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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5월호, 촌감단상] 빚 - 변종호

신아미디어 2013. 6. 5. 10:57

"인생은 서로 주고받으며 사는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수많은 빚을 지고 갚으며 살아간다. 빚은 당연히 갚아야 하지만 시기를 놓쳐 갚을 수 없을 때는 평생 가슴으로 느끼며 살기도 한다."

 

 

 

 

 

  빚   -  변종호


   나는 빚쟁이다. 내 나름대로 열심히 갚으며 살아온 것 같은데 아직도 갚아야 할 부채가 남았다. 소소한 것에서부터 평생 애를 써도 갚을 수 없는 것도 있다. 빚은 빚이지만 마음안에 있으니 신용불량자는 아니다. 돌아보면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빚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해주었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인생은 서로 주고받으며 사는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수많은 빚을 지고 갚으며 살아간다. 빚은 당연히 갚아야 하지만 시기를 놓쳐 갚을 수 없을 때는 평생 가슴으로 느끼며 살기도 한다.
   갈수록 독거노인이 빠르게 늘어난다. 모든 걸 스스로 해결하는 노인이 많아지는 고령화 사회에 자식들의 무관심도 늘어간다. 부모에게 진 빚을 탕감받거나 잠시 미루는 지불유예가 아니라 아예 갚을 생각조차 않는다. 노인들의 삶이 더 지난해질 것만 같아 우울해진다.
   도로변에서 흘러간 유행가 소리가 들린다. 찢어지듯 높은 볼륨은 미간을 찌푸리게 한다. 사륜오토바이에 울긋불긋한 조화로 장식을 하고 열댓 개가 넘는 바람개비에 반짝이 필름까지 펄럭이니 휘황찬란하다. 그러나 까만 선글라스를 낀 팔순의 할아버지는 음악을 틀어 놓고도 무표정이다. 세상의 끝자락에서 온 힘을 다해 발버둥치지만 낭떠러지에 서 있는 듯한 고단한 모습이다. 뒷좌석에는 목도 가누지 못하는 갓난애마냥 머리만 남겨놓고 이불에 돌돌 말려 벨트에 묶여있는 할머니가 겨우 눈만 깜빡인다. 핏기 하나 없는 얼굴, 퀭하니 풀린 눈만 봐도 떠나실 날이 머지않은 듯하다. 오늘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중증환자에게 할아버지가 시켜주는 세상구경이다. 할머니는 구경을 잘하고 계실까. 봄바람을 느끼고, 꽃봉오리 터지는 소리를 들으셨으면 좋겠다. 혹독한 겨울을 밀어내고 피어오르는 산수유 꽃망울을 보며 된장 담그던 그날을 기억하실지도 모른다. 비록 몸은 움직일 수 없지만 할머니는 수십 년 보고 느껴온 이 봄을 분명 기억하실 게다. 순간순간이 아쉬운 할머니가 지금 바라보는 세상은 참으로 아름답고 따뜻할 것이다. 할아버지는 이렇게 해서라도 평생 할머니에게 진 빚을 갚으려 하는 것은 아닐까.
   누구나 빚 없이 살기는 어렵다. 인연의 빚은 더 그렇다. 연륜이 쌓인다는 것은 그 빚을 하나하나 덜어가는 것이며, 덜어지는 만큼 세상살이는 자유로운 것이다.
   한동안 매일 지나던 사륜오토바이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변종호  -----------------------------------------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섶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