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작가와 그의 작품 전체를 조망하는 글을 준비하는 중에 바로 그 당사자가 떠나고 말았다. 영원히. 작가의 사후에 제대로 된 평가들이 나온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이 글은 라대곤 사후의 첫 번째 평가가 될 것이다. 객관적 평이 될 것임은 자명하다."
고통을 딛고 일어선 정신의 영광 - 호병탁
1.
≪수필과비평≫에서 라대곤의 창작집 11권을 내밀며 작가와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 글을 써달라고 청탁해왔을 때 처음엔 사양했다. 작품론이야 누구의 글이 되었든 작품의 정독을 통하여 쓸 수 있지만 작가론은 작가와 개인적 교분이 있어야 제대로 쓸 수 있는 것이고 그렇지 못한 나로서는 아무래도 무리인 듯싶어서였다.
물론 작가와는 여러 차례 행사에서도 만났고 술자리도 함께했다.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악수하였다. 잔을 권하기도 했으며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언제나 다른 문인들과 더불어서였다. 그의 글도 여기저기 문예지나 보내온 작품집에서 산발적으로 읽었지만 평을 쓸 정도의 집중적인 독서는 없었다.
발행인과 편집장의 압력에 굴복해 무거운 책 보따리를 들고 와 우선 수필집 하나와 소설집 하나를 읽기 시작했다. 직설적이고 스피디한 그의 글은 한마디로 가독可讀성이 높았다. 더구나 수필들은 자신의 실제 생활과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어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손에 잡히는 것 같았다. 작가론을 쓰는 것도 가능하다는 느낌이 왔다.
본격적인 독서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며칠도 지나지 않아 작가의 부음이 전해졌다. “라대곤 선생님 4월 15일 11시 50분 별세하셨습니다.” 군산의 윤규열 소설가로부터 전화문자로 날아 온 짧은, 그리고 유일한 부고였다. 한 작가와 그의 작품 전체를 조망하는 글을 준비하는 중에 바로 그 당사자가 떠나고 말았다. 영원히.
작가의 사후에 제대로 된 평가들이 나온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이 글은 라대곤 사후의 첫 번째 평가가 될 것이다. 객관적 평이 될 것임은 자명하다.
2.
라대곤의 문학세계는 한마디로 자신이 겪은 지난 일에 대한 기억과 회상의 질긴 끈에 잇대어 있다. 모든 문학작품이 장르를 막론하고 어느 정도의 과거에 대한 반추는 있게 마련이지만 라대곤의 작품처럼 유별나게 자전적 경험의 기억과 강한 연결고리를 맺고 있는 것은 보기 힘들다.
그런데 그가 회상하고 반추하는 과거의 대상은 기쁨의 순간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뼈아픈 시간의 흔적인 ‘상처’가 대부분이다. 그 상처는 우리가 흔히 공유할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 즉 연인, 가족, 친구와의 이별, 그리고 그에 따르는 그리움 혹은 외로움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또한 여러 사회적 제도가 만드는 경쟁구도에 있어서의 불합격, 탈락, 그리고 이에 따르는 실망, 낙담 등과도 거리가 있다. 그가 외면적으로 견디기 힘든 싸움을 벌이고 그 결과 내면적으로 피를 흘려야 했던 상처는 훨씬 파괴적이고 폭력적이다. 이는 일반사람이 느끼는 상처의 아픔과는 다른 특별한 것이다. 이런 파괴와 폭력의 힘이 큰 상처일수록 그 흔적은 더욱 선명하고 깊게 각인된다. 그리고 그가 흘린 피는 곧바로 그의 작품세계에 붉게 젖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연보를 대충 훑어보아도 그의 삶은 가히 ‘소설적’이다.
작가는 1940년 군산에서 태어났다. 바로 김제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가난한 유소년 시절을 보낸다. 본인이 직접 글에서 밝히고 있는 이 신산한 시절의 얘기를 보자.
생각해 보면 내 어린 시절은 너무도 가난했다. 농사꾼도 아닌 아버지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내 출생지인 시에서 가산을 정리한 돈으로는 논 몇 마지기를 사서 시골인 군으로 이사를 하셨다.
시골집은 방이 두 개 있었다. 한 방은 아버지 차지였고 나머지 하나가 우리들 방이었다. 작은 방에서 팔남매가 모두 함께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방 가운데에 검정 이불을 깔아놓고 사방으로 누워 다리를 뻗다보면 형제들의 발이 엉켜서, 가려워서 긁다보면 남의 다리를 긁는 경우도 있었다. 장마철에 썩은 서까래 물이 흙벽을 타고 내려와서 방바닥은 곰팡이로 얼룩지고 퀴퀴한 냄새가 몸에까지 스며들어 비위가 상할 때는 집이 아니라 원수였다.
-<이사>, 수필집 ≪내 가슴속의 수채화≫ 부분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작은 방 하나에 팔남매 모두가 함께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는 위의 인용문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어려운 환경에서 유년시절을 견뎠는가를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같은 글에서 작가의 부친은 “전학할 거리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더 좋은 집으로 가는 것도 아니면서” 자주 이사를 다닌다. “비포장 도로 위를 소달구지에 살림을 싣고” 이사를 다니다 보니 “장독대 위에는 성한 단지가 없”을 정도였다. “새집이랍시고” 이사 간 곳은 “채송화 몇 포기 심을 뜨락도 없는 작은 집이었을 뿐”이었다. 작가는 이 글에서 고백한다. “덕분에 내 어린 날은 동심이 메마른 삭막한 날들”이었다고.
작가가 청년이 되어 군대에 간 후에야 아버지의 ‘이사병’은 끝이 났다. 처음 시작했던 군산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이후 그의 삶의 무대는 바로 이곳이 되고 작품의 모든 사건이 발생하고 서사가 이루어지는 곳도 이곳 군산이 된다.
3.
작가가 본격적으로 창작활동을 시작하는 것은 1993년 ≪수필문학≫에 <고향집 감나무>라는 수필을 발표하면서부터이다. 이듬해 ≪문예사조≫에 단편소설 <두창이와 연주의 합창>을 발표하며 소설가로도 데뷔하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995년 수필집 ≪한번만이라도≫와 소설집 ≪악연의 세월≫을 한꺼번에 발간한다. 그의 나이 50대 중반에 이르러서이다.
이때가 되어서야 그는 사업에 크게 성공하여 경제적 성취를 거두고 자신이 겪었던 고난의 삶을 반추하고 작품으로 형상화시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후 왕성하게 작품을 발표하고, 책을 상재하고, 문단의 주요 직책을 맡고, 수많은 문학상을 수상한다.
그렇다면 그가 자신의 문학세계를 견인하고 있었던 과거의 삶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작가와 자주 만났던 문인들을 만나 이것저것 묻고 확인했다. 작가는 자신이 겪었던 많은 일들을 예의 솔직담백한 어투로, 특히 술자리에서 자주 토로한 것 같다. 여러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것을 그대로 옮길 수는 없다. 본인이 아닌 제삼자를 통한 전언이기 때문이다. 말이라는 것은 상황에 따라 과장과 축소가 있을 수 있는 법이고 자칫 당사자의 명예에 누를 끼칠 수도 있다. 본인이 직접 쓴 글의 행간을 살피는 눈초리가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작가는 많은 수필을 남겼고 수필은 고백적인 글이다. 한 사람의 냄새가 그대로 물큰 풍기는 글이 수필이다. 특히 라대곤의 문체는 자신의 체취와 감정을 적나라하게 노출시키는 스타일이어서 그가 감내해야 했던 청장년 시절의 파란도 고스란히 손에 잡힌다.
이 시절, 그의 기구한 삶도 ‘소설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작가는 남들은 기피하는 군대를 자원까지 해서 갔다. 그 연유와 당시 그의 심경을 보자.
팔남매의 차남이었던 나는 형의 갑작스런 요절로 본의 아니게 장남으로 승격했다. 팔남매나 되는 가난한 시골 농사꾼 집에서 장남 책임이 얼마나 중대하다는 것쯤은 일찍이 모를 리 없었으니 나는 하루아침에 두 다리가 묶여 버린 망아지처럼 안타깝게 버둥댈 수밖에 없었다.
형이 돌아가실 때 나는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몇 달을 방황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학비도 조달할 길이 없어 학업을 중단해야 할 판에 이대로 허송세월할 게 아니라 입대해서 군복무를 마치자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했다. 그 자리에서 고향 읍사무소에 지원서를 보냈다. (…)
모두 기피하는 입대를 지원까지 해서 가기로 결심한다는 것은 일종의 좌절이었다. 어쩜 그때까지 내 가슴속에 담고 다니던 꿈이며 희망 모두를 포기하는 일종의 허탈감이기도 했다.
-<어머니가 주신 한 주전자의 막걸리>, 수필집 ≪취해서 50년≫에서
형의 죽음으로 작가는 “본의 아니게” 장남이 되었고 그것이 자원입대를 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 그 동기의 납득 여부를 떠나서라도 한창 공부할 나이인 청소년에게 “학업을 중단”하고 군에 간다는 일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좌절”이 될 터이다. 따라서 당시 이 일은 가슴속의 “꿈이며 희망 모두를 포기하는”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의 군 생활 역시 평범한 것은 아니었다. 작품을 보며 다시 언급하겠지만 우선 결론적으로 얘기하자. 그는 “삼 년이나 군복무를 하고도 제대증 하나 없이 강등 제적”되어 제대했다. 정상적인 ‘만기제대’로 인정을 받지도 못한 것이다. 운명의 난폭한 돌팔매는 가차 없이 그에게 던져졌다. 제대 직후의 상황을 쓴 글을 인용한다.
중단한 학업을 계속하기는커녕 당장 입에 풀칠할 돈도 없는 형편이었는데도 대책 없이 빈둥거리고 있는 내 자신이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더구나 군에서의 사고로 말단공무원 시험마저 볼 자격을 잃었으니 이래저래 죽고 싶은 나날이었다.
-<출렁거리는 낭만 택시>에서
위의 짧은 문장에는 결코 남 얘기로 지나칠 수 없는 치명적인 인생의 문제가 두 가지나 함께 걸려있다. 하나는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말단공무원 시험마저 볼 자격을 잃었”다는 것이다. 궁핍이라는 고통의 톱날은 이미 그의 유소년 시절을 ‘메마르고 삭막한 날들’로 갈아버렸다. 그것을 피해 자원입대를 선택했지만 그러나 삼 년 후의 결과는 아예 그것을 벗어날 가능성조차 차단하고 만 것이다. 입대 당시 느꼈던 “꿈이며 희망 모두를 포기”하는 허탈감은 이제 제대 후의 청년 라대곤에게 그 구체적 실체의 모습을 엄정한 현실로 드러낸 것이다. ‘학업중단’과 ‘수험 자격의 상실’은 이후 치유될 수 없는 트라우마로 작동하며 작가의 문학세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다.
4.
연보를 보면 “1961년 군 입대”라고 쓰여 있고 그 다음 줄에 “1965년 월간잡지 행정보 기자”라는 짤막한 이력이 등장한다. 다음 해에 그는 생애에서 “딱 한 번 봉급생활”을 하게 되는 술 공장 일을 시작하게 되니 기자생활은 아주 짧은 기간이다. 우리는 이 잡지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 그가 이곳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술 공장에 가서야 처음 봉급을 탔다고 하는 것을 보면 급료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명색뿐인 기자였던 것 같다. 여하튼 기자는 기자다. 그리고 이때의 체험은 이후 그의 장편소설 ≪망둥어≫에서 주인공의 직업으로 당시의 세태와 함께 그 행태가 자세하게 그려진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그의 체험은 자신의 문학과 직결된다. 우리가 그의 체험을 함께 공유하고 -특히 라대곤의 경우- 그리하여 가슴으로 그를 체험하지 못한다면 그는 우리에게 그 무엇도 아니다. 우리는 눈물과 한숨이 범벅되어 짜디짠 피가 흐르는 그의 내밀한 가슴속에서만 그와의 만남을 소망할 수 있다. 그만큼 그의 생은 보통사람과는 다른 매우 유별난 삶이었던 것이었다.
그가 술 공장, 소주 원료인 주정을 만드는 공장에 입사했을 때의 소회를 들어본다.
수학이라면 빵점인 내가 화학인들 잘할 리가 없었다. 메틸인지 에틸인지 알코올의 용도조차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내가 주정공장의 생산부에 취직했다는 것 자체가 격에 맞지 않은 일이었지만 제대하고 줄곧 실업자로 빈둥댄 터라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다행이 내 업무는 술 생산 업무가 아니라 원료 구매담당이었다.
-<그때 그 여관>에서
그가 맡은 업무는 기술자로서 공장에서 주정 생산을 하는 일이 아니라 지방의 농협이나 산지를 다니며 “주정 원료인 고구마를 수매하는 일”이었다. 그는 공장에 출근하는 날보다 밖으로 출장 나가는 일이 더 많았다. 그가 보성에 출장 간 일이 있었다. 회사에서 구매한 고구마 만 가마니를 수송할 방법이 없어 애를 먹고 있을 때다. 그는 여관주인과 술을 마시다가 ‘우연히’ 보성역 기차 화물주임을 소개 받게 되고 그 사람의 ‘빽’으로 화물차를 확보하고 수송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나 ‘우연한’ 행운은 그에게는 늘 ‘불운의’ 결과를 초래한다.
처음에는 양탕집도 가고 추어탕 집에도 가면서 식사 정도나 대접하던 나는 화차를 자꾸 배정받게 되면서 기고만장해졌다. 점차 간이 부어올라 겁도 없이 고급 술집에도 가고 농협 숙직실에서 삼봉이며 쌈박이라는 화투장에도 손을 대면서 어느새 공금을 축내기 시작했다.
-<그때 그 여관>에서
그의 손익계산은 단순했다. “한 해 겨울 내내 수송을 해도 다 해내지 못할 물량”을 혼자 한 달 안에 실어 나르고 있으니 회사의 이익은 그 비용과 조기 생산만 감안하더라고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계산은 오산이었다. 회사에 돌아간 그에게 허용된 출장비는 숙식 그리고 교통비가 전부였고 초과된 경비는 공금횡령이 되어 변상해야만 했다. 그 뒤로부터 그의 봉급은 가불 처리되었다. 행운은 불행으로 바뀌었고 그에게 “돌아온 건 질책과 빈 봉투”뿐이었다.
매달 빈 봉투만 받는 그가 “비참한 마음까지 들면서” 회사에 애착을 못 느끼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이런 그에게 회사는 주정협회의 생산관리 계장이란 근사한 직함을 주어 그를 순천에 파견시킨다. 직함은 그럴싸했으나 실상은 “경비원에 불과했다.”(<다시 빈손으로>) 이 자리는 서로 상대방의 공장에 경비원을 파견하여 부정이나 탈세를 막자는 취지로 경쟁사들의 합의로 만들어진 자리다. 그러나 이런 ‘합의’는 피차의 부정을 묵인하고 서로를 보호하자는 ‘묵계’이기도 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매일 “술과 기생들 속에 빠져” 자신의 “임무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흐느적거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어느 날 자정 무렵, 감시원인 자신을 예의 술과 여자로 따돌리고 트럭으로 주정을 부정 반출하는 현장을 목격한다. 한 드럼이면 소주가 세 드럼이나 되는데 그 트럭에는 주정드럼이 가득 실려 있었으니 어마어마한 부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스스로 자괴하는 것뿐 다른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나는 애써 화가 난 척했지만 허구한 날 그들과 함께 기생집에서 뇌물로 술을 얻어먹은 내가 무슨 염치로 끝까지 그들을 추궁할 수 있겠는가? 나는 여러 번 그들이 넣어 주는 봉투를 뿌리치는 체했지만 그 뒤에도 부정반출을 막을 힘이 없었다.
(…) 나는 짜여진 각본의 그저 허깨비에 불과한 형식적인 감시인에 불과했다.
나는 심한 갈등을 느끼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양심이 한쪽 모퉁이에서 악을 써대고 있었지만 어느새 내 뒷주머니에는 뇌물 봉투의 숫자가 늘어가고 있었다.
-<다시 빈손으로>에서
결론적으로 작가는 뇌물봉투를 뿌리치는 ‘체’하기만 했다. 따라서 부정반출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갈등은 심각했을 것이다. 그는 같은 글에서 이때가 자신의 “영혼이 타락해 가고 있을 때”였다고 스스로를 자책하며 고백하고 있다.
주정생산 철이 지나고 그의 파견근무도 끝났다. 본사로 돌아왔지만 보성의 사건은 여전히 그의 손에 빈 월급봉투만 쥐어주었다. 빈 봉투로 먹고 살 수 없었던 그는 결국 회사를 때려치우고 만다. 몇 푼 안 되는 퇴직금은 가불로 날아갔다. 작가는 또 철저한 빈털터리가 되었다. 봉급이라고 하는 것을 받았던 ‘첫’ 직장이자 ‘마지막’ 직장은 이렇게 끝이 났다.
5.
여기까지 글을 쓰며 한 인간의 기구한 운명과 오버랩 되는 얼굴을 바라본다. 작품집 표지 뒤에 있는 작가의 얼굴 사진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어느 정도 연륜의 변화가 느껴지지만 체크무늬 셔츠에 점퍼를 받쳐 입은 그의 표정은 변화가 없다. 젊은 나이에 이미 현세에서 맛볼 수 있는 모든 고통의 계단을 밟고 올라 선 그는 반백의 굳센 머리카락을 치켜세우고 있다. 그 아래 넓고 높은 이마가 희고 둥글게 아치형으로 우뚝 버티고 서 있는데 굳게 단련된 정신이 그 견고한 대리석 돔dome 위에 밝은 빛을 발하고 있다. 양쪽으로 약간 올라간 숱 많은 검은 눈썹은 언제라도 세상과 한바탕 싸움을 치러내겠다는 기세다. 짙은 눈썹 아래 부리부리한 두 눈이 깊게 타오른다. 남성답게 우뚝 솟은 코의 양옆으로 깊게 파인 주름에는 삶의 아픈 상처가 각인되어 있다. 강인한 턱 위에 준엄하게 다물린 입술은 사자가 곧 포효할 것 같은 풍채다. 운명의 풍상은 아름다운 선으로 그의 얼굴을 조각하였다. 무의미할 정도의 잔혹한 운명의 쇠망치는 그의 얼굴을 오히려 위인다운 전사의 모습으로 빚어놓았다. 문인으로 그를 만난 사람이면 그의 넓고 밝게 빛나는 이마에서 당당함과 의연함을 느꼈을 것이다. 현세의 고통을 딛고 일어선 정신의 영광이다. 그러나 이 빛나는 얼굴이 있기까지는 20여 년의 긴 세월을 더 깎여져야 했다. 빈털터리로 첫 직장에서 밀려난 청년 라대곤에게 이 얼굴은 아직 멀고 낯선 얼굴이었다.
광포한 적개심으로 청년 라대곤의 뒷덜미를 단단히 움켜쥔 불행의 마신은 더욱 참담한 고통을 예비하고 그 구렁텅이로 그를 밀어 넣고 있었다.
작가가 최초로 자신의 사업으로 시작한 것은 ‘약장사’다.
십전대보환이나 음양배사물탕 따위의 ≪동의보감≫에 처방되어 있는 한약을 환으로 만들었다. 말이 보약이지 그 비싼 인삼·녹용을 직접 넣을 리도 없고, 소화 잘 된다는 무말랭이나 삶아서 배탈 나지 않는 밀가루와 반죽해서 환을 지어 말려낸 토끼똥이 분명했다. 그딴 엉터리 약이었으니 내게까지 대리점 차지가 되었다. (…)
양약인지 한약인지도 구분 못하는 외판원들이었으니 엉터리일 것은 뻔해도 임질에도 대보환이요, 매독에도 음양배사물탕이었다. 처음에는 한심하기도 하고 양심에 가책을 느끼기도 했지만 나는 돈이 벌리는 재미에 그만둘 수가 없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돈 버는 재미에 푹 빠져 신나는 판이었다.
-<몰래 심은 장미>에서
지금이라면 위험천만한 사업일 터이지만 그야말로 ‘만병통치약’을 판 셈이다. 행간에 익살과 해학이 담겨있다. 그러나 한 자락만 떠들어보면 그가 할 수 있는 사업의 한계성이 아프게 다가온다. 사회에서 체득한 그의 경험은 ‘고구마 수매’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글에서 “하늘은 나쁜 짓만 하는 나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라고 술회한다. 보건단속반이 덤벼들었고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으나 ‘웃기지만 돈 벌리던 이 사업’은 곧 접게 된 것 같다.
두 번째 사업은 석유곤로 생산판매였다. “약장사하여 몇 푼 번 돈으로 시작한” 이 사업은 당시 필수적인 혼숫감으로 “물건을 생산하지 못해서 못 팔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연탄을 쓰던 당시 이동용 취사용구였던 석유곤로는 더운 여름에 꼭 필요한 제품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불행의 마신은 그의 뒷덜미를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잘 나가는 판에 갑자기 유류파동이 들이닥쳤다. “석유 없는 곤로를 어디다 쓰겠는가?” 그의 제품은 고철덩어리가 되었고 나갔던 것들도 반품되어 돌아왔다. 이때의 위기는 약장사할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심각한 것이었다. 원자재 구매 대금으로 발행한 수표들은 계속 돌아오고 있었고 제 시간에 그 수표를 막아야 부도를 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숨통 죄는 그때 상황을 보자.
막아도 막아도 끊임없이 돌아오는 수표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은행 마감시간이 많이 남은 오전에는 길가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악수라도 하고 헤어질 만큼 여유가 있지만, 오후가 되면서 마감시간이 가까워지면 마음이 조급해지다가 4시가 넘으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살아오신다고 해도 반가워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때부터는 팔목의 시계 초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지면서 수표를 막아줄 테니 간첩질을 하라고 하면 거절할 수 없고, 악마에게 영혼을 팔라고 해고 그러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심정이 되고 만다.
-<천국은 얼마나 따뜻할까>에서
그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부도가 나고 말았다. 사람들의 그에 대한 상찬의 눈길은 경멸의 눈길로 바뀌었다. “일부러 찾아와 억지로 돈을 맡기며” 곰살맞게 굴던 사람들은 어느새 “야수로 변해 멱살을 잡고” 늘어졌다. 그는 악다구니 같은 빚쟁이를 피해 무작정 완행열차에 오른다. 이때 운명의 잔인한 톱날은 그의 뼈까지 파고들고 있었고 불행의 고통스런 나사는 그의 모든 신경까지 조이고 있었다. 최후와도 같은 나락에 떨어진 그의 모습을 보자.
주머니를 뒤져 보니 만 원짜리 석 장이 남아있었다. 그날 밤 나는 (대전)역전의 광진여관에서 오천 원을 주고 정말 꿀 같은 잠을 잤다. 자도자도 깨지 않을 듯싶은 깊은 잠이었다. 얼마나 잤을까? 낮인지 밤인지도 모르게 일어나 막걸리 한 되와 해장국 한 그릇을 먹고 또 잤다. 머리가 텅 빈 것처럼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평화로운 행복도 삼 일을 넘기지 못했다. (…)
팔목의 시계도 잡혀먹고 양복 윗저고리까지 팔아먹고 나니 마지막으로 남은 구두를 노점상과 바꾸어 신고 이천 원을 받았을 때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마지막 이 돈으로 무얼 사 먹을까?” (…)
나는 그 길로 시장으로 달려가 순대 한 접시와 소주 한 병을 사들고 보문산으로 올라갔다. 차마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먹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
으스스 한기가 몰려오고 있었다. 내 몰골을 내려다보니 윗저고리까지 팔아먹고 때 묻은 와이셔츠 한 장 걸친 채 해진 운동화를 접어신고 있는 영락없는 거지였다.
-<천국은 얼마나 따뜻할까>에서
현세의 불행은 라대곤을 노숙까지 하게 할 정도로 온갖 고통을 주며 그를 시험했다. 그는 운명의 구제받지 못한 희생물로 다시 어두운 심연의 협곡으로 팽개쳐졌다.
그의 사회참여는 군적 박탈과, 수험자격 박탈이라는 차단벽에 막히며 시작되었고 첫 직장에서도 맨손으로 털려나는 좌절을 겪어야 했으며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개인사업도 그의 능력과 의지와는 무관한 외적 요인, 소위 ‘파동’이란 것으로 무너져야 했다.
그러나 운명은 아직 그의 뒷덜미를 휘어잡고 사정없이 흔들어 대고 있었다. 대전 보문산에서 노숙하며 겨우 “얼어 죽지 않은” 작가는 일 년 후 다시 무연탄 장사를 시작해보지만 결론적으로 이 사업마저 외적 요인으로 실패하고 만다. 당시의 어이없는 일을 작가의 글로 대신하며 한 불행한 인간과 그와 줄기차게 동반하던 고통에 대한 서사는 이만 접어도 될 것 같다. 그는 일회용 보험까지 들고 “버스가 뒤집히기를” 기도해 보지만 버스는 그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급브레이크 한 번 밟지도 않고” 잘도 달렸다. 오죽해야 이런 극한의 생각까지 하였을까. 이상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며 또한 이 정도면 그 고통은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지 않은가.
산 넘어 산이라고 했던가? 유류파동으로 난로공장이 부도나고 정신없이 헤매다가 재기해 보겠다고 다시 시작한 장사가 무연탄 장사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이없게도 연탄파동이 일어났다. 재벌놀음도 아니고 개 코딱지만 한 가게로 장사하는 놈이 무슨 파동 핑계가 그리 많은 거냐고 나를 보고 비웃겠지만 사실이 그렇다.
일 년 전에는 석유가 없어 곤로가 고철이 되더니 이번에는 또 연탄이 비싸서 화덕이 개떡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재수가 없는 나라는 놈은 꼭 파동이 나서 탈이 붙을 쪽만 쫓아다니면서 돈을 벌어 보겠다고 몸살을 앓고 다닌 것이다. (…)
하느님도 내 편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다시 석탄을 품귀시켜 버린 것이다. (…)
어느 날 아침 표를 사다가 나는 또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일회용 보험이었다. 보험료는 오백 원이었는데 서울까지 가는 동안 사고가 나면 천만 원을 준다고 한다. (…) 할 일도 없고 또 앞으로 돈을 벌 자신도 없고 보면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어지기도 하면서 죽어 버리면 항상 걱정이던 가족에게 보상이라도 받게 하는 것이 상책 아닌가.
6.
나는 지금까지 극한을 넘어서는 한 사람의 불행과 그로 인한 상처와 고통을 집중적으로 추적했다. 그러나 결국 작정한 듯 내리치는 운명의 정釘에 세게 얻어맞으면 맞을수록 그의 굳은 의지는 단단한 놋쇠뭉치로 벼리어졌다. 고통으로 발갛게 달구어진 모루 위에서 그의 정신은 강인한 청동의 철갑을 두르고 있었다. 거듭 내려치고 두드릴수록 인간의 위대성을 보여주려는 듯 그는 다시 일어섰다.
마침내 운명은 그와 화해하기로 결정한 것 같다. 그는 이후 산업폐기물 처리사업에 뛰어들었고 이번에는 “환경청에서 공해 공장들을 단속하는 시점과 잘 맞아떨어져서”(<뒤바뀐 팬티>) 그가 그처럼 갈망했던 ‘돈’을 번다.
나는 이후의 그에 대한 행적에 대해 구구한 언급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대개의 문인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사업에서 크게 성공했고 이어 문단에 진출했으며 우리들은 그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직접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었다.
나도 기억에 남는 그와의 개인적인 만남이 하나 있다. 몇 년 전 작가와 나, 고인이 된 최영 시인 그리고 김영 시인 넷이 군산에서 저녁을 함께한 일이 있다. 자리가 끝나고 군산에 사는 두 사람은 남고 전주로 가는 김 시인이 나를 익산까지 데려다 주게 되었다. 작가는 운전대를 잡은 김 시인과 조수석에 앉은 나를 보며 한다는 인사가,
“어이, 호병탁. 가다 강간하지 마.”
내가 대꾸하기를 “가봐야 알지유.”
김 시인이 맞장구치기를 “불감청고소원이로소이다.”
그야말로 모두의 발화가 소설에 나오는 극적인 대사를 읊고 있는 것 같다. 대개의 사람이 “잘 가라.” 혹은 “운전 조심하고.” 정도로 작별인사를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작가는 떠나는 후배들에게 ‘강간’이란 섬뜩한 용어를 사용하며 의외의 인사를 했다. 그렇다고 그 자리가 어색해진 건 물론 아니다. 그곳에 있던 네 사람의 한바탕 웃음만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배가시켰을 따름이었다.
바로 어제 일처럼 그날 밤 그와의 작별인사가 떠오른다. 그와 술자리라도 나눈 사람이면 다 느낀 바겠지만 그의 말에는 토속어나 비속어 등의 질박한 언어들이 종횡무진으로 삽입된다. 그런데도 어둡고 칙칙한 구석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후배들은 이런 말에 편안해진다. 그리고 그가 사용하는 이러한 독특한 어법은 그의 작품에서도 놀라운 해학과 풍자의 기능으로 작동한다.
그는 세상에 물어뜯기고 그 고통에 신음했던 사람이다. 밑바닥에 짓눌리기도 했고 무릎을 꿇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그처럼 신산한 삶의 상처에 부대꼈으면서도 앞으로 보겠지만 그의 문체는 결코 어둡지 않다. 오히려 그의 어법에는 일상적 대화에서나 예술적 글에서나 언제나 강한 위트와 해학이 번뜩거리고 있음을 인지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고스란히 견뎌냈고 나아가 그것을 필연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침내 ‘운명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게 되었다. 자신을 괴롭혔던 마신에 대한 증오의 외침 대신 그것의 마력을 디오니스적 사랑의 노래로 환치시켜 부르게 되는 것이다. 고통을 딛고 일어선 정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노래가 아닐 수 없다.
- 편집자 주: 지난 4월 15일 타계한 수필가이자 소설가인 라대곤 선생에 대한 글을 지면 관계상 두 번에 나누어 싣습니다. 이번 호에 작가론을, 다음 호에 작품론을 게재합니다.
호병탁 -----------------------------------
부여 출생. 한국외국어대와 원광대대학원에서 어학‧문학전공(문학박사). 시집: ≪칠산주막≫, 평론집: ≪나비의 궤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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