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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 비평 2012년 1월호, 연재/새로 꾸는 꿈 - 5회] 가족 - 임만빈

신아미디어 2012. 2. 24. 08:10

 

가족

 자식들이 왔다. 아들은 서울에서, 딸 가족은 용인에서 왔다. 내가 수술
받았다고, 간단한 수술이니 퇴원하면 오라고 해서, 이제 온 것이다. 그것
이 부모의 마음인 것 같다. 아무리 중한 병의 수술이라고 하더라도 자식들
에게 힘들고 위험한 수술이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자식들을 만나니 반갑다. 특히 외손녀는 아무리 울고 도망쳐도 붙잡
아 품에 안아보고 싶고, 젖내 나는 말간 몸에 뺨을 비벼대고 싶다. 가족
이라는 것이, 피붙이라는 것이 그런 모양이다.
   아플 때는 마음이 약해지는 것 같다. 쓸데없는 공상도 한다. ‘내가 없
어진다면?’ 딸의 결혼생활에서의 변화, 아들의 장래, 그리고 아내에게
일어날 일들을 생각해 본다. 딸은 친정이라는 등받이가 없어졌다는 외
로움을 느낄 것 같다. 누군가 무조건 응원해주고 훈수를 떠 줄 기댈 수
있는 벽이 와르르 무너진 느낌, 유리벽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마음속
에 튼튼히 쌓아놓았던 벽, 등받이가 없어진 것을 확인하고는 허탈감에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장인, 장모를 모두 떠나보냈을 때를 생각해 본다. 그때 절감했던 것은
무거운 책임감과 아내의 애처로움이었다. 두 분이 살아 계실 때에는 그
래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내가 없어도 누군가 아내를 돌보아 줄 사람이
있는 것만 같았다. 두 분이 모두 돌아가신 후에는 하늘 아래 누구도 그녀
를 편들고 돌보아 줄 것 같지 않은, 외로운 작은 새처럼 그녀가 보이기도
했었다.
   퇴원하라고 하니 울던 할머니 환자가 생각난다. 파열된 뇌동맥류를
수술했던 환자였다. 회복된 상태여서 회진하다가 퇴원해도 괜찮다는 말
씀을 드렸다. 할머니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연신 훔쳤다. 돈 때문에 우느
냐고 물었다. 얼토당토않다고 대답하셨다. 돈은 걱정할 것 없다고 옆에
있던 며느리도 거들었다. 퇴원한 후 한참 만에 며느리가 아닌 딸이 할머
니를 모시고 왔다. 딸은 이곳에서 한참 떨어진 소도시에서 살고 있었다.
할머니에게 물었다. “지금까지 딸하고 지내셨습니까? 며느리가 그렇게
잘해 드린다고 말씀하신 것 같은데…….” “며느리가 잘해 주기는 해 주
지. 그렇지만 영감 없는 집에서 혼자 살기가 그래서…….” 할머니는 그
렇게 곤곤한 신세를, 변명하고 또 훌쩍거리셨었다. 내가 사라졌을 때
아내가 아프면 그 할머니처럼 행동하며 살아가지 않을까? 가슴이 아리
고 쓰라리다.
   아이들이 모처럼 왔으므로 운문사에 가자고 아내가 제안한다. 수술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운전하는 것이 거북하다. 도착하니 점심시간이
다. 식당 안은 손님들로 꽉 차 활기에 넘친다. 마루의 창가에 빈자리가
있어 앉는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볕이 마룻바닥에 붉은 주황색 구획
을 만들어 놓고 있다. 그곳에 내가 앉도록 아내와 딸이 주선해 준다.
햇볕이 머리, 어깨, 왼쪽 몸통 반쪽을 감싼다. 왜 그리 따뜻한지. 어릴
적 고향의 사랑방에서 보았던 그 따뜻한 햇볕, 문종이로 바른 문의 중앙
에, 바깥에 누가 오는지 알아보려고 붙여 둔 조그만 유리창을 통해 쏟아
지던 햇살, 노란 왕골 자리 위에 만들어 놓았던 한 자락의 밝은 빛, 그
햇볕은 너무나도 안락한 포근함과 따뜻함을 가지고 있었다.
   정말로 그 햇볕을 그냥 두는 것이 아까웠었다. 솜털이 솟아 있는 팔뚝
을 햇볕 속으로 밀어 넣으면 솜털은 한번씩 황금빛으로 빛났었다. 세파
에 시달리기 전의 깨끗한 손등을 그곳에 얹어놓으면 햇볕은 얇고 얇은
피부를 뚫고 빨간 홍시의 색깔을 빚어내곤 했었다. 특별히 할 일이 없었
던 나는 그것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한동안 포근함에 젖어 있기도 했
었다. 싫증이 나면 구멍 뚫린 양말을 신은 발을 그곳으로 밀어 넣고 구멍
으로 삐져나온 발가락을 꼬무락꼬무락 움직이면서 온기를 즐기기도 했
었다.
   몸에 쏟아지는 햇볕을 즐기는 동안 주문한 메기매운탕이 나왔다. 식
당 벽에 메기는 고단백의 물고기로 칼슘, 철, 비타민 등이 풍부해 수술
후 회복기에 유용하다는 설명이 붙어있다. 어릴 적 메기를 잡던 기억들
이 떠오른다. 시냇물 흐르는 내에서 조무래기들이 두 손으로 진흙을 깊
이 파면서 흩어 가면 어쩌다가 미끈거리는 메기를 만날 수는 있었다.
잡으려고 움켜쥐면 꼬리를 한 번 힘차게 휘두르고는 너무나도 쉽게 우
리들 손아귀를 빠져나가곤 했다. 너무나도 아쉬웠었다. 그렇게 메기를
잡는다는 것이 힘들었었다. 단지 백중날 힘센 머슴들이 논가에 있는 우
물을 품어낼 때에만 드물게 수염을 길게 늘어트린 메기를 잡을 수가 있
었고 메기매운탕을 맛볼 수가 있었다.
   입 안에 매운탕 국물을 떠 넣으니 달콤하다. 국물 위에 뜨는 기름을
보니 수술 후 몸의 회복에 도움이 될 거라는 확신이 선다. 고기 많이
먹고 원기를 회복하라고 아내가 자꾸만 고깃덩어리를 들어내 내 그릇에
담는다. 딸도 사위의 눈치를 흘끔흘끔 보면서 역시 고기를 내 용기에
담는다. 매운탕 국물을 입 안에 떠 넣을 때마다 가족의 사랑이 느껴져
눈두덩이 시큰거린다.
   산사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겨울이어서인지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
다. 산사에서는 청아함을 느낀다. 차갑고 싸늘한 날씨, 해맑고 청량한
공기, 잎을 떨어뜨린 나무들의 쓸쓸함, 산속이라는 정적, 그리고 여승만
있다는 점이 더욱 산사의 분위기를 깨끗하게 만든다. 여승만 보면, 수녀
만 보면 애틋함이 솟아오른다. 승복과 파리한 머리를 보면, 수녀복과
머리를 감싼 베일을 보면 삶의 의미를 생각하곤 한다.
   절의 경내에 들어가니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두 딸과 어머니인
듯한 노인이 두 손을 모으고 대웅전 부처님을 향해 공손히 경배를 드리
고 있다. 법당 안을 기웃거리니 몇 분이 부처님에게 절을 하고 있다.
저 경건한 모습,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무릎 굽혀 허리를 굽히며 바닥
에 손을 대고 머리를 조아리는 행위 속에는 수많은 바람이 숨어있을 것
이다. 그 바람의 중심에는 가족이 있을 것이다. 피붙이 말고 누가 저렇게
온 정신을 집중하여 누구를 위한 바람을 부처님께 빌어 올리겠는가.
   우리 가족도 부처상을 보고 많은 생각을 할 것이다. 자신을, 다른 가족
을, 그리고 내 건강을 걱정하고 회복되기를 바랄 것이다. 그래, 힘을 내
자. 내 가족들도 저들처럼 나를 위해 절실한 기도를 마음속으로 하고
있지 않겠는가? 가족을 보아서라도, 나를 위해서라도 한 번 더 용기를
내자.


 

임만빈 -------------------------------------------------------
2006년 ≪에세이문학≫을 통해 등단.
수상: 제1회 보령의사수필문학상 은상, 제1회 대한의사협회 수필공모 우수상.
수필집: ≪선생님, 안 나아서 미안해요≫(2007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우수문학도서)
≪자운영, 초록의 빛깔과 향기만 남아≫(2011년 제4회 의사문학상 수상)(일반 수필 부문).
(현) 대구 매일신문 의창(醫窓) 공동 집필 (2008 ~ 현재).
(현) 계명대학교 의과대학 신경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