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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 비평 2012년 1월호, 사색의 창] 달력을 품다 - 임영숙

신아미디어 2012. 2. 27. 08:23

 

달력을 품다

   은행잎이 하나 어깨에 슬그머니 떨어져 내린다. 지나가는 길을 알고
잎은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앙상한 가지를 드
러낸 은행나무를 본다.
   새 달력을 받아들고 새로움이란 단어 앞에 멍해지고 있었다. 한 해를
맞느라고 잎을 다 지운 은행나무는 새로운 다짐으로 서 있다. 다 지운
다음 새 희망과 새 각오로 서 있는 나무를 보다가 조금 전에 받은 새
달력을 손으로 다시 움켜쥔다. 나에게도 뭔가 움켜쥘 새 다짐이 있어야
했다.
   한 해의 마무리를 재촉이라도 하듯 은행, 서점, 꽃집, 병원 등 여기저
기서 새 달력이 날아든다. 갖가지 디자인을 선보이며 달력은 관심을 끌
려고 애쓰지만 달력을 받아 든 마음은 그렇게 편한 것만은 아니다. 새하
얀 바탕에 분칠을 한 말쑥한 차림의 담담한 숫자가 가지런하다. 서로
보람 있는 날을 차지하려는 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질서를 지키며 총총
히 줄을 섰다.
   새로운 해를 맞는다는 희망에 부풀어 새 달력을 구하기에 분주했던
날들이 스쳐 지나간다. 새 달력을 남들보다 먼저 받아들고 아무도 걷지
않은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기쁨을 꿈꾸었다. 칼칼한 달력의 날
짜를 눈에 익히며 손도장을 찍듯 펜으로 하나씩 동그라미를 엮어가며
마음에 새로운 희망을 심었던 일들이 먼 기억처럼 삼삼하다.
   무엇을 할까. 새로운 것을 계획하고 공휴일을 찾아 상상의 나래를 펼
쳤던 일이며, 생일은 어느 달 무슨 요일에 있을까 하는 사소한 일들까지
도 호기심과 설렘으로 다가섰던 지난 시간이 그리워진다. 새로운 첫발
을 내딛는 새해의 아침 하늘이 이제는 마음을 붙잡기는커녕 어지럽게
흩트려놓는다. 나이를 하나 더 먹는다는 어떤 서글픔 때문인지도 모른
다며 나이 먹어감에 공연히 탓을 댄다.
   새로운 것이 전혀 새롭지 않다. 변화하는 세상에 혼자 동떨어진 듯
공허하다. 새 달력을 넘기는 일조차 지레 겁을 먹는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미리 걱정하듯 새날을 맞기도 전에 진작부터 사서 걱정을 하고 있
는 꼴이 낯설다. 보다 진취적인 사고와 적극적인 자세는 다 어디로 갔을
까. 숱한 날짜 앞에서 망설이며 오히려 뒷걸음질이나 하고 있으니 달력
속의 날짜가 늪이며 벼랑길 같다.
   한 잎만 달랑 달고 있는 나무처럼 마지막 한 장만 남아 간들대는 쓸쓸
한 달력에 마음이 머문다. 하나라는 단어 속에 숨어있는 모두가 하나
되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하나인 자신만을 바라보려 하니 한 장이란
단어가 혼자, 홀로처럼 괜스레 씁쓸하다. 지나쳐 온 날들은 도둑맞은
시간인 양 아득하게 보인다. 시간의 노예로 등 떠밀리며 살아오지 않았
던가. 이런저런 생각에 끌려 스쳐 지나간 시간을 두고 아무도 듣지 못하
는 넋두리를 한다.
   필름이 되돌듯 지나간 시간들을 돌이켜 본다. 가물가물한 시간 속에
다행히 스케줄 관리를 도맡아 해 주던 탁상달력이 지나간 발자취를 듬
뿍 안은 채 기억하고 있다. 365일이란 길고도 짧은 시간을 고스란히 담
고는 속삭이듯 그날그날의 기억을 메아리처럼 되뇌어 준다. 까마득하던
시간이 달력 속에서 부스스 눈을 뜬다.
   빨갛게 덧칠한 커다란 별표 하나가 상처마냥 달력에 묻어 있다. 다시
돌이켜보니 물거품이었던 것을, 쓴웃음을 날리며 별을 어루만지자 붉은
별은 부끄러운 듯 사라진다. 행여 달아나기라도 할까 동그라미로 묶어
놓은 흥겨웠던 날들도 할 일을 마친 듯 원을 그으며 달아난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각진 놈들도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며 동그라미 틈에 끼여 숨
어버리고 만다.
   새옷처럼 반가웠던 새 달력이지만 마음에 착 달라붙지 못하고 있다.
세월에 따른 마음의 변화 탓인지 모른다. 오래된 친구가 편하듯 익숙한
시간들이 좋아진다. 유난히 따스한 봄날 같았던 지는 해를 마냥 붙들고
싶다. 아무 탈 없이 지나쳐온 시간들이 감사하다. 빽빽이 들어앉은 일상
같은 날들이 탁상달력에 그나마 머물러 있어 다행이다. 차곡차곡 모아
서 먼 훗날 되돌아보며 은근히 미소 지을 백발의 할머니가 된 나를 그려
본다.
   비워야 아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가르침을 나무가 타이른다. 가
진 것을 깨끗이 내려놓고 겸허한 마음으로 새로운 시간 앞에 무릎을 꿇
어야겠다.
   달력의 날짜들은 겉으로 보기에 같은 숫자놀이를 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다른 표정이며 생각을 품는다. 달력이 새로운 변
화를 꿈꾼다는 생각을 한다.
   달력은 달력에 눈을 팔고 있는 나를 아는 듯하다. 새날을 준비하려는
마음이 달력 안에서 은근히 분주하다.

 

임영숙 ---------------------------------------------------
2009년 ≪수필과비평≫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