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연기가 낭만이던 시대는 애저녁에 지나간, 비만과 더불어 의지박약의 저급인격으로 강등된 흡연. 만에 하나 그들에게 수술실에 들어갈 기회가 주어져 흡연자의 절개한 폐를 본다면, 철쭉꽃빛 선홍색 고운 폐가 역겨운 잿빛으로 변한 것을 본다면, 그리고 또, 말기폐암환자의 임종을 지키게 되어, 그리하여 격심한 통증과 숨을 못 쉬는 답답한 단말마의 고통소리를 듣게 된다면? "
골초장 - 오세윤
근자 들어 아파트촌에는 새로운 풍속도 하나가 생겨났다. 흡연자들이 건물 밖 바깥 공간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 3, 40대의 착한 남편들이 대부분인데 가끔은 5, 60대의 초로들도 서성인다.
간혹 세차게 비가 내리는 날이라든가 무더운 날에는 앞 베란다 창문을 열어 놓고 연기를 뿜어내기도 하지만 집안에서는 거의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간접흡연에 따른 폐암 발생률이 1.5배라는 통계에 겁을 먹어서이기도 하겠고, 여권신장으로 커진 아내의 목소리에 쫓겨난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집안에서 피우지 않으려는 의지만큼은 뚜렷해 보인다. 건물 한 귀퉁이에서, 노천 주차장 한쪽에서, 아니면 시동을 걸어놓은 자기 차 옆에 서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가며 급하게 담배를 피워대는 모습들을 보면 참 안됐다는 생각이 어쩔 수 없이 든다.
하지만 아무리 측은해도 아내들은 남편이 집안에서 끽연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고약한 냄새도 냄새려니와 담배연기의 폐해 때문이다. 영국의 수상을 지낸 윈스턴 처칠은 시가를 입에 달고 살았으면서도 91세까지 장수했다는 것으로 담배의 무해함을 주장해도 아내들은 식구들의 건강을 내세워 한사코 흡연을 통제한다.
난방과 취사에서 발생되는 오염물질은 물론 집안으로 스며들어오는 대기오염물질도 폐암 발생과 관련이 있는 터에 담배연기까지 더해지면 그 위험도가 얼마냐며 극구 못 피우게 한다. 더 나아가 본인에게도 강력하게 금연을 요구한다. 폐암의 80% 이상에서 흡연이 원인이라는 것, 흡연자는 비흡연자에 비해 폐암 발생률이 10배라는 것, 매일 담배 한 갑을 40년간 피워 온 사람은 비흡연자에 비해 폐암에 걸릴 확률이 40배에 달한다는 연구결과를 들먹이며 사정없이 몰아세운다.
그렇잖아도 살아가기 힘든 경쟁사회에서 늘 긴장하고 주위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젊은 가장들에게 사회와 가정은 냉혹하게 흡연을 제한하여 이중삼중으로 스트레스를 준다. 금연구역이 확산되면서 흡연자들은 더욱 더 무참하게 코너로 내몰리고 있다.
여유롭게, 느긋하게 담배 한 대 피울 공간은 그리 많지 않다. 아는 사람이 없을, 모두가 타인들인 거리를 걸어가면서, 아니면 으슥한 골목, 그도 여의치 않을 때는 건물 한 귀퉁이에 마련된 노천 흡연구역에서 겨우 참았던 한 대를 피운다. 그것도 그곳 직장 흡연자들 틈에 끼여 이 사람 저 사람 눈치를 보아가며 옹색하게 빨아대야 한다.
거리를 걸어가면서 피우려면 보통 뻔뻔스럽지 않으면 안 된다. 보행자들이 연기나 튀는 불똥에 눈살을 찌푸리거나 말거나 아랑곳없이 피워야 할 만큼 배포가 두둑해야 한다.
그런 중에 유독 흡연이 허용되는 공간이 있다. 바로 당구장이다. 화장실은 물론 공원도 산도, 식당도 정류장도 금연구역인 터에 당구장만은 예외다. 하여 흡연자들은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당구장에 몰려와 거침없이 담배연기를 뿜어낸다.
은퇴한 고등학교 동창 여덟이 모임을 만들어 한 주일에 한 번 게임을 하는 종로의 당구장도 예외가 아니다. 노경에 당구만 한 운동이 없다 하여 시작한 친목모임이라 꼬박꼬박 참석은 하지만 담배연기가 고역이다. 아무리 주인이 팬을 자주 돌려 환기를 시켜도 당구장 안은 언제나 담배연기로 자욱하다. 곁에서 경기하는 사람들을 보고 적당히 피우라고 사정도 해 보지만 반응은 시큰둥 ‘너나 잘해라.’다. 청장년들에겐 말하기도 조심스럽다. 집이나 직장에서와 달리 이곳에서야 비로소 가슴을 펴고 큰소리로 웃고 즐기는 그들의 기를 꺾기 차마 미안해서다. 더더구나 우리 모임에도 골초가 셋이나 있어 강력하게 요구하지도 못한다.
공기업의 국장을 지낸 K는 골초 중에도 골초다. 그는 담배를 숨겨가며 피운다. 함께 사는 출가한 딸과 아내가 담배 냄새 난다고 지청구를 해대는 바람에 몰래 피우는 게 습관이 된 친구는 엄지와 검지로 필터를 잡고 오므린 손바닥 안에 담배를 감춰놓고 옹색하게 피운다. 거리의 행인들을 등지고 서서 허공에 연기를 뿜어대는 그를 보노라면 학교 화장실 뒤 으슥한 담벼락 밑에 쪼그려 앉아 허겁지겁 담배를 빨아대는 중학생이 곧장 연상된다. 보기 민춤하다. 덕 있고 성품 좋고 지극히 남을 배려하는 그가 왜 담배를 피워 스스로와 가족,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당구장에서, 거리에서 담배를 규제하는 날은 언제쯤이 될까. 언제가 되어야 당구장이 골초장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게 될까. 애연가들에게는 담배가 소리 없는 살인병기요 마약이라는 말이 여전히 말 귀에 부는 동풍인 것만 같다.
담배연기가 낭만이던 시대는 애저녁에 지나간, 비만과 더불어 의지박약의 저급인격으로 강등된 흡연. 만에 하나 그들에게 수술실에 들어갈 기회가 주어져 흡연자의 절개한 폐를 본다면, 철쭉꽃빛 선홍색 고운 폐가 역겨운 잿빛으로 변한 것을 본다면, 그리고 또, 말기폐암환자의 임종을 지키게 되어, 그리하여 격심한 통증과 숨을 못 쉬는 답답한 단말마의 고통소리를 듣게 된다면? 그래도 여전히 담배를 피울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왜들 못 끊을까.
오세윤 --------------------------------------
정병원 진료원장.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2004년 ≪시와 산문≫, ≪에세이문학≫ 등단, 한국산문 편집고문· 수필문우회 동인, 수필집: ≪은빛 갈겨니≫, ≪갈채≫, ≪등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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