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과 낙조, 이들은 하나의 끈의 두 끝이다. 두 끝은 끝내는 하나의 원으로 돌고 돈다. 지구의 자전이 고맙다. 지구자전이 없었던들 이런 대립과 모순, 그리고 유전은 없었을 것이니. 하기에 황혼이요 조락의 가을을 상징하는 낙조에도 어김없이 어둠을 거친 뒤의 여명의 밝음이 있다. 땅에 떨어진 열매의 씨앗이 봄이면 싹트듯이. 아름답게 핀 꽃은 꽃비 되어 떨어져야 비로소 열매 맺을 수 있음 같이."
여명·낙조, 그 사이 - 김상희
-하나의 세계로 버무렸으면
가끔은 하늘도 심심할까. 하루에 두 번, 미답未踏의 원시림같이 깨끗한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린다. 새벽녘엔 진하고 밝은 색깔의 오일 페인팅으로, 어스름 저녁이면 좀은 가라앉은 크레파스로.
이름하여 ‘여명’과 ‘낙조’. 이 빛의 하늘잔치가 어느 날 갑자기 소리가, 그것도 천둥이 되어 나를 압도했다. 아니, 실신시켰다. 일상을 뛰어넘은 충격은 감각조차 초월하는가. “끝이다!” “끝이다!” 마지막 햇살이 외친 이 시각의 청각화, 그것은 찰나였지만 내게는 영겁처럼 길게 느껴진 아픔이었다.
국토의 최남단 ‘땅끝[土末]’에서 바라본 낙조는 지금도 잊지 못할 감동사건이었다.
청나라로 사신 따라간 연암燕巖은 갑자기 펼쳐진 끝없는 초원에서 “참으로 그럴듯한 울음터이로다. 내 오늘에야 비로소 인생이란 아무것도 의탁할 것이 없이 머리에는 하늘을 이고 발로는 땅을 밟은 채, 떠돌아다니는 존재인 것을 깨달았다.”라고 ≪열하일기≫ ‘도강록’에서 실토했다. 초원과 울음의 멋진 연상.
얼마 전, 어둑 저녁의 낙동강 강변에서 벌어지는 낙조를 바라보면서 나는 또 경이와 몰입의 경지에 빠져 들었다. 들판에는 극의 피날레처럼 어둠의 인자들이 촉촉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가는 것에의 아쉬움과 슬픔 같은 흔들림은 있었지만 여명처럼 들뜨지는 않았다. 마음이 편안했다. 엄숙하고 경건한 평화가 나를 에워쌌다. 씨 뿌리는 농부 부부만 거기 있었더라면 미상불 밀레의 <만종晩鐘> 그것이었다. 기도라도 드리고 싶은 나는 하루의 종말에 대한 사유와 성찰을 씹고 또 씹었다. 우둔한 소의 반추처럼.
여명과 낙조를 대비해 본다. 여명은 하루를 여는 새벽 무렵에 일어난다. 농도 짙은 색깔로 호화찬란하고 변화무상하여 열정과 역동이 넘쳐난다. 화려·찬란·광란의 역동이 어둠을 물리치며 밝은 세상을 열어간다. 빛의 영상이 무지막지 구름과 더불어 벌이는 대향연이다. 따라서 사람들에게는 희망과 생기의 상징으로 회자하기도 한다.
반면, 낙조에는 흥분하지 않는 관조와 성찰이, 또 사라져 가는 것에의 잔잔한 아쉬움과 애절함이 진득이 묻어난다. 하루를 마감하며 낙일하기 때문에 추락이나 종말을 의미하기도 하여 어쩐지 애수가 묻어나는 어휘이다. 비탄과 정한을 붉게 토해내며 서서히 추락하는 낙조, 그것은 사라짐의 교향곡 <비창悲愴>이다.
여명과 낙조, 이들은 하나의 끈의 두 끝이다. 두 끝은 끝내는 하나의 원으로 돌고 돈다. 지구의 자전이 고맙다. 지구자전이 없었던들 이런 대립과 모순, 그리고 유전은 없었을 것이니.
하기에 황혼이요 조락의 가을을 상징하는 낙조에도 어김없이 어둠을 거친 뒤의 여명의 밝음이 있다. 땅에 떨어진 열매의 씨앗이 봄이면 싹트듯이. 아름답게 핀 꽃은 꽃비 되어 떨어져야 비로소 열매 맺을 수 있음 같이.
헤라클레이토스는 “올라가는 길은, 내려가는 길의 하나로서 같은 것이다.”(“만물은 유전流轉한다.”에서)라고 하여 ‘하나의 사물 속에 대립하는 모순의 유전’을 지적했다. 어떤 평론가는 ‘하나의 끈의 끝과 끝을 잡아매면 원이 된다.’라고 쉽게 말했지만…….
여명을 지나고 낙조에 들어선 내 삶은, 어떤 값을 치러야 여명과 낙조를 버무르는 융합의 혜택을 누릴 수 있을까, 아니,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김상희 ----------------------------------------
월간 ≪수필문학≫ 추천완료(1993). 수필집: ≪열매열전≫ 외 3권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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