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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5월호, 인연] 늦게 핀 꽃 - 송복련

신아미디어 2013. 6. 10. 08:26

"차꽃은 흰 옷처럼 눈이 부셨다. 곁에는 열매들이 한창 부풀어 봉선이 곧 터질 태세다. 열매와 꽃이 만난다는 차나무를 실화상봉수實貨相逢樹라 한다. 그녀의 생도 이제 늦가을이다. 씨앗을 떨어뜨릴 날을 기다리며 피워 올린 꽃처럼 자태가 아름답다. 늦게 핀 꽃에는 향기마저 그윽했다."

 

 

 

 

 

 

  늦게 핀 꽃   -  송복련


   차실에 들어섰다. 우리 옷이 그토록 잘 어울리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아담한 키와 살집이 있는 몸매를 옷이 잘 감싸고 있어 얼굴에는 복스러움과 귀티가 묻어났다. 자연스럽게 매만져진 머리와 조용한 몸짓들이 어우러져 계절의 끝자락에 피는 꽃을 보는 듯했다.
   그녀의 도톰한 손은 다기를 다룰 때 가장 아름답다. 손을 쭉 뻗치는 법이 없다. 잔을 들거나 내밀 때에도 손은 계란을 감싸듯 소담스럽다. 소매 끝이 찻잔에 닿지 않게 한 손으로 지그시 누르고 다관의 찻물을 붓는다. 쪼르륵 흐르는 소리는 마지막 몇 방울로 맺혔다 떨어진다. 손을 무릎 위에 살풋 얹고 나서 목례를 건넨다. 차를 우려서 내어놓기까지 그리는 몸짓은 작고 동그랗고 조용했다. 아홉 번 찌고 아홉 번 덖어서 만들어낸 차향이 그녀에게서 흘러나왔다.
   옷소매를 자꾸만 잡아당겨 얼어서 터진 손을 감추려고 했던 아이처럼 여자답다는 말에는 주눅이 들었다. 여드름이 숭숭 돋는 아이들과 씨름한 세월이 얼마인가. 나보다 덩치 큰 머슴애들을 길들이려고 호랑이가 되었다가 엄마처럼 달래보기도 하고 친구처럼 고민을 나누었다. 독한 분필가루를 마셔온 시간은 커피 맛처럼 썼다. 속을 무던히도 볶아대던 날이 많아지면서 나도 모르게 틀이 만들어졌다. 바지를 즐겨 입고 말투에 사뭇 무게가 실리고 얼굴 표정이 굳어진 것들이다.
   차의 세계는 고풍스럽고 또한 신선했다. 학교와 집밖에 모르던 내가 차의 맛을 알아가고 행하는 법을 익히면서 손님 앞에 찻상도 얌전하게 차려내 보았다. 자주 대하지 않던 다식을 곁들이면 좋아들 해서 차린 것에 비해 인사를 듣는 재미가 컸다. 사위를 보았을 때 옥상에 올라 차를 마신 날이다. 밤하늘에 별이 유난스레 빛났다. 살평상에 앉아 별을 보며 가족들이 함께 차를 나누었다. 밤이 주는 편안함 속에 이야기는 술술 흘러나왔다. 서로를 이해하며 살가워진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명절에 한복을 입으니 명절다웠고 ≪삼강행실도≫ 속으로 성큼 들어선 듯했다. 그녀가 회원들과 바깥나들이를 나섰을 때는 선비들의 호사스런 풍류가 이런 것인가 싶었다. 차와 인연이 닿는 곳에서는 전통의 맥을 이어가는 이들이 있었다. 스님과 도공, 명다를 만드는 이와 목기며 방짜, 쪽염색을 하는 장인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은 보름달을 품은 것 같았다.
   그녀는 배울 곳이 있으면 먼 거리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바깥나들이가 수업이 되는 날이 많았다. 한번은 영양의 ‘두들마을’에서 반가의 밥상을 받았다. 조선 중기의 장계향이 쓴 ≪음식 디미방≫의 조리서를 재현해 보였다. 여인들의 앞치마가 눈에 익었다. <대장금>에서 보았던가. 장롱 속에 잠자는 흰 무명 앞치마가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떠올렸다. 익숙한 음식들 외에 어만두, 빈자, 수증계, 동아누루미, 가제육들. 낯선 이름에 끌렸고 부드럽고 담백한 맛이 좋아 조리법의 궁금증도 풀었다. 모두가 주변에서 쉽게 구해지는 재료들이지만 급하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소설가 이문열의 선대 할머니이자 ≪선택≫의 주인공인 장씨는 시·서·화에 능했고 자녀교육과 가정경영을 잘 하신 분이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자신의 지식을 후손에게 전하기 위해 썼다는 ≪음식 디미방≫. 많은 이야기가 있는 그분의 언저리에 머무른 것만 해도 벅찬 선물을 받은 듯했다.
   행사 준비할 게 있어서 그녀와 재래시장에 갔다. 옥이엄마, 요새 통 안 보이네. 옥이 학교 잘 다니나? 몇 마디 주고받고는 지나쳤다. 내가 아는 그녀는 돈 걱정을 모르는 기품이 있는 여자였다. 그런 그녀에게도 시장에서 보냈던 녹록잖은 세월이 있었다고 한다. 일찍 결혼해서 도시로 나와 이런저런 장사로 시장생활을 한 지 여러 해다. 다행히 남편이 하던 일이 잘 풀려 사업가로 성공을 한 후 집안에 들어앉았다. 고단했던 삶 때문에 구멍이 숭숭 뚫렸던 곳으로는 찬바람이 들어왔다. 그때 차와 만나면서 살아가는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던 것 같다. 차츰차츰 그녀의 허기진 틈새마다 찻물이 스며들기 시작했을 것이다.
   열매가 꽃을 만났다. 아침저녁에는 스며드는 냉기로 소름이 돋는 상강 무렵이다. 그냥 스쳤으면 놓칠 뻔했다. 푸른 찻잎들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꽃은 수굿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차꽃은 흰 옷처럼 눈이 부셨다. 곁에는 열매들이 한창 부풀어 봉선이 곧 터질 태세다. 열매와 꽃이 만난다는 차나무를 실화상봉수實貨相逢樹라 한다. 그녀의 생도 이제 늦가을이다. 씨앗을 떨어뜨릴 날을 기다리며 피워 올린 꽃처럼 자태가 아름답다. 늦게 핀 꽃에는 향기마저 그윽했다.

 


송복련  -----------------------------------------------
   대구 출생, 대구가톨릭대학 국문과 졸업, 중등학교 교사 재직, 한국문인협회, 대구문인협회, 한국수필가협회, 달구벌수필, 롯데강남수요수필 회원, 대구수필가협회 부회장. 수필과지성 문예아카데미 원장 역임,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완성된 여자≫, ≪둥둥 우렁이 껍데기 떠내려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