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시간의 변주곡
바람은 사나워지고 비까지 퍼붓는다. 가는 곳이 곧 길이 된다던 몽골
의 초원. 그 길 위에서 생기와 열정을 찾고 싶어 가방을 꾸렸다. 초원에
서의 정취는 아주 각별할 것 같은 기대를 안고 인천공항에 당도했다.
6~7월이 성수기이고 이맘때쯤 나담 축제가 열리는 기간이라 몽골로 향
하는 여행객들이 의외로 많았다.
오후 7시 30분발 출국 수속을 밟으려 대기 중이다. 인솔자가 없는 관계
로 여행사 직원의 안내를 기다렸으나 어쩐 일인지 감감무소식이다. 시간
이 흐를수록 잦아지는 동료들의 두리번거림에 한껏 부풀어 올랐던 내
마음마저 별안간 불안감이 차올랐다. 한참을 기다려도 우리 중 누구의
이름도 부르지 않는다. 동행할 팀은 이미 게이트를 빠져나갔는데 우리만
처져있다. 시간은 촉박한데 아직 티켓도 받지 못하다보니, 여차하다간
비행기를 놓칠 것 같아 직원에게 서둘러 달라고 부탁했다. 우리들의 이
름을 대조해 보던 직원의 반듯한 머리가 좌우로 연신 갸웃거리는가 싶더
니 아뿔사. 여권이 접수되지 않았단다. 그럴 리가. 아침만 해도 분명 지
역여행사로부터 일괄 처리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지 않은가. 그런데 난데
없이 여권이 분실되었다고 하니 참으로 어이가 없고 황당했다. 여행에
대한 설렘은 어느새 혼란스러움으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도 국내에 명성 있는 여행사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지 납득
이 가지 않았다. 사실 여권을 분실했다는 말보다 오늘 당장은 몽골을 갈
수 없다는 낭패감에 더욱 맥이 풀렸다. 인파 속에서 탑승 게이트 안으로
촘촘히 빠져나가려던 우리들의 모습은 환영이었던가.
그동안 끝없이 펼쳐진 초원을 동경하고,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이 가슴
으로 후두둑 떨어지는 상상을 하면서 이 날을 기다려 왔다. 여행일정을
조정하고 며칠간의 부재로 인해 쌓여 갈 일거리들을 앞당겨 해 놓느라
여간 고심한 게 아닌데, 이런 차질이 생기다니 이 무슨 변고란 말인가.
무의미한 시공을 채우고 있는 공항의 공기를 가로질러 여행사 담당자
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행사 측에선 최종점검 후 인계하지 않고 휴무
에 들어간 직원의 실수라며 연신 사과를 했다.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변명 같았다. 개인의 사소한 실수로 용인하기에는 그들의 업무체계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인생을 좌지우지할 만큼 아주 중요하거나 다
급한 일로 이번 비행기를 꼭 타야만 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 막대한
피해를 어떻게 감당하려는 것인지, 점점 지금 상황의 심각성을 확대해
석하다 보니 왁자하고 소란스러웠다.
당황한 우리만큼이나 그들도 안절부절못하며 이곳저곳을 수소문하고
계속 전화를 해댔지만 명쾌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여객기는 우리
의 바람을 저버리고 빗속을 가르며 휑하니 날아갔다.
망연자실. 공항에 온전히 버려진 참담한 기분이었다. 그들의 무책임
에 분노가 일었다. 하나 언성을 높여 항의해본들 소용없는 일이었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의 가능성을 열어보기도 했지만 문제는 여권을 찾는
일이 급선무였다.
패닉상태인 고객들을 바라보는 그들의 속도 꽤나 탔을 텐데 침착하고
태연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아주 공손하게 차선책을 내놓았다. 동남아
와 제주여행을 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여행경비는 일체 여행사 측에
서 부담하겠다고. 하지만 이미 불신의 골이 자리 잡고 있는 터라 다른
여행상품에 대한 이야기는 귀에 들어올 리가 만무했다. 한시바삐 여권
을 되찾아, 갈 수 있다면 오로지 몽골행을 원할 뿐이었다.
창가엔 억수 같은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심드렁하게 배를 내민 가방을 그들이 마련해준 호텔 방에 가둬놓고
밤거리로 나왔다. 이 미적지근한 기분을 단번에 날릴 수 있는 것이 필요
했던 일행에게 혀끝을 톡 쏘는 불닭과 알싸한 소주는 우리의 기분을 전
환시키는 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도드라진 감정이 시원한 빗줄기에 차
츰 누그러지자 이 또한 여행에서 체득하는 묘미가 아닌가 싶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어디든 떠나야만 했다. 연이 닿지 않는 곳이라면
미련을 떨칠 줄도 알았다. 게다가 여행사에서 제주도여행을 보상책으로
마련해준다니 그것으로나마 위안을 삼기로 했다. 설혹 여권이 분실되어
찾지 못하더라도 그들의 방안이 있을 터. 괜한 기우는 버리고 국내선을
타기 위해 부지런히 김포공항으로 갔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더니. 뒤숭숭했던 어제의 일들을 말끔히
털어내고 어느새 우리는 제주도의 비경을 들먹이며 희희낙락했다. 그리
고는 출구로 나가기 위해 대열에 나란히 섰다. 제주행 비행기가 이륙하
기 딱 15분 전이었다.
그때였다. 여행사 측에서 연락이 왔다. 여권을 찾았단다. 오늘 저녁시
간대엔 몽골행 비행기도 탈 수 있다고 한다. 순간 머리가 멍해왔다. 겨우
마음의 평정을 찾았는데 또다시 혼란이 일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제주
도가 아닌 몽골여행을 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갑자기 일사천리로 짐을
찾기 위해 우르르 몰려가 수화물 확인서를 받고, 곧 이륙하는 비행기를
잠시 지체시켜 가방을 찾고, 이층에서 일층으로 지하로 숨 가쁘게 뛰어
다녔다. 얼마나 마음 졸이며 뛰어다녔는지 등줄기에 땀이 흥건했다.
다시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탔을 때는 급작스런 소식에
있는 기운을 죄다 소진해 버렸는지 모두들 지친 모습이다. 마치 누군가
의 조종에 의해 타고, 내리고, 또 타고, 내리고를 반복당하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주변을 휘둘러 보았다.
하루 24시간. 그동안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에 우리의 모습은 참으로 다양했다. 더러는 논리적인 사고로
예시를 들며 항의를 했고, 더러는 즉흥적인 직관으로 몰아세우기도 했
다. 완벽하기를 원했고 섬세하기를 종용했다. 심적·물리적 피해에 합
당한 보상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 우리의 모든 소리까지 당연한 듯 공손히 듣고 있는 그들이 한편
으로는 안쓰러워보였다. 비에 흠뻑 젖기도 하고, 끼니를 거르면서도 우
리의 비위를 맞추느라 안간힘을 쓸 때는 이 시대 가장의 모습을 보는
듯 마음이 쓰였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여유를 가지고 초연하게 대처했더라도 지금
의 결과와 같았을까. 항의에 따른 그들의 어쩔 수 없는 처방이라면 씁쓸
하기 그지없지만, 애당초 여행사 규정에 따라 처리될 것이었다면 좀 더
아량 있고 느긋한 모습 보여주지 못한 것 같아 부끄럽다.
어쩌면 그 시간에 떠나서 만나는 모든 것들은 우리와의 인연이 아니
었던 게다. 그래서 이렇게 하루를 비껴가는지도 모른다. 이보다 더 놀랍
고 기묘한 일들이 우리 앞에 턱 하니 나타난다면 우린 또 어떻게 그 난관
을 감당해야 할지 생각만 해도 오싹하다.
이제 되었다. 한시름 놓았다. 저녁이면 그토록 기대하던 몽골, 그 넉넉
한 대자연의 품으로 가게 된다. 이 번잡한 상념과 지친 심신을 초원 위에
혼곤히 풀어 놓을 수 있게 된다. 위로받으리라. 야생화의 향기에 갇혀
오래도록 평온하리라.
이동이 -------------------------------------------------------
2000년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바람개비의 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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