 이를 추인하는 형식으로 시상자를 정한다. 그러나 어떤 작가들은 자기가 쓴 작품에 출연하는 연기자에게 상을 주라고 압력을 가한다. 자기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당장 집필을 중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방송국은 어떻게 하든 무마시켜 보려 하지만 이미 권력의 맛을 들인 작가는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 고백건대 나도 그런 경우를 당했다. 나는 끝까지 불가不可하다고 우겼지만 작가는 윗사람에게 압력을 넣어 관철시켰다. 싸우려 들면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고 또 그리할 수도 있었지만 그리하지 않음으로써 나는 내가 지켜야 할 것들을 지켜야만 했다. 무엇 때문에 투표까지 했는지 나 자신이 너무 무력하고 초라해져 그해 연말 엄청 술을 많이 마셨다. 그 이후 나는 그 작가를 시종 질 낮은 저급한 장사치로 취급했다. 그러나 그 작가는 기세등등하여 자기보다 나이 많은 외주제작사 임원을 ‘이 새끼, 저 새끼’ 하면서 거만을 떨고 모독을 주면서 천박하게 처신하기도 했다.
   작가란 기존의 질서나 가치, 제도, 관습 등을 은밀히 비판하면서 한 시대의 가치관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드라마작가이든 시인이든 소설가든 수필가든 마찬가지다. 그런 사람들이 불법과 편법을 강요하고 안하무인으로 거들먹거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 세계에 대해 깊이 절망했다. 물론 그렇지 않는 작가들도 있지만 가벼운 재담이나 깊이 없는 글재주로 말의 무게를 떨어뜨리고 얄팍한 쪼가리 지식으로 이리저리 조립이나 하는 일부 작가들이 그렇게 변해간다. 문제는 그런 작가들이 한국 방송드라마를 이끌어 간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시청률이다. 저질이라고 지탄을 받든 욕을 먹든 오로지 시청률만 있으면 작가의 고료는 천정부지로 올라가고 작가는 스타 대접을 받는다. 탤런트들도 작가가 거느린다. 일종의 사단을 형성한다. 작가는 TV드라마의 최고 권력자다.
   이제 이만큼 물욕과 치기와 방종이 판을 쳤으니 지금쯤은 방송도 산업으로써 콘텐츠의 경쟁력만 따질 것이 아니라 문화매체로서의 거시적이고 근본적인 삶의 문제를 생각해 보는 지성적 매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이들이 사탕을 좋아하다고 사탕만을 줄 수는 없다. 억지로라도 밥을 먹여야 한다. 이것이 어머니의 역할이고 문화의 역할이다. 학교폭력이 사회문제가 되고 청소년들의 언어가 날로 거칠어진다고 한다. 우리 사회의 현재 가장 영향력 있는 매체는 TV다. 얼마나 더 천박해져야 제 자리로 돌아갈까? 방송이 좀 더 품격을 갖추었으면 한다.

 

 

장기오  --------------------------------------------
   KBS 大PD, 드라마제작국장 역임. TV문학관 <금시조>,<홍어> 등 47편의 드라마 연출. ≪현대수필≫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 회원. 수필집: ≪사라지는 것은 시간이 아니다, 우리다≫, ≪나 또한 그대이고 싶다≫. 기타: ≪TV드라마 바로보기, 바로쓰기≫, ≪드라마 연출론≫, ≪장기오의 드라마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