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대한 추억
오늘따라 창밖의 햇볕이 유난히 나를 유혹한다. 어디라도 훌쩍 떠나
고 싶은 마음 누를 길 없어 창문을 열고 맑은 공기를 마셔 본다. 멀리
보이는 북한산 봉우리들이 마치 연인이라도 되는 듯이 내 마음을 흔들
고 있다. 잠시 추억에 잠긴다. 지난날 남편과 함께 올랐던 저 북한산,
그때의 추억이 애틋한 그리움이 되어 되살아나고 있다.
남편과 나는 주말마다 등산을 즐겼다. 등산은 건강과 즐거움을 함께
지켜 주는 운동이다. 산에 오를 때는 힘이 들고 숨이 차지만 산을 다
올랐을 때의 기쁨은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다. 더구나 혼자가 아니라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등산이라면.
나도 젊었을 때는 골프도 하고 수영도 했다. 그러나 어느 운동에도
푹 빠져 본 적은 없었다. 나이 들면서 근교의 산을 찾게 되었고, 등산
외의 다른 운동에는 거의 눈을 돌리지 않았다. 어느 사이에 산에 푹 빠져
버렸기 때문이다. 예순을 넘기고부터는 산만 보면 가슴이 설레기 시작
했다. 등산은 내게 운동이라기보다 차라리 연인과의 만남과 같은 것이
되었다.
산을 오르다가 물통을 든 노인들을 가끔 만난다. 산에 푹 빠지기 전이
다. 오르는 것도 힘이 드는데 물통까지 메고 다니는가 싶어, “힘들지 않
으세요?” 하고 물으면, “아니요, 힘이 더 생기지요.” 라고 대답한다. “산에
서 길어 온 약수를 한번 마셔 보세요. 보약을 먹은 것같이 기운이 생겨
요. 우리 집사람은 병원에서도 못 고친 다리를 산에 오르면서 고쳤지요.”
라고 한다. 노인은 우리에게 산에 자주 오기를 권했다.
어느덧 남편과 나는 주말이면 정해 놓은 약속처럼 북한산을 즐겨 찾
게 되었다. 구기동에서 시작해 승가사를 목표로 올랐다. 그때만 해도
길 옆 군데군데 커피도 팔고, 국밥과 비빔밥을 팔기도 해서 출출하면
도중에 간단한 요기를 했다. 산에서 먹어보는 음식 또한 일품이다. 계곡
의 물소리와 울퉁불퉁한 바위, 발밑으로 느껴지는 돌들의 촉감조차 정
답게 느껴졌다. 숨이 차 몸을 잠시 나무에 기대며 하늘을 바라본다. 수목
향이 코로 정겹게 스며든다. 파란 하늘에는 구름 한 점이 한가롭게 떠
있다. 마치 우리의 등산을 환영이라도 하는 듯이. 그럴 때면 나는 남편에
게 행복한 눈길을 보내곤 했다. 남편도 알았다는 듯이 눈을 끔뻑 했다.
차츰 산에 매료되면서 다음부터는 북한산 구석구석을 누벼보리라는
다짐도 했다. 주말이 되면 제일 먼저 등산복을 꺼내 놓는다. 차려입고
나서면 멋과 즐거움을 함께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북한산을 처음 올랐
을 때는 그렇게도 어렵게만 보였던 정상이었지만 결국 백운대의 깃발을
만져보며 성취감을 맛보기도 했다.
금강산을 올랐을 때의 그 감동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금강
호를 타고 떠날 때부터 한껏 마음이 부풀어서 풍선을 타고 있는 기분이
었다.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어 앉았다 섰다만 되풀이하고 있
었다. 마치 달나라에라도 온 듯이 긴장감이 내 온몸을 감돌고 있었다.
미지의 땅을 밟아보는 짜릿한 긴장감이었다. 아 그렇다. 우렁찬 바리톤
으로 가슴을 뒤흔드는 ‘그리운 금강산’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계곡에 흐르는 물은 쪽빛 물감을 풀어 넣은 듯 맑고 깨끗했다. 손이라
도 담가보고 싶었지만 일행에 쫓겨 그냥 갈 수밖에 없었다. 괴암절벽과
멋들어지게 팔을 펼치고 있는 노송들을 바라보며 꼬불꼬불한 산길을 올
라간다. 비디오를 이리저리 돌리며 아름다운 광경을 놓칠세라 부지런히
담아본다. 구룡폭포의 힘찬 물줄기와 폭포 뒤에 수줍은 듯이 숨어 있는
다섯 개의 옥루탕을 비디오에 담아본 것은 정말로 나만의 작품인 듯싶
었다.
다음날 만물상을 보고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말을 잊었다. 말만 듣고
사진으로만 보던 일만 이천 봉, 우리의 금수강산이 몇 천만 년을 웅장하
고 아름다운 자태로 버티고 있었다. 우리뿐 아니라 우리의 후손들에게
도 보여줄 영원한 장관壯觀, 나는 걷는 발자국마다 감동을 싣고 조심스럽
게 걸었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다는 옛시조를 되새기며 가파
른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굽이굽이 조각한 듯이 서 있는 저 괴석들,
내가 화가라면 화폭에 꼭 담고 싶은 절경이다. 그래서 예부터 유명한
선조 화가들이 이 금강산을 즐겨 그렸던 것일까. 오르는 발자국 하나하
나에 느껴지는 이 아쉬움은 또 무엇인가? 너무나 그리워했던 안타까움
때문인가?
드디어 정상, 시원한 바람과 푸른 하늘이 내 가슴을 훅 트이게 한다.
일렁이는 마음을 진정하고 멀리 동해바다에 외로이 떠 있는 조그마한
섬 하나를 비디오에 담아 아쉬움을 남기고 하산했다.
금강산의 이모저모를 내 욕심껏 비디오에 담아보았지만 그 감동까지
어찌 담을 수 있으리. 집에 와서 다시 보니 지난날의 무성영화를 보는
듯 그때의 감동이 살아나지 않는다. 다만 구룡폭포의 맑고 깨끗한 물소
리만 내 귀에서 쟁쟁하게 울리고 있다. 어느덧 금강산도 내 아름다운
추억의 앨범이 되고 있는 것인가.
산을 자주 올랐던 일이 이제는 추억처럼 되었다. 벌써 산에 오르기보
다 바라보기를 더 좋아하고 있으니. 아마도 나이 탓이리라. 오늘도 북한
산 봉우리가 나를 손짓하며 부르고 있다. 나는 미소를 머금고 그에게
화답한다. 번잡한 세사에 시달려 머리가 무거우면 이따금 산에 오르기
도 하지만 전 같지 않다. 언제 올라도 산은 변함없이 나를 반겨준다.
산은 철따라 변하는 자연의 모습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봄이면 따사로
운 볕에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들을, 여름이면 수목향이 그득한 짙은
푸름을, 가을은 색깔의 조화를 과시하는 듯 다채로운 단풍잎을, 겨울은
겨울 대로 맵고 싸한 시련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산은 우리를 품어주는
그 넉넉한 가슴 때문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내 인생의 사계四季를 산에
서 느끼면서 나는 이렇게 속삭인다. “산은 내 인생의 스승, 산에 오를
때마다 그 넉넉한 가슴에 안기며 그 따뜻한 마음을 배운다.”라고.
오늘도 산의 가르침에 따라 따스한 마음으로 남을 사랑해야지. 북한
산 봉우리를 향하여 손을 흔들며 내 남은 삶도 산처럼 넉넉하게 살 것을
다짐한다.
원정순 -------------------------------------------------------
경기도 이천 출생. 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이화여자대학교 경영연구소 수료. 이화수필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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