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수필문학≫에 <고향집 감나무>로 문단에 나온 이후 수필가로, 소설가로, 20년 동안 왕성하게 작품을 발표하면서 불꽃 같은 삶을 살다 가셨다. ≪수필과비평≫이 수필문단의 거대한 뿌리가 되기까지 물심양면 협조를 아끼지 않으신 라대곤 선생의 뜻을 기리고자 여기 추모의 특집을 마련했다."
내 가슴속의 수채화 - 라대곤
벽에 흰 종이로 덮어놓은 액자 하나가 걸려 있었다. 집사람이 무슨 그림을 감춘 거냐고 고개를 갸웃거리기에 투명 안경을 쓰고 보는 그림이라고 했더니 코웃음을 치면서 보기 싫다고 뜯어내 버리고 말았다. 사정을 모르는 집사람이야 당연한 처사지만 내게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근사한 수채화를 한 폭 꼭 갖고 싶었다. 그렇다고 값이나 예술성을 따진 그림이 아니다. 굳이 알은체를 하자면 유화의 현란함이나 동양화의 철학적인 단순함보다는 담백한 색상에 은은하면서도 조금은 질박감이 흐르는 수채화 정도였다.
내가 수채화를 처음 본 것은 초등학교 때다. 교실 뒤편에 작은 액자 속에 걸려 있었는데 진한 물감으로 그려진 숲이었다. 나도 따라 그려보고 싶었지만 따로 미술 선생님이 없었기 때문에 그림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장난삼아 도화지에 물감을 칠해 보아도 벽에 걸려 있는 그림과 같은 색상이 나오지 않았다.
파란 물감을 붓에 묻혀 뭉개듯 칠하면 가을하늘처럼 진한 코발트가 되었다. 그 위에 맹물을 떨어뜨리면 하늘은 어느새 또 엷은 바닷물로 변해 버렸다. 신기해서 칠하고 문지르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그렇다고 그림이 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로 인해 그리고 싶었던 그림은 항상 내 마음이었을 뿐, 그림과는 거리가 먼 문외한이 되고 말았는지도 모른다.
그 기억 때문에 더 마음에 드는 수채화를 갖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머리맡에 종이로 가려놓은 액자는 얼마 전에 지인 화가가 그려준 그림이다. 멀리 앞산이 희미하게 겹으로 보이고 잿빛 하늘 밑으로 잔잔한 바닷물이 작은 파도를 일으키고 있는 그림이다. 스산하고 황량해 보인다. 폭풍이 일어나는 큰 바다도 아니요, 그렇다고 바람을 가려주는 아늑한 포구도 아니다. 영락없이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무인도다. 아무리 화가가 그렸다고 해도 내가 갖고 싶었던 그림은 아니다.
가끔씩 나는 미술 전람회 같은 곳을 가본다. 그곳에서도 마음에 쏙 드는 그림을 만나지 못했다. 그러면 내가 갖고 싶은 그림은 어떤 것일까? 뚜렷하게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닌데 마음속에는 안개처럼 보일 듯 말 듯 막연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 집착 때문이었을까?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다. 벽에 걸린 액자 위로 그림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림 위에 떠 있던 잿빛 구름이 조금씩 밝아지더니 검은 바위산이 초가집 모퉁이에 쌓여 있는 짚 볏단으로 변해 버렸다. 삭막했던 잿빛 하늘 위로 달이 떠오르는가 하면 밝아지면서 달은 간 곳이 없고 이번에는 함박눈이 내린다. 잘 자란 황소나무 가지가 찢어질 듯 휘청거린다. 진한 향기 같은 맑은 공기가 콧속으로 파고들듯 상쾌해지는 것이 정녕 꿈이 아니다. 눈 속으로 달려나갔다. 정식이도 있고 돌이라고 불렀던 고향집 강아지도 거기 있었다. 달려가는 내 앞으로 잿빛 하늘이 조금씩 밝아 오고 있었다. 누군가 물방울로 진한 잿빛 색깔을 뭉개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순간 갑자기 눈밭에 넘어지면서 잠이 깨고 말았다.
다시 잠을 청해 보지만 잠은 오지 않는다. 아쉬운 마음에 눈을 감아보지만 그림 속은 어제처럼 어두운 잿빛하늘 그대로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다.
다시 꿈을 꾸고 싶어서 액자 위에 흰 종이를 덮고 눈을 감는다. 달이 뜬다. 초가 지붕에 눈이 내린다. 황소나무 가지 위에 까치가 조는 듯 앉아 있다. 그림이 그려진다. 마음속으로 그리는 수채화가 가슴을 떨리게 해 준다.
그날 밤 이후로 나는 빈 액자 앞에 마주 앉는 시간이 많아졌다. 빈 액자 속에는 참으로 많은 수채화가 들어 있었다. 폭풍이 일어나는 험한 바다가 보이는가 하면 갑자기 바뀌어 고향 들녘에 떼지어 나는 고추잠자리도 보였다. 뿐만 아니었다. 술이라도 한잔하는 날은 어김없이 잘 채색된 수란이 얼굴까지 보였다. 내 기분에 따라 수채화가 변하는 것이다. 마음속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나는 행복해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오래전부터 갖고 싶었던 수채화는 아직 그려지지 않은 그림이었던 모양이다. 오직 내 마음속에 있는 그림이었을까? 비록 남에게 보일 수 없는 그림이라서 아쉽더라도 나는 내 마음속의 수채화를 완성하기 위해서 더 많은 시간을 빈 액자 앞에서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요즈음이다.
그때 그 여관
나는 딱 한 번 봉급 생활을 한 적이 있다. 처음 시작은 주정협회였는데 끝은 백화산업이라는 주정공장이었다. 그러니까 술 협회에서 시작해서 술 공장으로 끝이 난 셈이다.
지금은 백화산업이라는 공장 자체도 없어졌지만 당시에는 우리나라 청주 생산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던 백화 수복의 자매회사로 하루에 소주 원료인 주정을 20드럼쯤 생산하는 아주 알뜰한 공장이었다.
수학이라면 빵점이었던 내가 화학인들 잘할 리가 없었다. 메틸인지 에틸인지 알코올의 용도조차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내가 주정 공장의 생산부에 취직했다는 것 자체가 격에 맞지 않은 일이었지만 제대하고 줄곧 실업자로 빈둥댄 터라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어렵사리 취직이 확정된 전날 밤 묘한 설레임과 흥분으로 뜬눈으로 날을 새우고 새벽부터 출근을 서둘렀다. 울렁거리는 가슴으로 얼쩡거리던 나는 내 생전 처음 보는 웅장한 공장의 증류탑에 그만 넋을 잃었다. 아무 ‘빽’도 없는 내가 어떻게 하면 공장에서 쫓겨나지 않고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가슴이 떨려 오기조차 했다.
그때 나는 입술을 깨물면서 결심했다. 비록 내가 보증인 하나 없는 처지라 한들 회사에서 믿어만 주면 죽도록 일해서 공장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고 두 주먹까지 쥐었다. 출근하고 보니 다행히 내 업무는 술 생산 업무가 아니라 원료 구매 담당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몰라서 두려워했던 화학이나 수학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술 공장이라고 해서 반드시 기술자만 필요한 건 아니었는데도 지레 겁을 먹은 순진한 내 자신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쨌든 나는 업무상 공장에 출근하는 날보다 밖으로 출장 나가는 일이 더 많았는데 주업무는 농협이나 현지에 주정 원료인 고구마를 수매하는 일이었다.
생고구마는 철이 지나면 썩어 버리기 때문에 생산철에 한 가마니라도 더 사들이기 위해 정신없이 현장을 쫓아다녀야 했다.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사들이기 위해 사람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당연히 또 술판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농협 직원을 만나는 것도 맨숭거리는 얼굴보다는 한잔 술로 대화를 부드럽게 할 수 있었고 고구마를 생산하는 산지의 농민들을 만나는 데도 술병이 따라야 말이 통했다. 술 공장 사람이니 예의로라도 술을 갖고 오는 것이 우리네 인심이고, 술 공장의 흔한 술쯤은 공짜로 얻어먹는 것 또한 당연한 것 아니냐고 농민들도 당연시했다.
술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고, 핑곗거리가 없어 못 마시는 난데 오죽이나 잘된 일인가? 나는 출장길에 정식으로 허락을 받고 소주를 몇 병씩 들고 나갔다. 안주야 날고구마 껍질을 벗겨서 한 조각씩 씹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다 보니 언제나 내가 나가는 고구마밭 이랑에는 아저씨들뿐만 아니라 아주머니들까지 술자리가 질펀했다.
나는 신이 나서 다 씹히지도 않은 날고구마 안주를 침과 함께 튀기면서 넉살좋게 떠들어 대면 몇 잔 술에 함께 취한 마을 아저씨가 가마니에 규정 무게보다 몇 kg씩 더 넣는 것이 시골 인심이어서 내가 공장에서 퍼내 오는 술값보다 몇 배는 이득을 보았다.
어느새 눈이 내리고 내 고구마 수매 기술도 이골이 날 무렵 이번에는 전남 보성으로 출장 명령이 떨어졌다. 사실 그곳 출장은 모두 기피할 정도로 어렵고 고달픈 일이었기 때문에 차일피일하다가 내게로 밀려 떨어졌는데 나는 가지 못하겠다고 거부할 이유도 배짱도 없었다.
그때 공장은 원료 부족으로 증류탑이 멈춰야 할 판이었다. 전남 보성 농협에 있는 절간 고구마 만 가마니를 구매했는데 수송하는 화물차를 배정받을 수가 없어 애를 먹고 있던 상황이었다. 회사에서는 내게 출장 명령을 내리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연말 안에 수송을 완료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한편으로는 내 능력을 인정해 주는 듯싶어 기분이 괜찮기도 했지만 기일 안에 수송하지 못하면 회사에서 쫓겨나야 할 판이었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불안감 속에 전라선 태극호에 올랐다. 낯선 보성에서 무슨 수로 화물차를 얻어 기일 안에 수송한단 말인가. 태산 같은 걱정이 앞선 나는 또 강생회 소주를 한 병 사서 마셨다. 아니나다를까 언제나처럼 마음이 조금씩 진정되면서 오기가 생겨났다.
‘까짓거 잘못된다 한들 실업자밖에 더 될까?’
나는 또 한 병의 소주 덕분에 취한 기분으로 야간 열차에서 단잠까지 잘 수 있었다.
늦은 밤 생전 처음 보는 보성역에서 내려 숙소를 정하려고 두리번거리던 나는 픽 하니 어이없는 웃음을 웃고 말았다. 네온사인에 번쩍거리는 간판이 ‘그때 그 여관’이라는 간판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지었는지 꽤나 재미있는 이름이었다. 나는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보성역에서 처음 본 ‘그때 그 여관’으로 들어갔다.
여관에 붙어 있는 ‘그때 그 다방’과 한 집이었다. 밤이 늦었는데 기차 손님을 기다리는지 그때까지 다방 문이 열려 있었다. 나는 분위기도 볼 겸 다방으로 먼저 들어갔다. 하품을 해대는 마담에게 커피를 한 잔 주문하고 한쪽에서 혼자 신문을 보고 있는 아저씨에게도 커피를 권했다. 나는 그저 보성에서 누군가를 사귀고 싶어서 커피를 권했는데 우연히도 그분은 그 여관과 다방 주인이었다.
기분 좋게 내 커피를 마신 아저씨는 이번에는 불문곡직 자기가 술을 사겠다고 나를 끌고 다방 앞 대폿집으로 갔다. 어지간히 술을 좋아하는 그분은 내가 권하는 몇 잔 술에 취해, 듣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해 주었다.
초면인 그날 밤은 주로 간판 이야기였는데 자신이 ‘그때 그 여관’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도 했고, 이름을 붙이게 된 다른 동기가 있다고도 했다. 어느 날 그 여관에서 하숙을 하던 기관장이 보성에서 임기가 끝나 서울로 갔는데 어느 여자가 기관장에게 ‘그때 그 여관’에 놀러 오시라고 했단다.
전화 옆에서 ‘그때 그 여관’ 이란 말을 엿들은 기관장 부인이 엄청 오해해서 부부싸움을 했는데 결국 보성까지 찾아와서 간판을 보고서야 오해가 풀렸다는 이야기 따위였다.
몇 잔 술에 우리는 연령과 관계없이 금세 친해졌다. 그 순간부터 내 보성 출장은 행운으로 바뀌게 되었다. 화물차 걱정을 하는 내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그딴 건 걱정도 말라더니 기차역 화물 주임을 불러내는 것이 아닌가?
그는 엉거주춤 나를 자신의 조카라고 소개해 버렸다.
“이봐, 인사드리라고.”
얼떨결에 일어선 내게 여관 주인이 아주 오래된 가족처럼 나를 소개했다.
“누구시더라.”
“야 임마, 내 조카야.”
“내가 처음 보는 조카도 있었나?”
“군산 술 공장에 있는데 내일 아침 화물차 한 칸 줘야겠다.”
“뭐하게?”
“농협 고구마를 실어야 한다.”
“미친 놈 화물차가 내 주머니에 들어 있냐?”
“임마, 너 순천 철도국에 매부 두었다가 어디다 쓸 요량이냐?”
“허허허. 네 놈은 언제나 철이 들 거냐?”
“아저씨, 제 술 한잔 받으십시오.”
졸지에 기차역 화물 주임을 아저씨로 모신 나는 마음속에서부터 미어져 오는 행운의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 자식, 네 놈이 공짜 술을 살 리가 없지…….”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두 손으로 공손히 술잔을 올렸다.
“젊은 친구가 제법 술을 마시는구먼.”
화물 주임은 별로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너털웃음을 웃어대고 있었다.
이튿날 새벽 희뿌연 먼동이 트면서 나는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설마했던 화물차 한 칸이 거짓말처럼 내 앞에 멎어 있는 게 아닌가? 그때 그 황홀했던 기분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그러나 그 황홀함도 공장 직원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를 어거지로 출장을 보내 놓고 아무 대책도 없었던 공장에서는 그야말로 환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기적이 일어났다고 춤을 추고 야단법석을 벌인 것도 잠시, 잘했다 칭찬할 틈도 없이 다음 화물차를 독촉해 대고 있었다.
하지만 보성역 기차 화물 주임을 ‘빽’으로 갖고 있는 나는 그딴 걸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핑계 겸 보성 시내 술을 다 마실 듯 화물 주임과 ‘그때 그 여관’ 주인을 모시고 다녔다.
처음에는 양탕집도 가고 추어탕 집에도 가면서 식사 정도나 대접하던 나는 화차를 자꾸 배정받게 되면서 기고 만장해졌다. 점차 간이 부어올라 겁도 없이 고급 술집에도 가고 농협 숙직실에서 삼봉이며 쌈박이라는 화투장에도 손을 대면서 어느새 공금을 축내기 시작했다.
아무리 계산이 흐린 나이지만 까짓 몇 푼 안되는 공금 정도는 업무를 수행하는 공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손익을 따져볼 때 한 해 겨울 내내 수송을 해도 다 해내지 못할 물량을 내가 한 달 안에 실어나르고 있으니 그 비용이며 조기 생산으로 얻어지는 이익만 해도 얼마인가?
그 정도면 아무리 회사의 공금이긴 하지만 그 비용을 좀 여유있게 쓴다 해서 양심의 가책까지 받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경비가 조금 많이 난 것은 회사에서도 인정하겠지, 지레짐작한 나는 수송을 끝내고 너무도 당당하게 귀사했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이었다. 의기양양하게 돌아온 내게 기다리는 것은 칭찬보다는 과도하게 지출된 경비 결산의 추궁이었다. 조기 수송의 공로야 인정이 되지만 그딴 건 능력일 뿐이고, 사칙에 나와 있는 출장 경비 외에는 단 한 푼도 경비 지출을 초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허용된 출장비는 여인숙비와 백반값 그리고 기차 삼등칸의 비용이 전부였다. 초과된 경비는 당연히 공금 횡령이기 때문에 급히 변상하지 않으면 영창으로 끌려갈 판이었다. 항변을 했지만 아무도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주지도 않았다. 할 수 없이 사정사정해서 내 월급에 가불을 달아 놓고 보니 너무나 허탈했다.
그때부터 나는 거의 매달 빈 봉투였다. 가불이 없어도 허기진 봉급인데 그마저 빈 봉투이고 보니 나는 회사에 근무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갔다. 생각할수록 분통까지 터져오는 것은 그래도 내 딴에는 그 어려움 속에서 오직 회사만을 위해서 충성을 다했는데 내게 돌아온 건 질책과 빈 봉투이고 보니 도무지 일할 맛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얻은 게 없지도 않았다. 작은 칭찬에 분별없이 거들먹거린 내 모습도 우습지만 남보다 앞서가려는 허욕이 얼마나 위험스럽다는 것도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뿐만 아니라 서서히 세상살이에 대해서도 조금씩 눈이 떠지면서 보성역 ‘그때 그 여관’과 화물 주임 아저씨들의 훈훈한 정이 오래도록 내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천국은 얼마나 따뜻할까
술은 참 이상한 음식이다. 배가 고파서 먹는 것도 아닌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다. 어떤 사람들은 술이 없는 세상을 무슨 맛으로 사느냐고 술에 대해 예찬까지 한다. 어디 그뿐인가? 술을 마시고 하는 행동은 비록 그것이 망나니짓이라도 너그럽게 이해해 준다.
이를테면 상가에서 상주가 밥을 우적거리면서 먹고 있으면 볼썽사납다고 수근거릴 사람들도 상주가 술을 마시고 있으면 슬픔을 달래는 모습으로 생각하고 처연하게 여길 것이다. 그러고 보면 술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말하자면 인생의 희로애락과 함께하는 셈인데 하물며 일의 매듭이 풀리지 않고 답답할 때는 오죽하랴?
1972년경 내 형편이 그랬다. 그때 나는 신신기업이라는 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는데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하는 게 아니고 하루 종일 돈을 쫓아다니며 숨바꼭질하는 형국이었다. 눈을 뜨면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오직 생각하는 건 돈이었는데 막아도 막아도 끊임없이 돌아오는 수표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은행 마감 시간이 많이 남은 오전 중에는 길가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악수라도 하고 헤어질 만큼 여유가 있지만, 오후가 되면서 마감 시간이 가까워지면 마음이 조급해지다가, 4시가 넘으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살아오신다고 해도 반가워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때부터는 팔목의 시계 초침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지면서 수표를 막아줄 테니 간첩질을 하라고 하면 거절할 수 없고, 악마에게 영혼을 팔라고 해도 그러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심정이 되고 만다.
전당포에서 헌 바지까지 담보로 하고 어찌어찌 그날의 부도를 막아내고 나면 그 순간부터 허탈감과 함께 공복감이 몰려오면서 속까지 쓰려 온다. 생각해 보면 아침은커녕 하루 종일 물 한 컵 제대로 마시지 못한 적이 다반사였다.
돈을 빌리려고 이 사람 저 사람 다방에서 만나다 보면 하루 종일 커피만 겨우 마시게 된다. 그러면 속도 모르는 사람들은 우유라도 마시지 무슨 멋으로 커피를 마시고 속 쓰리다고 하느냐고 하겠지만 빈속에 우유를 마시면 울컥거려 넘어가지 않으니 도리 없이 애꿎은 커피만 마셔댈 수밖에.
어쨌든 비위가 상할 정도의 빈속에 그나마 넘어가는 건 커피와 술뿐이었다. 애써 속을 달래 보려고 억지로 밥수저를 들어보지만 또 내일 돌아올 수표를 생각하면 입맛이 싹 달아나 깔깔한 입속에서 모래알 같은 밥알이 씹힐 리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수저를 던져 버리고 술병을 집어들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면 그 무렵은 술도 기분이 좋아지려고 마신 게 아니라 숫제 목으로 넘길 수 있는 게 오직 술뿐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술도 주로 막걸리를 마실 수밖에 없었는데 그나마 막걸리는 어느 정도의 공복감도 달래 주었기 때문에 일거양득이어서 다행이었다.
몇 달을 그렇게 수표에 매달려 쫓아다니다 보니 어이없게도 그때 내 주식은 막걸리이고 부식은 밥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조차도 의식하지 못하고 계속 돈만 쫓아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이지만, 내가 그때 전혀 소생할 수 없는 사업에 매달려 죽기 살기로 돈을 쫓아다닌 건 순전히 내 잘못만은 아니었다.
물론 약장사하여 몇 푼 번 돈으로 시작한 내 첫 사업에 대한 애착 때문이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예측하지 못한 정부의 정책 때문이기도 했다. 석유파동이 있기 전 내 곤로공장은 물건을 생산하지 못해서 못 팔 정도로 호황이었다. 비록 공장은 조그만 창고를 빌려서 프레스 한 대에 공구 몇 개뿐인 소규모였지만 만들기가 바쁘게 불티나게 잘도 팔려나갔다.
아궁이도 연탄이었고 여름이면 그 연탄 아궁이마저 뜨거워 화덕을 쓸 때였으니 석유곤로는 혼수감의 필수일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그런 만큼 수지도 맞았는데 칠백 원의 원가를 들여서 월부로 육천 원을 받으면 월부계약금만 받아도 본전을 하는 장사였으니 나는 기고만장할 수밖에 없었다.
만드는 대로 돈이었으니 한 대라도 더 만들어 보겠다고 발버둥을 치는 건 당연했다. 철판을 많이 사기 위해 당좌수표를 끊어대기 시작했다. 까짓 기일수표야 깔아 놓은 월부대금을 수금해서 막으면 그만이었다. 잘 나가는 판에 엉뚱하게 유류파동이 난 것이다.
석유가 없는 곤로를 어디에 쓰겠는가?
기를 쓰고 만든 내 공장의 곤로들은 하루 아침에 고철덩이가 되고 말았다. 어디 그뿐인가. 팔려나간 곤로까지 반품이 되어 돌아왔다. 재수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게 분명했다. 나는 하루 아침에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하지만 정부 정책이 또 어떻게 바뀔지도 모르는 판에 무작정 부도를 낼 수 없어서 외상으로 사들인 철판 대금의 수표를 막느라고 동분서주한 것이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은 부도가 나고 말았는데 야박한 것이 주변 인심이었다. 난로가 잘 팔릴 땐 ‘싸가지’ 있는 젊은 사업가라고 입에 침이 마르던 사람들이 어느새 돌변해서 경멸과 질시의 눈으로 쳐다볼 뿐만 아니라 젊은 놈이 겁도 없이 날뛰더니 당연한 것 아니냐고 비웃기까지 했다.
어디 그뿐인가. 일부러 찾아와서 억지로 돈을 맡기면서 제 살이라도 베어 먹일 듯이 곰살맞게 굴던 사람들이 어느새 야수로 변해서 멱살을 잡고 늘어지는 비정한 세상이 되고 말았다.
순간 나는 만사가 귀찮아졌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악다구니 속 같은 빚쟁이 속에서 벗어나고 싶어 무작정 완행열차에 올랐는데 자정 무렵 내린 곳이 대전이었다. 대전에 내린 무슨 특별한 볼일이 있는 건 아니었고 아마 서울까지 가기에는 너무 멀었기 때문이었을 게다.
주머니를 뒤져 보니 만 원짜리 석 장이 남아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역전 광진여관에서 오천 원을 주고 정말 꿀 같은 잠을 잤다. 자도자도 깨지 않을 듯싶은 깊은 잠이었다. 얼마나 잤을까? 낮인지 밤인지도 모르게 일어나 막걸리 한 되와 해장국 한 그릇을 먹고 또 잤다. 머리가 텅 빈 것처럼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평화로운 행복도 삼 일을 넘기지 못했다.
주머니에 남아 있던 삼만 원은 벌써 간 곳이 없고 잠자리는커녕 막걸리 한 되 값도 없어진 나는 또 돈에 쫓겼다. 나는 무작정 거리를 방황했다. 차마 비럭질은 할 수가 없고, 허기진 뱃속에 술 냄새는 코를 찔렀다. 나는 일부러 대폿집 간판이 붙어 있는 길을 피해서 걷기도 했다.
팔목의 시계도 잡혀먹고 양복 윗저고리까지 팔아먹고 나니 마지막으로 남은 구두를 노점상과 바꾸어 신고 이천 원을 받았을 때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마지막 이 돈으로 무얼 사 먹을까?’
먹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순간 갑자기 머릿속을 스쳐가는 간절한 욕망이 있었다. 꿀꺽 목으로 침부터 넘어갔다. 새우젓을 듬뿍 찍은 순대였다. 왜 그 순간에 순대가 떠올랐는지는 나도 모른다. 나는 그 길로 시장으로 달려가 순대 한 접시와 소주 한 병을 사들고 보문산으로 올라갔다.
차마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먹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보문산의 석양이 아름다운 것 따위는 아예 관심도 없었고 느낄 수도 없었다. 인적이 드문 숲 속을 찾아 허위허위 달려갔다. 주변을 두리번거릴 틈도 없이 큰 소나무 아래 주저앉아 이빨로 병마개를 물어 뜯어내고 소주 한 모금을 꿀꺽 삼키고 숨 돌릴 사이도 없이 순대 한 점을 입 안에 우겨넣었다.
커~.
세상에 그렇게 맛있는 술과 안주가 또 있을까? 환하게 눈이 밝아져 오는 듯싶었다. 가슴이 훈훈해지면서 몸이 따뜻해져 오고 있었다. 스르르 졸음이 밀려왔다. 나도 관심이 없었지만 지나가는 행인 누구 한 사람 내게 눈길을 보내지 않았다.
으스스 한기가 몰려오고 있었다. 내 몰골을 내려다보니 윗저고리까지 팔아먹고 때묻은 와이셔츠 한 장 걸친 채 해진 운동화를 접어 신고 있는 영락없는 거지였다. 깡통만 짊어지면 거지가 분명했지만 지금 그딴 것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은 밀려오는 한기 때문이었다.
손으로 목이며 어깨를 비벼 보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냉기는 더욱 살아 올라오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일어나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뛰는 것도 잠시, 숨이 가빠와서 지탱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천천히 걸어서 공원을 돌기 시작했다. 얼어죽지 않으려면 밤이 새도록 쉬지 않고 걸을 수밖에 없었다.
걷다가 한기가 더 몰려오면 보건체조를 하듯 두 손을 들어서 흔들기도 하고 굳어가는 무릎이며 볼을 비벼대면서 끝없이 걸었다. 졸다가 걷고 또 졸고 새벽녘쯤에는 각기병이 걸린 듯 두 다리가 퉁퉁부어 올라왔지만 나는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천국은 얼마나 따뜻할까?’
아궁이에 연탄불이 벌겋게 지펴진 한 평의 판잣집이 너무나 그리운 밤이었다.
라대곤 ---------------------------------------------
1940년 군산 출생, 1982년 월간 ≪자동차≫ 발행인, 단편소설 ≪공범자≫ 발표 후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나 사업으로 중단, 1993년 ≪수필문학≫에 <고향집 감나무>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수필가로 활동 시작, 1994년 ≪문예사조≫에 단편소설 <두창이와 연주의 합창> 발표, 19995년 수필집 ≪한번만이라도≫ 발간, 소설집 ≪악연의 세월≫ 발간, 1996년 문학21 문학상 수상, ≪수필과비평≫지 회장, 1997년 수필집 ≪취해서 50년≫ 발간, 1998년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탐미문학상(소설 부문), 1999년 전라매일 논설위원, 문예사조문학상, 전북문학상, 소설집 ≪굴레≫ 발간, 2000년 표현문학상 수상, 전라북도 문예진흥기금 심사위원, 2001년 장편소설집 ≪아름다운 이별≫ 발간, 전북문학상 심사위원장, 2002년 백양촌 문학상 수상, 수필집 ≪물안개 속으로≫ 발간, 2003년 소설집 ≪선물≫ 발간, 채만식 문학상 심사위원장, 2004년 전북중앙신문에 소설 ≪망둥어≫연재, 장편소설집 ≪망둥어≫ 발간, 2006년 소설가협회 중앙위원, 채만식 문학상 수상, 소설집 ≪영혼의 그림자≫ 발간, 2007년 목정문화상(문학부문) 수상, 2008년 전북도민일보에 소설 ≪유산≫연재, 장편소설집 ≪유산≫ 발간, 2011년 군산대학교 명예 문학박사, ≪깜비는 내 친구≫ 1·2·3, 2012년 소설집 ≪퍼즐≫ 발간, 2013년 ≪수필과비평≫, ≪계간문예≫ 회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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