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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 비평 2011년 1월호, 사색의 창] 삶기와 우려내기 - 유혜자

신아미디어 2012. 2. 27. 08:19

삶기와 우려내기

   20여 년 전 고 김옥길 총장 댁에서 여성방송인들을 식사에 초대한
일이 있었다. 소문대로 평양냉면과 빈대떡이 주메뉴였는데 먼저 나온
따끈한 빈대떡을 서둘러 먹는 중에 맑은 육수에 담긴 냉면이 나왔다.
면을 알맞게 삶도록 지켜보며 부엌에 계시던 총장님이 들어오셔서
“어서 냉면부터 먹어요. 불면 맛이 없어요.” 하고 냉면 먹기를 재촉하
셨다.
   그 무렵엔 금아 피천득 선생님 댁도 문우들과 1년에 두어 번 방문했었
다. 평소에 다른 손님이 오면 구석방에서 꼼짝하지 않으신다는 사모님
께서 거실로 차를 내오셔서 방송인이었던 큰아드님 얘기하기를 즐기셨
다. 말씀을 나누기 전 홍찻잔의 티백을 건져낸 것을 보신 금아 선생님은
안타까워서 다시 찻잔에 넣으라시며 말씀하셨다.
   “홍차는 알맞게 우려내는 것이 중요해요.”
   그때 일을 떠올리면서 이제는 두 분이 다른 세상에 계시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섭섭해진다. 앞의 경우는 면을 알맞게 삶아서 고들고들하고
탄력 있는 것을 들게 하는 배려였고, 뒤의 경우는 적당한 시간에 제대
로 우려내서 떫은맛이 없는 홍차 고유의 맛과 향을 즐기도록 하는 권
유였다.
   나는 음식 만들기엔 서툴지만 먹는 것은 맛있는 것을 탐한다. 도시생
활에 고달픈 내게 피곤이 겹치거나 건강상 위기가 닥치면 어릴 때 맛있
게 먹던 음식 맛이 생각난다. 연한 배추토장국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런
데 알맞게 자란 배추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솎음배추는 한때뿐이고,
실팍하게 길러서 좋은 상품으로 만들어서 팔려는 농민들의 마음이 당연
하다.
   오늘도 알 배고 탐스런 배추만 놓여 있는 채소가게 앞을 지나면서 생
각해 보았다. 세월이 지나고 보니 김 총장님이나 금아 선생님께서 맛을
위해서 주의하고 배려했던 것이 비단 음식 맛에만 한했던 것이 아니었
으리라는 생각이다. 우리는 태어날 때 제각각 타고 나는 소질과 재능이
있을 것이다. 그런 타고난 것들을 최대한 살려서 발휘하라는 교훈적인
메시지를 느낄 수 있다. 실제로 두 분은 인생을 성공적으로 사신 분이었
기에 그런 해석을 하게 된다.
   김옥길 총장은 40세에 이화여대 총장이 되어 패기와 열정으로 18년
동안 재직하면서 이화여대를 세계 제일의 여대로 발전시킨 분으로 알려
졌다. 총장취임 후 심각한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교수 감원을 단행했
던 일화만으로도 그의 냉철한 판단력과 추진력을 짐작할 수 있다. 사무
직원 한 명에게 흰 운동화를 신겨 특수 임무를 맡겼다. 어느 기간 동안
온종일 암행어사처럼 강의실 상태를 점검하게 한 것이다. 15분 늦게 강
의실에 들어오는 교수도 있고 매번 5분 일찍 강의를 끝내는 이, 또 대신
조교를 강의실에 보내어 적당히 시간을 때우게 하는 경우 등을 종합,
심사해서 감원을 단행하고 항의하러 오는 교수에게 해임사유를 내밀어
꼼짝할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한다.
   금아 선생님은 김 총장님처럼 배짱이 있고 저돌적이며 적극적 성격의
소유자는 아니다. 온건하여 남과 겨뤄서 쟁취하기보다 남을 배려하고
자신에게 엄정하며 은은한 삶을 사셨다고 할까. 서울대학교 정년을 6개
월쯤 앞두고 퇴임을 강행했다. 주변에서 임기를 채워서 연금을 제대로
받으시라고 하자 후배 교수와 제자들을 위해 그 학기에 그만두어야 한
다면서 미국에 있는 따님 서영이를 만나고 싶다고 미국으로 떠나셨다고
한다. 홍차를 알맞게 우려내야 하는 것처럼 문필생활에도 절제를 하셨
다. 60세를 넘기고 나서 쓸 수 있는 최고에 이르렀다 싶은 생각이 들어서
절필을 고집하셨다. 청탁에 쫓겨 덜 우려낸 차처럼 멀건 글을 쓰지 않고
자신을 관리한 엄정함에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격동의 시절, 변화무쌍한 세월을 살아내면서 우리는 울분의 시간과
절망에 부딪치면서도 부끄럽지 않게 살았던 이들을 우러러보며 위안을
삼았었다. 새해 설계를 하면서 지난 시간의 과오와 무능으로 용기를 잃
고 있던 내게 또 다른 위로가 필요한 생각이 든다. 모든 이들이 삶기와
우려내기 타이밍을 잘 맞춰서 완벽한 삶을 누릴 수는 없으리라. 서투른
이가 있기에 완벽한 솜씨가 높여지고, 또 완벽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의
목적이 생기지 않을까.
   이런 일화도 있다. 양쪽에 항아리를 매단 물지게로 물을 긷는 이가
있었는데 왼쪽 항아리에 금이 가서 집에 오면 물이 반 항아리밖에 남지
않았다. 왼쪽 항아리가 주인에게 미안해서 주인에게 자기를 버리고 새
것으로 바꾸시라고 했더니 주인이 대답했다.
   “나도 네가 금 간 것을 알지만 바꾸지 않겠다. 내가 지나온 길을 보면
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오른쪽 길은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메마른
곳이지만, 네가 지나온 왼쪽 길엔 예쁜 풀꽃들이 자라고 있지 않니. 너로
하여 자라는 아름다운 생명을 나는 매일 기쁘게 보고 있단다.”
   모든 사람들이 완전하고 허점이 없기를 바란다. 부족한 능력이나 허
점을 부끄럽게 여기고 열등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러나 잘나고 완
벽한 사람들 때문에 삭막해지기도 할 것이다.

지치고 외로울 때, 작지만 넓은 품을 가진 정자를 찾아가 차 한 잔의
맛을 서서히 음미하며 성급하고 졸속한 시도를 하지 않으리라는 새해
설계도 잊지 않으리라.
   지치고 외로울 때, 작지만 넓은 품을 가진 정자를 찾아가 차 한 잔의
맛을 서서히 음미하며 성급하고 졸속한 시도를 하지 않으리라는 새해
설계도 잊지 않으리라.

 

유혜자 ------------------------------------------------------

1972년 ≪수필문학≫ 등단.
수필집: ≪자유의 금빛날개≫, ≪사막의 장미≫ 등 7권.
음악에세이: ≪음악의 정원≫, ≪음악의 에스프레시보≫ 등 4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