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해명 선생이 타계하신 지 1년이 흘렀다. 교육자로 수필가로 활동하셨던 선생은 생전에 틈틈이 시를 써오셨다. 이에 선생의 수필세계와 시세계를 통해 다시 한 번 선생의 문학정신을 추모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참 아름다운 세상
구세군 자선냄비가 거리에 등장했다. 그들은 작은 종을 흔들며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우리와 더불어 살고 있음을 생각하라고 한다. 그래서 작은 종소리는 큰 여운이 되어 모두의 마음으로 퍼져나간다.
그 종소리를 들으면 내가 넘긴 일 년을 돌아보게 되고, 감사한 마음이 된다. 많은 어려움과 굴곡이 우리 둘레에서 일어났고 밀려갔는데 그 회오리 속에서 건강하게 지치지 않고 걸어왔으니 얼마나 고마운가. 남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해도 더불어 살아온 우리 이웃들이 함께했기에 가능했으리라.
일 년을 넘기기에 너무도 고달프고 지친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세상의 모진 바람을 모두 맞으며 보내고 있다. 그들도 희망과 사랑을 나누는 이웃이 있어 고통을 극복하며 오늘에 섰을 것이다. 나는 남에게 줄 것도 없고 받지도 않는다고 생각하기보다 감사한 마음만으로 서로의 빈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이웃으로 설 수 있다면 이 겨울은 그렇게 춥지만은 않을 것이다.
물질적인 도움으로도 메울 수 없는 외로움도 따뜻한 말 한마디로 채워줄 수 있다. 그런 이웃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구세군 자선냄비의 종소리를 그런 나눔의 내일을 지니라는 사랑의 종소리로 들린다.
며칠 전 어느 뷔페에서 K를 만났다. 그의 밝고 명랑한 얼굴을 보면서 그가 전에 이야기가 생각이 나서,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것이 얼마나 따뜻하고 아름다운 것인가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어느 겨울방학 때였다. 학생들이 음성 꽃동네로 봉사활동을 떠난다고 하기에 나도 따라나선 것인데, 그날 아기들만 사는 집에서 우연히 K와 마주쳤던 것이다. 그날 그와의 해후로,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지울 수 없는 감동의 종소리로 지금까지 내 마음에 여운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그가 교장으로 근무할 때였다. 환갑을 맞았는데, 환갑을 같이 할 사람도 없고, 또 갈 곳도 없었다. 남편이 타계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슬하에는 자손이 없는 처지고 두 분 모두 북에서 월남한 사람들이이서 친척도 없는 처지라 선생님들 앞에 그런 외로운 모습을 보여주기가 싫었다. 그에게 주어진 일주일 휴가를 해외여행을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고 나니 어디고 가야하는데 막상 혼자 갈 곳이 없었다. 그는 갑자기 고아가 된 기분이었는데 그때 음성 꽃동네가 생각이 났다. 버림받고, 상처입고 외로운 사람들이 사는 곳, 그래서 무작정 차를 몰고 들어온 곳이 이 아가들의 집으로 오게 되었다. 책임 수녀님을 만나 자신의 입장을 이야기하고 이곳에서 며칠 쉬고 가도 되겠느냐고 하자 쾌히 승낙을 했다. 자신의 처지가 너무 외롭게 느껴져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챘는데, 새벽에 성당에 가자고 수녀님이 깨워서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섰다.
성당에 들어서자 신부님께서 환갑을 맞는 자신을 위한 생미사를 집전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성당에 가득 모인 수도자며 수녀며 많은 직원들이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는 자신을 위해 기도를 바쳐 주고 있는데 너무 고맙고 놀라워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다시 수녀님과 함께 아기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또 생각지도 못했던 조촐한 환갑상이 차려져 있었다.
수녀님과 직원, 봉사자들이 자신을 위하여 상을 마련하고 함께 축하해주는 따듯한 마음에 그만 또 울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이 빈 마음을 가득 채워주던 따뜻하고 진심 어린 사람의 손길이 정말 감동적이고 벅찬 기쁨을 안겨주어 생각지도 못했던 멋진 환갑을 맞고 가장 값진 환갑여행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그때를 이야기하며 눈물을 글썽였었다. 그 뒤부터 일요일이면 이곳에 와서 아기들을 돌보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남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려고만 했던 그래서 허기져 있던 자신의 빈 마음이 남에게 사랑을 베풀면서 비로소 가득 차옴을 체험한다고 했다.
“남을 사랑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즐거운 일인가를 가르쳐준 이곳 식구들이 있어서 나는 혼자가 아닌 것 같아.”
나는 지금도 그가 들려준 가슴 따듯한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외로운 사람들로부터 위로받으며 가장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따듯한 사랑으로 가슴을 채우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늘 남을 돕는다고 하면서 도리어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참 아름다운 세상과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닌지.
시간의 작은 방울
걸려 있는 수액주머니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는 수액을 바라본다.
떨어지는 작은 방울들이 연속적으로 떨어져 내 몸으로 들어가고 그 수액이 모두 들어가려면 한밤을 지나야 한다는 것을 안다.
혈관이 나오지 않아 내 팔에 꽂은 주사바늘은 24KG이다. 아기에게 주사를 할 때 쓰는 바늘이다. 그나마도 중간에 혈관이 터져서 다시 바늘을 통해 바뀌는 수액주사 바늘을 그 바늘 가운데로 넣어서 계속 주사를 맞게 하는데 내 경우는 그조차 할 수 없어 팔다리가 바늘자리로 말이 아니다. 수액이 들어가는 속도도 다른 사람의 두 배는 길다.
무료한 시간이면 나는 그 수액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고통을 잊으려고 한다.
세종대왕이 만든 물시계의 원리도 저렇게 떨어지는 물방울을 24시간 1440분 86,400초 등으로 구별하여 떨어지는 것으로 시간을 알게 하고 하루의 흐름을 짐작하게 한 것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모래시계도 한정된 시간을 잴 때 그런 원리를 이용하여 작은 구멍으로 흘러내리는 모래의 높이에 따라 시간을 재는 것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점으로 떨어지는 순간들의 강줄기다.
너무 오래 들어가는 수액이 짜증이 나서 빨리빨리 들어가기를 바라다가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천천히 들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생각을 바꿔본다.
시작이 있었으니 끝이 있게 마련이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것이 마치 시간이 째깍째깍 가는 기분이기도 하다. 저 수액이 다 들어가면 수액주머니는 아무 가치도 없이 버려지게 된다. 사람도 수명을 다하면 수액주머니가 비듯 영혼이 빠진 빈 주머니로 버려질 것이다.
나는 얼마큼 살아왔을까? 물론 많은 시간을 보냈으니 반 넘어 수액이 빠져나간 주머니처럼 내 삶도 내 삶의 주머니에서 빠져나갔을 것이다. 남은 수액이 빨리 빠져나가기를 조바심한다는 것이 내 삶의 남은 시간을 조바심한다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하니 갑자기 마음이 씁쓸해진다.
아직 남아 있구나. 아직도 내게 시간이 존재하는구나, 종언을 하기까지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할 시간이.
나는 마지막 떨어지는 수액 방울을 바라보며 긴 수액 줄의 흐름을 막을 것이다.
지금 나는 병상에 누워 있다.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다시 삶을 회복하기 위해 병상에 누워 있다. 되돌리기도 싫지만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또 혈관이 터져 수액이 피부로 새어나와 부어오르고 있다. 간호사를 불러 바늘을 빼고 다시 혈관을 찾아 내 팔과 다리를 검색 당하고 드디어 또 다른 어느 곳에 바늘을 꽂는 데 성공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두렵다. 그렇게 해서 겨우 혈관을 찾아도 얼마 가지 않아 또 혈관이 터질 거라고. 좀 전에도 그랬다. 혈관을 찾지 못하고 “안 되겠어요.” 하고 간호사가 포기한 상태로 남은 수액이 매달아 놓고 병실을 나가버렸다. 주사로부터 자유로워진 팔을 흔들며 만족하는 사이 중간에 버려지는 저 수액처럼 사고에 의해 숨을 잃는다는 것은 저런 경우와 같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억울하고 속상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인생이란 그런 경우도 있다. 나는 끔찍한 교통사고에서 살아났으니 내 운명은 다시 혈관을 찾아 꽂힌 수액주머니 같다고 생각하자.
다시 간호사를 불러 다리 복사뼈 위에 바늘을 꽂고 겨우 수액이 몸 안으로 들어갈 길을 열어 놓았다.
나는 서두르지 않고, 조바심대지 않고 천천히 흐르는 대로 바람처럼 지나는 시간을 바라보고 싶다.
이번에는 눈을 감고 해시계를 생각한다. 언젠지도 모르게 조바심도 생각나지 않게 바람이 이끄는 그림자로 조금씩 알게 모르게 지나가는 시간.
각박하게 바라보지 않아도 감으로 짐작하며 짐작으로 묻어가는 시간. 그래 넉넉한 그림자의 시간을 바라보자.
남들에게는 넉넉한 시간을 나는 왜 혼자 떨어지는 물방울을 의식하듯 조바심을 대며 불안하게 서둘러 살아온 것인지?
떨어지는 수액이 몸속으로 다 들어가자 눈을 감는다. 빈 주머니로 걸려 있는 수액주머니. 내 삶도 죽음도 하느님의 것이었음을 새삼 확인한다. 그리고 오늘은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다.
간호가가 들어와 내 팔을 살핀다.
“아직도 주사 맞을 수액이 두 가지가 남아있는데 어떡하죠?”
남아있다는 말에 나는 혼자 미소를 머금는다.
어디에서 와서
계절이 나무는 벌거벗은 꾸미는 의상衣裳 없어도 영하零下의 부벼대며 정情은 지열地熱로 포동하게 탐스러운 바람에 실려 오는 꿈이 아니라 멀리 아득한 기원에서 나무는 타오르는 사랑으로
햇살이 졸음에 겨운 한낮 추억이 엉거주춤 산모롱이를 돌아 가버린 날들. 간이역
몽골 시편 8
낮에는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고
밤이면 겔에 누워 별을 보며 칭기즈칸을 마셨네
은하수가 전갈 꼬리를 적시는 걸 보며
모래바람에 벌거벗고 춤을 추었네
전생에 꾼 꿈을
오늘에야 확인하였네
낙타 타고 사구를 오르며
비로소 내가 허깨비인 줄 알았네
안경을 끼고 안경을 찾는 자여
미망을 만들며 미망을 벗어나고자 하는 자여
내가 너이고
네가 바로 나이다
어둡고 아둔하여
눈은 있으나 앞 못 보는 청맹과니
열 번 죽었다
열 번 깨어나도
아득한 물음
어디로 가고 있는가
겨울 그리고 나무
돌아서서
침묵하는
순간에
사랑을
한다
얼지 않는
생명
대지에서는
꽃으로 전하는 언어가 필요 없다.
서로가 함께하는
맑고 산뜻한 공기와
비스듬한 햇빛으로
모둠하는
체온이면
눈짓으로도
눈 속에 큰다.
물오른 뿌리가
겨울의 뒤뜰에서
촉촉이 엉겨 잉태한
움은
소망
눈 속에서 오히려 다사롭다
참고 견디는
미덕
멀리 아득한 존재로
이어지는 선線
그래서
역사에 서고
계절은
다시
되돌아선다.
간이역
초가집 울타리 사이에서
주춤거리던 기차가
바람만을 태우고
뛰어간다.
안부를 묻고 싶은
그날처럼
바람이 고무신 벗어들고
기차를 따라간다.
외줄기 시골 기찻길
해 질 녘
가버린 기차를 기다린다.
변해명 ----------------------------------------------------------
1975년 ≪한국문학≫ 등단. 1976년 ≪소년 중앙≫에 동화 당선. 부평문학회 2대 회장과 대한교원총연합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고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부회장, ≪한국수필≫ 고문, 도봉문화원 수필 강사 등으로 활약했다. 수필집 ≪외로운 영혼에 불을 밝히고≫, ≪그리운 곳의 빈자리≫, ≪정바리기≫, ≪숨겨진 시간의 지도≫, 기행수필집 ≪길 없는 길을 따라≫, ≪옛 그림 풍속에세이≫, ≪잊혀져가는 우리 풍습≫, 수필선집 ≪그림자 춤≫ 등 다수. 현대수필문학상, 한국수필문학상, 신곡문학대상, 한국문학상, 월산 수필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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