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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5월호, 세상마주보기] 고지리 - 소진섭

신아미디어 2013. 6. 21. 08:19

"어릴 적 마을 벌판을 가로지른 기찻길은 꿈의 연장선이었다. 저 기차를 타고 가면 서울의 좋은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희망에서다. 그러나 지방에서 그 기차를 타고 6년간 통근을 하고 말았다. 해 질 무렵이면 소모는 아이들의 시끌시끌한 소리와 초가 지붕 굴뚝에서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청솔가지 타는 매캐한 연기가 그립다."

 

 

 

 

 

 고지리   -  소진섭


   내 고향 고지리古池里는 조상의 숨결이 깃든 작은 민속 박물관이다. 객지생활을 하니 마음은 항상 어머님 품속 같은 그곳에 머물러 있다.
   정자나무 밑에서 줄부채를 흔들며 덕담을 나누던 어른들의 모습이 추억 속에 다가온다. 흙담벽 모퉁이를 돌 적마다 기울어질 듯한 싸리문이 정겹다. 마을에 좁은 뒷골목을 누비며 병정놀이를 하던 친구들은 어디로 갔는지…….
   초가지붕 위에 박이 덩그렇게 달려 있고 빨간 고추가 멍석자리에 그득하게 널려 있다. 추석에는 온 마을엔 부침개 부치는 참기름 냄새가 풍겨나고 풍물 소리에 어깨춤이 들썩거렸다. 거북이놀이를 하려고 수수 잎을 따서 엮던 동심의 세계는 세월 속에 묻혀 버렸다.
   이제는 고향의 향수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다. 현대문명의 발달로 마을 단위가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아파트 단지에서 피자를 즐겨 먹는 요즈음 애들은 내가 자랐던 마을의 정취를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어쩌다 시골에 내려가면 부모가 살았던 생활의 단면을 볼 뿐이지 따듯한 인정이 풍기는 삶을 피부로 느끼지 못한다.
   정월 보름엔 잿간에 수수깡으로 만든 보리 모형을 세워 두고 풍년을 기원하며 타작 흉내를 냈다. 해 뜨기 전에 어정쩡하게 잠에서 깨어난 육촌형한테 더위를 팔다가 당숙모에게 혼난 생각은 잊을 수가 없다. 깡통에 구멍을 뚫어 관솔을 담아 불을 붙여 휘휘 내저으며 쥐불놀이를 하다 이웃마을 애들과 패싸움을 하기도 했다. 가을걷이가 끝난 집안에 무고안택無故安宅을 비는 굿떡을 몰래 가져다 먹기도 했다. 그때 뜨거운 시루떡에 손끝을 데어 쩔쩔매고 도망치던 마을 골목길이 그리워진다.
   마을은 풍수지리상으로도 훌륭하다고 어른들이 말씀하셨다. 뒷동산 정상에서 좌우로 펼쳐진 나지막한 산 앞에는 시냇물이 굽이쳐 흐르다가 보이지 않으며, 소가 배불리 먹고 누워 있는 형상이다. 길조의 날개가 앞 벌판에 퍼져 있으며 앞산 너머에는 차령산맥인 서운산瑞雲山이 우뚝 솟아 있어 조산의 기를 받쳐준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으나 불행하게도 나는 그 정기를 받지 못했다.
   고향 마을은 사백여 년의 전통적인 농경생활로 민속이 이어졌고 삶의 지혜를 터득하며 오순도순 살아온 곳이다. 그러나 역사의 숨결은 안식처마저 숨통을 조여왔다. 일제는 마을의 단결력인 대동성大同性을 해친다고 민속문화를 없애려는 정책을 쓰기 시작했다. 농촌의 민간 신앙으로 조상숭배 사상인 제식과 기우제 등을 미신이라고 몰아붙이고 산의 정기마저 끊었다.
   서구문명은 전통의식에 영향을 끼쳐 삶의 가치관을 많이 바꿔 놓았다. 이런 가운데서도 토박이 집단에선 생활문화인 민속을 이어왔다. 특히 공동노동을 위한 풍물, 두레들과 무속의례인 굿놀이에 의해 시간을 즐기는 슬기를 길러왔다. 내 고장 안성은 남사당 풍물놀이가 전국에서 으뜸이었다. 어렸을 때 추석을 지내고 나면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한 차례 풍물놀이를 했다. 그중 우물을 빙글빙글 돌며 “뚫어라 뚫어라 샘 구멍만 뚫어라.”를 외치며 풍물을 치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어릴 적 마을 벌판을 가로지른 기찻길은 꿈의 연장선이었다. 저 기차를 타고 가면 서울의 좋은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희망에서다. 그러나 지방에서 그 기차를 타고 6년간 통근을 하고 말았다. 해 질 무렵이면 소모는 아이들의 시끌시끌한 소리와 초가 지붕 굴뚝에서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청솔가지 타는 매캐한 연기가 그립다.
   샛길 언덕에 피어난 들국화를 꺾어 들고 이웃집 재숙이와 자주 놀았다. 잔디 줄기를 뽑아 손톱 끝으로 물을 짜내어 방울 싸움을 하던 것이 엊그제같이 느껴진다. 시대의 변화는 풍물을 치며 논을 매던 풍습은 사라지고 기계 소리가 들녘에 울려 퍼지고 있다.
   요즈음은 조상마저 조용히 잠들 수 없는 환경이 되어 있다. 벌초를 할 적엔 제초기 굉음에 깜짝 놀라 일어날 지경이다. 무엇이 그리 바쁜지 먼저 간 코흘리개 친구들이 저녁 햇살을 담뿍 받으며 조용히 누워 있다. 철모르는 아이들이 무덤을 오르내리며 신나게 놀고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사뭇 느끼게 한다.

 

 

소진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