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수필과 비평/수필과비평 본문

[수필과비평 2013년 5월호, 세상마주보기] 빙판氷板길 반성 - 류인석

신아미디어 2013. 6. 19. 08:21

" 살면서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자빠진 경험 없이 살아온 사람 누가 있을까……. 한 번도 실패 없고, 후회 없이 살아온 사람은 또 누가 있을까……. 잘못을 시인하고 반성하면, 잘못이 오히려 인생의 거울이 되고 성공의 동력이 된다. 잘못을 잘못이 아니라고 우겨대면 더 큰 병폐, 더 큰 잘못이다. 진실이 알고 정의가 심판한다. 넘어진 것을 계기 삼아 당당하게 일어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좌절을 딛고 성공한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빙판氷板길 반성   -  류인석


   설 다음날 아침이다. 비몽사몽 작취미상의 혼돈한 정신을 다스리기 위해 일찍이 걷기운동에 나섰다. 아파트단지 후문을 지나 서대전역 뒷길로 이어지는 골목에서 난데없이 나뒹구는 망신을 당했다. 고층건물들 때문에 하루 종일 햇볕조차도 외면하는 그늘진 도로인데다, 테니스장에서 밀어낸 눈 더미가 녹아내려 군데군데 지난밤 강추위로 만들어진 빙판이다. 입춘도 지났건만 아직도 어깃장 부리며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을 지키고 서 있는 동장군의 심술에 계사년 정초부터 그만 내가 당했다.
   얼떨결에 툭툭 털고 얼른 일어섰지만, 서대전역을 오가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에 지은 죄 없이 공연한 부끄러움이 뜨겁다. 어떤 아주머니는 짓궂게도 “나도 보았다.”라는 듯이 “다친 데 없으세요?” 묻고 호들갑을 떨어주니, 못 본체 곁눈질이나 하며 지나치는 몰인정보다는 고맙지만, 정초아침부터 빙판에 나자빠진 늙은 마음 더욱 괴망하고 민망스럽게 만든다. 또 어떤 이는 대놓고 말은 없지만 속으로는 “이 추위에 늙은이가 아침부터 주책없이 빙판길 나돌다 자빠지고 극성이냐.”라며 책망의 눈빛을 던지는 것도 같아 심사 더욱 사나울 수밖에…….
   아무래도 평탄치 못할 계사년 한 해의 재수를 예고하는 것 같은 불길한 상념 무겁게 짊어진 채 2시간 동안 걷기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이었다. 설날 마셨던 주독은 많이 가벼워졌지만, 아직도 얼얼한 엉덩이통증을 어루만지며 자빠진 빙판길에 다시 들어선다. 자빠진 자리, 빙판길을 보고 또 본다. 빙판길을 원망하랴, 내 잘못을 자책하랴, 다른 사람들은 아무 탈 없이 무사히 오가는데 나만 혼자 자빠졌다면 과실은 분명 내 몫임을 반성한다. 옛 같지 않게 둔화된 육체동작 생각 없이 방심한 내 잘못이지…….
   사노라면 자빠지고 넘어지는 길이 어찌 빙판길뿐이던가. 험상궂은 산악길도 있고, 평탄한 들길도 있다. 또 캄캄한 암흑의 길도 있고 광명천지 해밝은 길도 있다. “인생 삶은 길 걷는 것과 같다.”라고 비유한 석학도 많다. 서울로 가는 길, 부산으로 가는 길 등 육체적으로 걸어야 할 형이하학形而下學적 길도 많지만, 파탄의 길, 성공의 길, 영광의 길, 승리의 길, 행복의 길, 불행의 길, 학문의 길, 탐구의 길 등 정신적으로 걸어야 할 형이상학形而上學적 길도 많다. 그 많은 인생길 모두가 잘못하면 넘어지고 자빠지는 길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길은 모두가 희로애락喜怒哀樂과 영고성쇠榮枯盛衰로 반복되는 길이다. 밝고 고운 아침햇살 받으며 누가 해 질 녘 쓸쓸함을 생각한단 말인가. 아무 준비 없이 나선 길에서 소낙비를 만날 줄 누가 생각이나 할까. 미리부터 자빠질 것을 예상하고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 자청해서 자빠지는 사람도 없다. 부지불식간의 잘못 때문에 자빠지고 상처 나고 고통받고 후회하길 거듭한다. 한번뿐인 인생, 고귀한 인생을 곧잘 떠들면서도 하찮은 돌부리에 넘어지고 빙판길에 미끄러지기 일쑤다.
   돌아보면 내가 살아온 길도 예외는 아니다. 순간의 방심 때문에 넘어지고 자빠지고 뒹굴고 상처 나고 고통받기 부지기수다. 내 잘못 때문에 애매한 남들까지 함께 자빠지고 뒹군 경우도 있다. 그때마다 깨닫기도 하고 다짐도 해보건만, 시간 지나면 다시 또 자빠지고 뒹굴기를 반복하는 게 너나없는 우리들의 인생사다. 자빠지고 뒹굴면서 생겨나는 육체적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치유되지만, 순간의 착각과 욕심에 걸려 인생 전부를 자빠뜨리고 넘어뜨리는 정신적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
   가끔 정부 각료후보자들의 인사청문회 장면을 TV에서 본다. 욕심의 덫에 걸려 총리나 장관자리 문턱에서 넘어지고 뒹굴고 망신당하는 사람들이 많다. 빙판길에 넘어져 엉덩이 조금 아픈 정도의 내 잘못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또 높은 권력 등에 업고 부정비리유혹에 넘어져 패가망신하는 사람들도 본다.
   살면서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자빠진 경험 없이 살아온 사람 누가 있을까……. 한 번도 실패 없고, 후회 없이 살아온 사람은 또 누가 있을까……. 잘못을 시인하고 반성하면, 잘못이 오히려 인생의 거울이 되고 성공의 동력이 된다. 잘못을 잘못이 아니라고 우겨대면 더 큰 병폐, 더 큰 잘못이다. 진실이 알고 정의가 심판한다. 넘어진 것을 계기 삼아 당당하게 일어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좌절을 딛고 성공한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나 또한 자빠진 자리 빙판에 대고 눈 흘기면서도 반성한다. 미처 생각지 못한 또 한 가지 삶을 배우고 깨닫는다. 빙판 위에서 자빠진 것은 빙판의 잘못이 아니고, 절대 내 잘못이다. 또 내가 자빠지는 것을 보고, 남들에게 경종이 되어 더 이상 그 자리에서 자빠지는 사람이 없으면 그 또한 교훈이고 인연되는 삶의 길이 아니겠는가. 자빠지고 얻은 빙판길 반성이다.

 

 

류인석  -----------------------------------------
   수필집: ≪어제, 그리고 오늘≫ 등 1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