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비평≫ 138호에서는 수필과 상호텍스트성이라는 관점에서 작품들을 선정해 보았다. 수필이 개인의 제한된 경험을 넘어서서 예술로서 그 세계를 확장하고자 한다면 상호텍스트성이라는 측면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다. 소재로서의 상호텍스트성은 물론이며, 담론양식의 다양화라는 측면에서의 상호텍스성 등 내용과 미학적 표현의 양 측면에서 상호텍스트성의 문제에 대한 수필가들의 관심이 촉구된다고 하겠다. 수필의 붓 가는 대로 쓰는 자유로움과 개방성, 혼성성과 같은 장르적 성격은 충분히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는 상호텍스트성의 시대 - 송명희
1. 텍스트성과 상호텍스트성
현대의 예술 텍스트는 상호텍스트성을 피해갈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수필과비평≫ 138호(2013.4)를 읽고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 바티스트 카미유 코로(Jean-Baptiste-Camille Corot)의 풍경화 <모르트퐁덴의 추억>, 서포 김만중의 <서포만필>과 <구운몽>, 그리고 <만추>와 <망각>과 같은 영화 텍스트가 수필 텍스트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이밖에도 <정선아리랑>이나 사물놀이 같은 우리의 고전음악, 시, 다양한 <댄스>, 정약용의 인문학 저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술과 인문학 텍스트들이 수필 텍스트 속에 혼성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음을 보게 된다.
실제로 20세기 후반부터 예술작품들은 대단히 혼성적인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문학 텍스트 속에 이미지들이 있으며, 이미지 텍스트 속에 문학적 서술이 교차되어 있다. 138호에는 훨씬 더 다양한 텍스트들-우리의 고전문학 작가, 영화, 음악, 시, 무용, 인문학 저서-이 수필 텍스트 속에 혼성적으로 교차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야말로 상호텍스트성의 시대이고, 탈장르의 시대, 장르 확산의 시대라는 것을 증거라도 하듯이 말이다.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이란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한 프랑스의 기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이며 소설가이기도 한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는 모든 텍스트는 모자이크와 같아서 여러 인용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든 텍스트는 어디까지나 다른 텍스트들을 흡수하고 변형시킨 데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상호텍스트성이란 한 텍스트가 다른 텍스트와 맺고 있는 상호관계를 의미한다. 여기서 텍스트는 둘이나 그 이상일 수도 있다. 하나의 텍스트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텍스트나 현재 진행 중에 있는 텍스트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는 것이 상호텍스트성 이론의 핵심적 요지이다.
이 용어의 가장 포괄적인 의미는, 문학 텍스트의 의미와 해석은 어떤 한 작가의 독창성이나 특수성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개별적인 텍스트들 및 일반적인 문학적 규약(code)과 관습들에 의존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가장 제한적인 의미에서의 상호텍스트성이란 주어진 텍스트 안에 다른 텍스트가 인용문이나 언급의 형태로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는 경우이다. 그리고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상호텍스트성은 텍스트와 텍스트, 혹은 주체와 주체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지식의 총체를 말한다. 후자의 경우, 주어진 텍스트는 단순히 다른 문학 텍스트뿐만 아니라 다른 기호체계, 더 나아가서는 문화일반까지 포함한다.
필자는 상호텍스트성의 의미를 확장성, 복합성, 다양성 등 보다 창의적인 의미로 파악하고 싶다. 즉 하나의 텍스트가 다른 텍스트를 인용하거나 차용하거나 간에 텍스트 간의 혼성성을 통해서 작품의 의미를 보다 풍부하게 만들고, 새롭게 만든다는 것이다. 즉 하나의 텍스트 속에 다른 텍스트의 인용(패러디, 암시, 아이러니)은 그 작품의 개성이나 참신성을 훼손하지 않고 오히려 다양하고 풍부하게 만든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바흐친이 시의 언어와 구별되는 소설 언어의 대화성과 다성성을 말했듯이 수필이란 장르의 언어 역시 소설 이상으로 대화성과 다성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은 ≪서사시와 소설≫에서 소설은 시나 희곡 같은 여타의 문학 장르를 흡수하고 병합시키는가 하면 편지나 일기 같은 비문학적인 장르마저 흡수하고 병합시키는, 즉 소설화시키는 특성이 있다고 했다. 그는 소설의 언어를 시의 언어, 그중에서도 특히 서정시의 언어와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시인은 어떤 일관된 개성적 스타일을 지닌 그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지만, 소설은 모든 다양한 형태의 담론 양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 어떤 것도 반드시 작가의 것으로 귀속되는 것은 아니다. 소설은 이러한 다양한 담론 양식들을 표현수단으로 사용할 뿐만 아니라 대상으로 다룬다는 의미에서의 상호텍스트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바흐친은 수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수필이야말로 소설 이상으로 시, 소설, 희곡 등의 문학텍스트와 일기, 편지와 같은 비문학텍스트, 그리고 영화, 회화, 음악 등 다양한 예술텍스트들을 담론양식으로 사용할 뿐만 아니라 대상으로 다룬다는 의미에서 상호텍스트적인 문학 장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수필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 바 있다.
수필이란 자전적이고 자기고백적인 문학이며, 내용과 형식의 제한이 없이 다양한 장르를 흡수․병합시키는 개방성과 잡종성을 지니고, 지성과 정서가 결합되어 있으며, (후략)
-≪디지털시대의 수필 쓰기와 읽기≫(푸른사상, 2006)에서
여기서 말한 다양한 장르를 흡수․병합시키는 개방성과 잡종성이 바로 상호텍스트성을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수필에 대해서 ‘무형식의 형식’이라는 정의가 있어 왔지만 이는 단순히 특정한 형식이 없다는 의미에서 형식의 자유로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수필의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적인 면에서의 개방성, 잡종성, 혼성성, 바로 상호텍스트성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2. 이미지 텍스트에서 인문학 저서에 이르기까지
임매자의 <행복부터 가르쳐라>는 프랑스의 카미유 코로(1796-1875)의 몽환적인 풍경화 <모르트퐁덴의 추억>의 그림 이미지를 묘사적 언어 이미지로 바꾸어 서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카미유 코로의 <모르트퐁덴의 추억>은 진줏빛 물안개가 자욱한 봄날 아침의 숲 속 풍광을 그려낸다. 그림 오른편의 커다란 나무는 무성한 이파리들을 병풍처럼 펼쳐 허공을 감싸고 있고, 그림 왼편에는 이제 물오르는 어린 나무가 싱그러운 아침 공기를 가르면서 하늘로 가지를 뻗고 있다.
화사한 꽃송이가 동심을 유혹한 것일까, 한 아이가 두 팔을 벌려 언니에게 꽃을 따달라고 조르고 다른 아이는 철퍼덕 무릎을 꿇고 앉아 발치에 핀 꽃에 넋을 빼앗기고 있다. 까치발로 꽃을 따는 처녀, 꽃을 따고 싶어 조바심치는 아이, 꽃에 넋을 빼앗긴 아이, 그 천진한 모습은 내 어린 시절의 그리운 초상이다. 화가는 경이로운 자연의 아름다움에 매혹당한 동심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처녀와 아이들의 두건에 붉은색을 칠했다.
-임매자의 <행복부터 가르쳐라>에서
수필가 임매자에게 포착된 <모르트퐁덴의 추억>(1864)은 호숫가의 몽환적인 아름다운 풍경보다도 세 사람의 인물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경이로운 자연에 매혹당하고 있는 처녀와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동심과 행복을 향유하는 이미지는 수필가 자신의 몽유도원도처럼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호출한다.
이때 그녀의 행복한 추억여행을 방해하는 친구의 전화가 걸려오는데, 그 내용은 외국인학교 부정입학사건의 주인공이 바로 친구의 며느리라는 사실이다. 요즘 세간의 부유층에서 벌인 유학원 브로커에게 1억여 원의 돈을 주고 외국 체류 가짜 서류를 만들어서 외국인학교에 입학시켜온 사건이 바로 친구의 집안에서 일어난 것이다.
작가는 어린이들에게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가짜 서류를 만들어서라도 외국인학교에 입학시키는 것이나 방과 후에 학원 순례를 시키는 것 따위가 아니라 어린 시절 부모에게서 받은 무조건적인 사랑과 인정이야말로 유년의 행복일 뿐만 아니라 평생을 살아가면서 위기를 극복하게 해주는 힘의 원천이며, 위기로부터 건강한 자아를 회복할 수 있는 탄력성을 갖게 한다.
또한 수필가 임매자는 독일 초등학교에서 ‘행복’이란 교과목을 창시한 교육학자 에언스트 프리츠-슈베어트의 책 ≪행복부터 가르쳐라≫를 인용한다. 이 책이 강조하는 것은 아이가 “제 힘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부모가 신뢰할 때, 아이는 자존감을 지닌 강한 아이가 된다”는 것이다. 임매자의 수필 제목인 ‘행복부터 가르쳐라’가 어디에서 나왔는지가 분명해지는 대목이다. 작가에 의하면 어린 자녀에게 부모가 꼭 해주어야 할 일은 가짜 서류로 외국인학교에 입학시키는 일 따위가 아니다. 자녀 스스로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자기신뢰를 가지도록 자녀를 믿어주는 일이야말로 아이를 자존감을 지닌 강한 아이로 키울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라고 작가는 적고 있다.
<모르트퐁덴의 추억>은 문자언어가 가질 수 없는 색채언어와 가시적인 회화 이미지를 통해서 행복한 유년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한눈에 보여주고 있다. 또한 작가는 ≪행복부터 가르쳐라≫라는 저서를 인용함으로써 그녀가 말하고자 한 주제를 뒷받침할 뿐만 아니라 훨씬 더 풍부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수필 <행복부터 가르쳐라>는 제목부터 다른 사람의 책 제목으로부터 차용해 왔지만 상호텍스트성의 긍정적인 활용을 통해서 작품의 다양한 인상뿐만 아니라 내용상의 풍요로움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3. 영화 텍스트와의 상호텍스트성
선산곡의 <망각>이란 수필은 아예 이만희(1931-1975) 감독의 영화 <망각>(1967)에 대해서 쓴 글이다. 이만희 감독은 현실고발과 인생의 페이소스라는 두 가지 주제를 추구하며 독자적인 인생 해석과 뛰어난 영상미학을 추구해온 뛰어난 영화감독으로 평가된다. 그는 자신이 만든 50여 편의 영화를 통해 현실고발과 인생의 페이소스라는 두 가지 주제를 추구해 온, 영화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은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이알 112를 돌려라>와 같은 미스터리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 같은 스펙터클한 전쟁영화, <시장>과 같은 철저한 리얼리즘 영화, <만추>와 같은 뛰어난 영상미학의 작품, <삼포 가는 길>과 같은 삶에 심오한 존재의식을 투영한 작품 등…….
수필가 선산곡은 그 중에서도 신성일과 문정숙이 주연했던 심리극적 미스터리 영화 <망각>을 이만희를 대표하는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되는 <만추> 못지않게 잘 만든 영화로 평가한다. 그런데 영화의 주연배우가 아직 살아있음에도 정작 필름은 고사하고 포스터 한 장이나마 제대로 보존되지 못한 현실을 개탄한다.
영화의 주연배우가 아직도 멀쩡히 살아 있다. 필름은 고사하고 포스터 한 장이나마 보존해 두지 못한 주제에 예술문화 운운하기 창피한 노릇이다. 그것도 옛날 농촌에 농부들이 쓰던 밀짚모자 장식용으로 사라져버린 우리나라 영화필름들. 숱한 명작들의 허무한 소멸을 생각해 보면 아쉬움보다 먼저 치미는 게 분노다. 말이 옛날이지 불과 얼마 전 우리들의 무지가 빚어낸 일이었으니 할 말이 없다. 영원한 가치를 망각하여 잃어버린 작품들, 그 가운데 <만추>도 <망각>도 포함되어 있다.
-선산곡의 <망각>에서
우리의 기억 속에 아직 생생하게 남아있지만 그 어디에서도 영화 필름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어디 <망각>뿐이겠는가? <만추> 역시 리메이크 된 현빈과 탕웨이 주연의 김태용 감독의 영화 <만추>(2010)를 볼 수 있을 뿐 이만희 감독의 원본 필름이 보존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필자는 연령상 이만희 감독의 <만추>는 못 보고, 김수용 감독의 <만추>(1981)를 보았을 뿐이다.)
<망각>의 필름이 없어진 사례는 우리나라의 필름 보관의 현주소를 입증해 주는 한 사례에 불과하다. 일본인은 기록과 보존에서 정말 지독할 만큼 철저한 민족이지만 우리 민족은 기록과 보존에 무관심한 국민성과 전쟁 등으로 인해 꼭 보존해야 할 사료들이 유실된 경우가 어디 영화 필름뿐이랴? 영화의 경우 불과 몇 십 년 전인 1960년대 영화마저 필름이 보존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문화민족으로서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나마 요즘에는 디지털기술의 발전으로 사라져가는 필름의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이 복원도 원본이 존재해야 가능한 일이다. 원본이 없다면 디지털 복원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우리는 지난 시대의 뛰어난 명작들을 다시는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신상옥 감독의 영화 <빨간 마후라>(1964)와 박상호 감독의 영화 <또순이>(1963)란 영화가 지난해(2012)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디지털기술이 복원해낸 개가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디지털시대의 영화 복원과 보존의 정치학>이란 주제하에 제2회 부산영화포럼(BCF)(2012.10.8~10)이 열렸다. 한국영상자료원 보전기술팀의 손기수 영상복원전문가와 CJ파워캐스트 시네마사업부의 옥임식 팀장이 최근에 복원된 영화 <빨간마후라>(1964)와 관련된 사례연구를 발표하는 현장을 필자도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선산곡의 수필을 읽으며 외국 어디에서라도 <망각>, <만추> 같은 이만희 감독의 명작들의 필름 원본이 발견되어 디지털 복원을 통해서라도 관객들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빌어본다.
선산곡의 수필 <망각>은 영화 <망각>에서 치매 또는 기억상실과 같은 심리적인 망각의 문제로 잠깐 화제의 일탈이 이루어지는데, 이런 경우 오히려 영화 <망각>에 집중하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수필은 불과 15매 내외의 짧은 길이의 문학 장르이다. 정해진 토픽에 보다 집중하는 것이 때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수필 <망각>은 수필의 소재가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영화 <망각>과의 상호텍스트성을 통해 입증해 주었다.
4. 다른 문학텍스트와의 상호텍스트성
김양희의 <배소配所의 고독>은 유배의 섬인 남해의 ‘유배문학관’을 방문했던 경험을 적은 일종의 여행에세이다. 이 수필에는 남해로 유배 왔던 조선조의 문인과 그들이 지은 작품들이 텍스트로 들어와 있다. 즉 <화전별곡花田別曲>을 지은 자암自菴 김구(金絿, 1488-1534)와 한글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지은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은 인용되었다기보다는 그 자체로 수필 <배소配所의 고독>의 소재가 되고 있다.
김구의 <화전별곡>은 작가가 남해도南海島로 유배되어 갔을 때 그곳의 뛰어난 경치와 향촌鄕村의 인물들과 어울려 풍류를 즐기던 정서와 감회를 노래한 경기체가이다. 수필가 김양희는 김구의 시에 대해 “권력의 허망함을 너무 일찍 깨달은 자암은 귀양지의 절망을 오히려 초월적 문학정신의 경지로 승화시킨 것”으로 평가한다.
우리 고전문학사의 뛰어난 존재인 서포 김만중 역시 남해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일생을 마친 천재적인 작가이다. 그는 “자기 나라 말을 버려두고 남의 나라 말로 시문을 짓는다는 것은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다”라는 국어관을 토대로 과감하게 한문을 버리고 한글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지었다. 그 후 수백 년이 지나서야 한글 전용이 이루어졌지만 서포의 국어관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는 선구적인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야말로 뛰어난 작가일 뿐만 아니라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는 인물, 시대를 뛰어넘은 혁명적인 인물이다. 소설에 대해 비판적이던 조선조 사회를 향해 그는 소설의 독자적 의의를 적극 옹호했다. 즉 북송시대 소동파의 ≪동파지림≫을 인용하여 연의, 즉 역사소설이 역사보다 훨씬 구체적이면서도 호소력 있게 독자들에게 수용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소설이 경서나 역사서보다도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으며, 재미있게 읽힐 수 있다고 했다. 특히 역사소설은 과거의 사실을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역사에 비해 훨씬 큰 호소력, 즉 감동과 쾌감을 을 준다고 했다. 서포, 그는 중화주의에 사로잡혀 우리의 말과 글을 배척해온 조선조의 한문숭상의 제도에 대해 특히 비판적이었다. 그는 국어문학의 독자성과 가치를 ≪서포만필≫을 통해서 비평적 언어로 설파했을 뿐만 아니라 한글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직접 창작함으로써 국어문학의 독자적 가치를 증명해보인 혁신적인 작가였다.
수필가 김양희는 유배문학관에서 만난 김구와 김만중의 남해에서 보낸 유배생활의 절망과 아픔, 그리고 자신의 고통을 유배문학으로 승화시킨 그들의 예술혼에 대해 상상한다.
어두운 밤 깊어가는 적막 속에서 오래도록 책을 읽던 선비의 호롱불을 생각하며, 엄혹한 아픔을 몸으로 견뎠던 그 절망의 사념 속으로 들어가 본다. 단비처럼 내리는 쓸쓸한 평화는 물론 없을지라도 서책과 문학이 있었기에 기다림을 간직한 숱한 번민의 밤을 새울 수 있지 않았을까. 그 아픔의 시간들이 오늘날 활짝 핀 유배문학의 꽃으로 피어났다.
-김양희의 <배소의 고독>에서
그럼으로써 소재로서의 텍스트는 “인생은 유배다”라는 작품 전체의 주제로 그 의미가 확장된다.
인생은 유배다. 먼먼 나라에서 지구로 흘러 들어온 유랑민들. 근원적인 좌절과 고뇌를 벗어날 수 없는 우리네의 삶의 자리는 고독과 그리움의 가시로 위리안치圍籬安置된 유형의 섬이다. 결국 혼자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는 적막한 배소에서의 어둔 밤에 비유할 수 있음이다. 여행에서 돌아와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해 유배문학관을 돌아볼 때만해도 시대를 역행해 아픈 시간들을 견뎌야 했던 유배객의 설움만을 마주했었다.
-김양희의 <배소의 고독>에서
작가가 <배소의 고독>에서 인생을 유배라고 정의내리는 이유는 우리 인간이 근원적인 좌절과 고뇌를 지닌 존재이며, 고독과 그리움에 사로잡힌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평생을 좌절과 고뇌, 그리고 고독과 그리움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면 삶 자체가 유배와 다를 바가 없다는 뜻이다. 이처럼 다른 문학 텍스트는 한 작품의 소재가 되고, 나아가 주제를 결정하는 핵심적 요소로 중요한 의미기능을 획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배소의 고독>은 주제가 작품의 서두에 놓이고 조선조의 문인인 김구와 김만중이 예시로 사용되었다는 의미에서 연역적 구성을 하고 있다. 수필에서는 좀처럼 연역적 구성을 하지 않지만 이 수필에서는 서두에서 두괄식으로 작가가 유배문학관을 통해서 얻은 사색과 통찰을 분명하게 정리하고 예시로 들어감으로써 단순한 시간과 공간의 추이에 따라 쓴 단순한 여행에세이로부터 철학적 사색을 담은 에세이로 성격이 변화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작품의 말미에서 “겨울비를 맞으며 유배문학관을 돌아 나오던 날, 풀리지 않는 생각의 실마리들이 마음속에 크게 회오리를 쳤다. 그것은 남해바다의 성난 파도소리였을까.”라고 하여 독자의 마음속에게 여운을 남겨준다.
5. 나가는 말
≪수필과비평≫ 138호에서는 수필과 상호텍스트성이라는 관점에서 작품들을 선정해 보았다. 수필이 개인의 제한된 경험을 넘어서서 예술로서 그 세계를 확장하고자 한다면 상호텍스트성이라는 측면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다. 소재로서의 상호텍스트성은 물론이며, 담론양식의 다양화라는 측면에서의 상호텍스성 등 내용과 미학적 표현의 양 측면에서 상호텍스트성의 문제에 대한 수필가들의 관심이 촉구된다고 하겠다. 수필의 붓 가는 대로 쓰는 자유로움과 개방성, 혼성성과 같은 장르적 성격은 충분히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수필이 시나 소설과 같은 여타 장르와 나란히 문학적으로 경쟁을 하기 위해서는 내용적 깊이와 더불어서 표현적 측면에서도 새로움에 대한 시도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상호텍스트성의 적극적 수용도 그 방법의 하나가 될 것이다.
송명희 ---------------------------------------
부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국문학이론과비평학회’ 6대 회장 역임, ‘한국언어문학교육학회’ 회장(현), 해운대포럼 회장 역임, 달맞이언덕축제 운영위원장 역임. 부경대학교 우수교수업적상, 부경대학교 학술상, 이주홍문학상, 봉생문화상, 한국비평문학상 수상.
저서: 수필이론서 ≪디지털시대의 수필 쓰기와 읽기≫, 에세이집 ≪여자의 가슴에 부는 바람≫, ≪미주지역한인문학의 어제와 오늘≫, ≪권력과 젠더 그리고 몸≫, ≪타자의 서사학≫, ≪시 읽기는 행복하다≫, ≪소설서사와 영상서사≫, ≪여성과 남성에 대해 생각한다≫ 외 저서 및 논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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