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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5월호, 수필가가 감동한 명수필⑤-정태헌의 <경계境界에 서서>] 존재론적 자리에서 - 김지헌

신아미디어 2013. 7. 5. 08:15

"그렇다면 인간적 조건으로 살아가려면 최소한 중간 지점에 서 있어야 하는데 중간자로 살아갈 때 빠져들 수밖에 없는 딜레마가 또 남아 있다. 결국 생은 이상과 현실이라는 경계에서 늘 흔들리다 한 걸음씩 나아가지 않던가. 우리네 생이 너무 숭고하거나 너무 시시해서 어디로 나아가지 못하고 서성거릴 때 이 <경계境界에 서서>가 작은 나침반이 되어주지 않을까. 그렇다면 문학에서는 결국 존재의 사유에서 오는 미적 감동이 좋은 작품임을 지시하지 않겠는가"

 

 

 

 

 

 존재론적 자리에서    -  김지헌

 경계境界에 서서   /  정태헌


   밤이 이슥하건만 눈 붙일 기색들이 보이질 않는다. 손전화로 누구와 통화하며 잡지를 건성으로 넘기는 사람, 맥주를 홀짝이며 발코니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는 이, 영수증을 늘어놓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돈을 헤아리는 자 등 제각각이다. 탁자 위엔 기름진 음식과 술이 놓여 있고, 티브이에선 집값이 터무니없다며 이구동성으로 핏대를 올리고 있다. 하나 아랑곳없이 덕유산 무주구천동의 밤은 그렇게 깊어만 간다.
   발코니에 있던 이가 창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얼핏 거무스름한 게 눈에 스친다. 거실에서 새어 나간 불빛에 물체가 눈에 어른거린 게다. 짚이는 데가 있어 창문을 열고 발코니로 나간다. 마주친 것은 달빛 속에 우뚝 서 있는 한 그루 소나무다. 수관樹冠이 눈높이에 떠 있다. 숙소가 4층이니 나무의 키는 십여 미터는 족히 넘을 듯하다.
   이곳에 처음 도착한 땐 주위를 눈여겨볼 겨를이 없었다. 사방은 온통 녹음으로 푸르러 눈은 분별력을 잃고, 골짝을 울리는 매미 소리로 귀는 먹먹하기만 했다. 가져온 짐들을 옮기기 위해 숙소를 오르내리다 보니 그 나무가 차츰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몸피가 한 아름이나 되는, 나무껍질이 불그죽죽한 나무였다. 그러나 그저 흔한 한 그루 나무이겠거니 하고 별 관심 없이 지나치고 말았다.
   석양 무렵, 주변 산책길에 나섰다가 그 나무가 다시 눈에 띄었다. 높이 치솟은 키 때문이었을까. 황톳빛 나무껍질을 따라 윗부분까지 쳐다보게 되었는데 그때야 키가 큰 적송赤松임을 알았다. 둥치가 굳건하고 줄기는 구새 먹은 데가 없이 옹골차며 수형은 당당하고 끌밋했다. 쭉 뻗어 오르다가 윗부분에서 약간 굽었는데 대여섯 개의 장솔가지가 춤을 추듯 넉넉하게 펼쳐져 있었다. 모시 진솔을 입고 한껏 멋 부린 한량 같기도 하고, 쾌자 자락 날리며 너울춤을 추는 풍류객 같기도 했다.
   나무의 머리 격인 수관은 키가 훤칠한 헌헌장부가 삿갓을 쓰고 있는 형상이었다. 장솔가지들은 서로 적당한 간격과 질서를 유지하고 있으며 솔잎들은 서로 나란히 키를 맞춰 하늘을 향했다. 햇빛을 더 많이 받으려 가지들이 욕심부려 다투었다면 저렇게 정제된 형상을 만들어내지는 못하였으리라. 석양에 젖은 그 장솔가지 사이로 박새 두어 마리 춤을 추며 오르내리는 풍경이 한껏 고졸했다. 한참 동안 눈길을 거둘 수가 없으며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깊은 밤, 그 적송의 수관을 발코니에서 다시 마주하고 있다. 아니, 이쪽과 저쪽의 살피에서 양쪽을 번갈아 보고 있다. 건넌방에 있던 다른 일행들이 이쪽 거실로 모여든 모양이다. 다시 거실은 소란스러워진다. 이쪽은 화사하고 밝은 불빛이지만, 저쪽은 푸르스름하고 적요한 달빛이다. 이쪽은 먹이와 놀이가 흥성하지만, 저쪽은 달빛과 안개에 젖어 있는 가년스런 침묵이다. 왠지 오늘 밤은 달빛 속의 침묵 쪽으로 마음이 더 쏠린다. 가장 깊은 감정은 침묵 가운데 있질 않던가. 저 깊은 침묵에 들기 위해 적송은 달안개 속에서 얼마만큼 침잠과 혹독한 다스림이 필요했을까. 범접하기 어려운 결곡한 기운이 수관 주위에 감돈다.
   어둠에 적응돼 눈이 차츰 밝아 온다. 달빛 속에서 바라본 적송의 수관은 투명하고 침착하다. 땅에서 고개 들어 바라볼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애오라지 하늘과 땅, 햇살과 산바람이 빚어낸 향맑은 모습이다. 유장하고 가락진 한 편의 시며, 순결하고 웅숭깊은 한 장의 그림이다. 저 자태는 통렬한 설교보다 현자의 전언 같은 무언의 가르침이다. 적송을 눈 속에 넣고 톺아본다. 나는 적송의 수관을 바라보고 있지만 적송의 눈길은 자신의 마음자리와 뿌리를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메마른 시멘트 건물의 좁은 발코니에 위태하게 서 있지만, 적송은 땅속에 뿌리를 서려두고 달빛 속에 도저하게 서 있구나. 뿌리는 더 좋은 자리를 찾아 주변을 서성대거나 산짐승처럼 거친 숲을 싸다니며 탐욕을 부리는 것을 원치 않았겠지. 햇빛을 등진 채 땅속의 어둠과 진탕 속에서 땅 위의 것들을 받들고 키우기 위해 밤에도 불면으로 뒤척였을 것이고. 뿌리가 어둠 속에서 겪은 고통의 대가가 저 정정한 형상을 만들어 냈으리라.
   육신을 추스르고 속뜰을 맑히기 위해 찾아든다는 산골짝에서 정작 만난 것은 서늘하고도 짱짱한 생의 긴장이다. 무엇을 깎아내고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하루를 어찌 엮고 일상을 무엇으로 벼리며 생을 어떻게 빗질해야 할 것인지 곰곰 되씹게 한다. 밖으로 한 발짝 내딛지도 안으로 들이밀지도 못하고 발코니에 묵연히 서 있다. 적송과 거실 안과 나 자신을 새삼 번갈아 바라본다. 침묵과 소란스러움, 침잠과 혼란, 투명과 혼탁, 영과 육의 경계에 서 있는 셈이다.
   거실에서 왁자한 소리가 잇달아 들려온다. 드디어 의기투합 되었는지 패를 갈라 화투판이 벌어진 모양이다. 빨리 들어와 끼어들지 않고 뭘 하느냐는 독촉이다. 발길이 머뭇거려진다. 난간 밖으로 발길을 옮기자니 턱없는 오만이고, 거실로 들어서자니 오늘따라 왠지 스스럽기만 하다. 어디든 오늘 밤은 잠을 이루기가 쉽지 않을 성싶다. 이쪽과 저쪽의 경계엔 달빛만 겹겹이 쌓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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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마다 각기 지향하는 세계가 다르고, 지양하는 세계도 다르다. 그것은 작가의 인생관이나 문학세계가 닮은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수필, 감동 있는 수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정태헌의 <경계境界에 서서>를 선택한 것은 이 작품이 그의 작품세계를 대표할 수 있겠으며 또한 그의 삶과 많이 닮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창작정신은 필자가 쉽게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진지하고 열정적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는 하나의 단어에서부터 문학의 궁극인 철학적 사유의 문제에까지 정성과 온힘을 새겨 넣지 않은 곳이 없다. 그의 삶 또한 작품과 거의 유사하다. 작가의 생과 작품이 닮았다는 것은, 다른 장르에 비해 더 강조해서 추구하는 수필문학의 ‘경험적 진실-사실적 진실’의 문제와도 깊게 관련된다. 삶과 유리되지 않은 작가의 문학정신은 작품에서 받는 감동과 사람에게서 받는 감동이 중첩되어 독자의 가슴을 더 진중하게 울려주지 않던가.
   작중 화자(작가)는 모임을 핑계로 현실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다독이고 맑히겠다는 생각으로 산중에 들어갔다가 발코니 앞에 서 있는 소나무 한 그루를 만난다. 다른 수목들과 함께 묵연히 서 있는 나무를 통해 작가인 자신의 삶을 통찰하고 현실의 안과 밖, 차안과 피안의 경계에서 어디로 발 디뎌야 하는지를 묻는다. 물론 정답은 없다. 이쪽과 저쪽은 손바닥 뒤집기처럼 간단할 수는 있지만 그 선택지에서의 삶은 극과 극이 되기 때문에 현실을 사는 존재인 우리는 어느 누구도 한 세계를 오롯하게 추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그 물음 앞에서 각자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인생관 쪽에 무게 중심을 두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 과정을 좀더 섬세하게 들여다본다.
   산중에 도착한 그들은 밤이 이슥해도 잠자리에 들 기색이 없다. 더구나 자신의 습성대로 누구는 전화를 하고, 잡지를 뒤적이고, 맥주를 홀짝이고 있다. 자연의 품으로 들어와서도 현실에서 하던 도회적 삶의 양태를 습관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은 늘 우리 곁에 있는 존재여서 누구도 새롭게 인식하지 않는다. 소나무 역시 그의 마음이 다가가지 않았을 때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생각대로 보고 듣는 법이니 그 소나무에 눈길 줄 여유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산책길에 적송을 발견하고 그 옹골찬 모습에서 훤칠한 헌헌장부의 모습을 연상해 낸다. 그뿐인가. ‘모시 진솔을 입고 한껏 멋 부린 한량 같기도 하고, 쾌자 자락 날리며 너울춤을 추는 풍류객 같기도’ 하다고 말한다. 수려한 적송의 면모를 닮고 싶은 작가의 내면이 무의식적으로 투영되었다고 보아진다. 뿐만 아니라 어디 한곳 일그러진 모습 없이 자란 소나무를 보며 ‘햇빛을 더 많이 받으려 가지들이 욕심 부려 다투었다면 정제된 형상을 만들지 못 했을’ 것이라고 함으로써 욕심 부리지 않음이 삶을 균형 있게 살게 한다는 사유의 틈을 끼워넣는다.
   이 수필의 시공간은 그리 넓지 않다. 지리산이라는 한정된 공간과 소나무를 바라보고 생각하는 몇 시간 내에서 끝이 난다. 그는 이미 마음에 들어와 있는 소나무 때문에 눈길이 온통 발코니에 가 있다. 그는 발코니에 서 있고, 그 자리에서 마침내 경계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화자는 경계에 서 있다. 그가 서 있는 축을 기준으로 밖에는 푸르스름하고 적요한 달빛을 받고 있는 소나무가 서 있고, 안에는 화사하고 밝은 불빛이 있는 사람들의 일상적 모습이 있다. 현실이라 일컫는 차안에는 먹이와 놀이가 흥청댈 만큼 풍요롭고, 차안엔 달빛과 안개가 있는 침묵의 세계이다. 그는 침묵의 세계에 더 침잠하고 싶어한다. 그를 그쪽으로 끌어들이는 매개체는 당연히 적송이다. 그 이유는 적송이 품고 있는 이미지 때문이다. 얼마나 가열차게 혹독한 다스림을 이겨내야 저토록 범접하기 어려운 ‘결곡한 기운’을 담을 수 있는 것일까. 나무든 사람이든 인내한 결과로서의 현재의 모습을 지닐 수 있지 않겠는가. 결국 화자가 적송 곁을 떠나지 못하고 밤이 이슥하도록 맴돌고 있는 심중은 그 소나무와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직접적 표현은 없었지만 화자의 심중에는 오랜 시간 혹독한 비바람과 견디기 어려운 불볕 속에서 생을 담금질한 소나무의 나이테와 작가로서의 생의 나이테를 은유화한 모습이 들어있다. 어떻게 하면 현실적 삶을 살면서도 적송처럼 모든 것을 수용하면서도 욕심 없는 현자의 기품을 지니게 될까.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게 된 적송의 모습에서 작가 정태헌은 그가 그리는 이상을 풀어내고 있다.
   땅속에 뿌리를 깊게 내리고 달빛 속에 도도하게 서 있는 적송은 더 좋은 자리를 찾아 주변을 서성대거나 산짐승처럼 숲을 헤치며 탐욕을 부리지 않는 무욕의 존재다. 나무의 뿌리는 땅 속의 어둠 속에서도 땅 위의 것들을 키우기 위해 불면으로 뒤척이며 고통을 감내하여 화자가 보고 있는 눈앞의 적송의 모습으로 서 있다. 화자는, 즉 작가는 적송을 산바람이 빚어낸 향 맑은 모습이면서도 침잠과 혹독한 자기 절제가 필요한 작가적 삶에 견주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삶뿐만이 아니라 문학의 세계는 어떤가. 담금질하고 벼리고 조탁해서 써내는 작품 또한 적송의 생과 닮은꼴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쓰여진 좋은 작품은 적송처럼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현자의 전언 같은 의미를 발생시켜서 잔잔한 파급력은 물살처럼 세상에 소리없이 스며들게 된다.
   결국 화자는 세속에서 지친 육신을 추스르려 들어간 산중에서 서늘하도록 강렬한 생의 긴장을 얻는다. 무엇을 어떻게 덜어내고 채워야 하는지, 손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일상을 어떻게 벼려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그는 여전히 베란다 안과 밖, 차안과 피안의 경계에서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다. 일행들은 빨리 합류하라고 채근하고 정작 작가는 적송의 세계에 남아 있고 싶어 갈등한다. 그러나 그는 안다. 화자가 원하는대로 난간 밖으로 서게 되면 인간적 삶에서의 오만이 되고, 안으로 들어서자니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지 않아 경계에서 침묵하고 만다.
   이 지점이 수필가 정태헌의 사유가 공허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홀로 원하는 세계로 향하자니 인간적 삶에서 조화롭게 살아가지 못하는 모순을 겪어야 하고, 그 속으로 뛰어들자니 세상은 산뜻하고 경쾌하고 아름답지만은 않은, 수렁을 걷는 것처럼 질척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산바람처럼 향기롭게 살아가기에는 일상의 두께가 너무 남루함으로 혼곤하여 버겁지 않은가. 작가로서의 생, 또한 삶이 작품이 되는 수필세계에서 작가 정태헌이 보여주는 모순적 아이러니의 외침이다. 차안으로 섞여들자니 생이 너무 형이하학적이고, 피안으로 발길 옮기자니 생과는 유리된 형이상학적 세계다. 그렇다면 인간적 조건으로 살아가려면 최소한 중간 지점에 서 있어야 하는데 중간자로 살아갈 때 빠져들 수밖에 없는 딜레마가 또 남아 있다. 결국 생은 이상과 현실이라는 경계에서 늘 흔들리다 한 걸음씩 나아가지 않던가. 우리네 생이 너무 숭고하거나 너무 시시해서 어디로 나아가지 못하고 서성거릴 때 이 <경계境界에 서서>가 작은 나침반이 되어주지 않을까. 그렇다면 문학에서는 결국 존재의 사유에서 오는 미적 감동이 좋은 작품임을 지시하지 않겠는가.

 

 

김지헌  ---------------------------------------------
   조선대학교 초빙 교수, ≪수필과비평≫, ≪월간문학≫으로 수필 등단,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 작품집: ≪울 수 있는 행복≫, ≪표면적 줄이기≫, 소설집: ≪새들 날아오르다≫, 수상: 수필과비평문학상, 신곡문학상, 국제문화예술문학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