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비평 4월호의 월평과 함께 수필세계를 같이 탐구해보세요. "대표적인 서사양식인 ‘수필쓰기’와 ‘수필읽기’는 존재와 부재의 의미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행위이며, 그 재생산의 과정 자체가 곧 의미 생산의 과정이 된다."
존재와 부재의 서사 - 허상문
1.
존재의 의미는 본질적으로 존재의 부재나 결여에 대한 인식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존재는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그 위치 설정이 가능하며, 존재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은 어떤 본질적인 또는 본래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이 어떠한 구조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기반해서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존재와 부재는 서로를 동시에 비추어 볼 때 온전한 의미 획득이 가능하다. 라캉의 어법을 빌리면, 이것은 곧 존재가 상징계에서의 차이와 변별에 의해 위치지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존재는 그의 위치를 발견하게 되는 대타자와의 관계이다. 이런 관계는 대타자 그 자체처럼 결여에 의해 특징지어지며, 그리하여 각 존재는 존재하려는 욕망을 일으키는 존재의 결여에 의해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존재의 결여를 우리는 ‘부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부재의 탐색은 결국 또 다른 ‘존재’의 탐색에 다름 아니다. 부재란 어떠한 존재의 상실 또는 결여이므로, 그 결여를 메워 존재의 충만함을 이루려는 욕망을 촉발한다. 욕망은 언제나 그 실질적 대상을 채우고자 하기 때문에, 그 자신을 충족시킬 은유적인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그러한 은유적 방법의 한 문학적 표현을 서사라고 할 수 있다. 르네 지라르가 ‘욕망의 삼각형’으로, 루시앙 골드만이 ‘문학사회학’이라는 이름으로 규명했듯이, 서사는 본질적으로 욕망을 동력으로 생산된다. 인간은 이야기로 만들어진 세상에서 태어나고, 산다는 것 자체가 개개의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나의 서사를 생산한다는 의미이므로, 인간의 생존 자체는 하나의 서사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를 함으로써 존재의 의미를 찾으며, 이때 우리는 이러한 영원한 지속이자 생성인 서사가 곧 인간 존재의 다른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욕망은 그 대상을 끊임없이 전치해가며 지속되므로, 서사에는 욕망이 지속적이고 항구적으로 내재할 운명을 갖는다.
이렇게, 부재로 촉발된 욕망은 서사를 통해 그 부재와 결여를 메우고자 하기 때문에 부재는 서사의 조건이며, 서사를 일구어내는 욕망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부재와 서사의 관계는 근원적으로 존재의 대상과 언어와의 관계에서 기인한다. 언어는 주체의 욕망과 함께 부재를 딛고 대신 들어와 사물을 대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의 많은 작가들의 욕망은 부분적인 기호일 따름인 시니피앙을 통해 시니피에의 표현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독자들도 그러한 시니피앙의 집합인 텍스트에서 또 다른 의미의 연쇄를 만들어가고 있다. 따라서 대표적인 서사양식인 ‘수필쓰기’와 ‘수필읽기’는 존재와 부재의 의미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행위이며, 그 재생산의 과정 자체가 곧 의미 생산의 과정이 된다.
2.
김공주의 <투석>의 에피소드는 어려서 고아가 된 조카 돌보기의 어려움에 대한 작중화자의 독백으로 이어진다. 조카는 결혼을 한 뒤에도 화자의 도움을 필요로 했고, 그럴 때마다 자신이 짊어질 짐이 아니라는 생각에 화가 난다. 조카는 당뇨 합병증으로 온몸이 퉁퉁 부어 모습을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에 이르게 된다. 운동과 식사조절을 하라는 의사의 당부가 있었지만 이를 무시한 채 먹고 싶은 대로 먹고 운동도 게을리 한 결과, 신장에서 혈액 속 노폐물을 걸러내지 못해 혈액투석을 하는 단계에 이른다. 짧은 시간에 투석을 하면 쇼크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투석기는 느린 속도로 작동된다. “목에서 뽑아내는 피가 호스를 타고 나온다. 하얀 필터가 점점 붉어진다. 투석기가 뽑아낸 피를 노폐물이 없는 깨끗한 피로 만들고 있는 중이다. 빙빙 돌아가는 기계를 통과한 피는 다시 다른 호스를 통해 몸속으로 들어간다.” 투석의 과정에 대한 디테일 묘사를 통하여 작가는 인간실존에 대한 의미 찾기를 자연스럽게 이룬다. 우리들이 존재하는 데 있어 마음속의 미움과 사랑은 어떤 의미로 실재하는가. “노폐물이 쌓인 피처럼” 우리의 마음은 불신과 상실과 미움의 감정으로 가득한 것은 아닌가.
항상 뺏긴다는 생각을 한 나. 작은 것 하나에도 공짜가 없었던 시댁, 그것이 항상 서운했던 나. 그로 인해 마음을 닫고 살아온 날들만 기억난다. 노폐물이 쌓인 피처럼 내 마음도 그랬다. 대가 없이 김밥장사로 평생 모은 재산을 보시한 할머니도 있는데 나는 피붙이에게도 대가를 바란 것이 아닌가. 법문을 듣고 나와 시댁 사이를 돌아본다. 마음속에 미움을 내려놓자.
-김공주, <투석>에서
우리들은 흔히 사랑을 생각하지만 세속적 의미에서의 사랑은 쉽사리 미움과 증오로 변한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랑과 자비는 애증의 대립을 초월한 청정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예컨대 에리히 프롬이 ≪소유냐 존재냐≫에서 이야기했듯이 그것이 소유 양식으로 구성되는가, 아니면 존재 양식으로 구성되는가에 따라 상반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소유양식으로서의 삶과 사랑은 물질적 가치를 소유하는 것과 같은 욕망의 충족을 우선하는 방식이다. 자연을 지배하고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며 무한한 생산과 소비를 통해 물질적 풍요를 달성하려는 것이 소유양식으로서의 삶과 사랑의 목표이다. 반면에 존재양식으로서의 삶은 사랑, 자유, 자아 등 진정한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들 존재 내부의 모든 불순한 ‘노폐물’을 사랑과 자비로 정화할 때에야 그것은 모든 곳에서 아름답게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관계와 사회의 모든 면에 있어서 미움은 마음을 병들게 하는 독이 되지만, 사랑과 자비는 영혼을 치유하는 약이 된다는 평범한 사실을 우리는 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투석>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제는 미움을 버릴 때가 온 것이다. 탁한 피를 걸러내어 깨끗한 피로 만드는 투석기가 내 마음에서도 작동된다.”라는 작가의 진술은 우리들에게 존재해야 할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가를 생각게 한다.
이응철의 <겨울철>은 낯모르는 타인이던 사람들이 만나 부부로서 인연을 맺고 살아간다는 것이 우리들의 생존에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주고 있다. 진부한 표현대로 부부는 꿈을 먹고 꿈에 속아 사는 존재인지 모른다. 실로 부부는 작은 꿈을 먹으며 그 꿈속에서 사는 존재이다. 그 꿈은 이상이 아니라 현실로 나타난다. “동장군의 위세가 수갑을 벗고 도주한 탈주범처럼 한결 느슨해진 겨울” 산책길에서 돌아오다가, 아내가 그토록 혐오하는 개고기를 사서 아내의 머리에 이고 가게 하면서 그 뒤를 따르는 남편의 가슴에는 여러 가지의 감정이 교차한다. 날은 어두워지고 머리 위에 얹은 무거운 개고기의 무게 때문에 아내는 비탈길에서 자꾸 미끄러진다. 어둠은 한껏 달구어진 남편의 감정들을 가로막고, 한순간 홀연히 앞서가는 아내의 모습에서 천상의 어머님이 하강해서 동행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가진다.
마침내 “집에 당도해 열어보니 선혈이 아내 옷깃에 진달래꽃 무늬처럼 선명하다. 보신탕조차 외면하던 아내가 그런 컴플렉스에 당당하다. 결연한 몸짓이 냉한 계절에 피어나다니 이럴 수가! 간간이 통증이 머문 두피를 가볍게 눌러보는 모습에 주눅이 들어 숨소리조차 크게 낼 수 없을 지경이다.” 여기서 남편은 “그녀와의 삶에서 처음 건져 올리는 묘한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남녀 사이 특히 부부 사이의 사랑의 감정이란 어떠한 상황에서 생겨나는 것일까. 사랑이라는 감정은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것이어서 그 실체를 손으로 확실하게 붙잡을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부가 때로 깊은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서 전류처럼 흐르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소통과 교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겨울철>에서 남편의 아내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플라톤이 ≪향연≫에서 “진정한 사랑은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르고서야 계산되는 것이다.”는 말을 연상시킨다.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는 ‘개고기’를 남편을 위해 머리에 이고 가는 아내의 ‘죽음’과 같은 아름다운 ‘희생’을 통하여 남편은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인식하게 된다. <겨울철>에서 아름답고 따뜻한 아내의 존재가 남편에게 새로운 차원의 사랑을 현현케 한다.
묵언으로 일관하던 아내는 되려 나를 두둔한다. 평생 처음 머리에 얹고 균형을 잡지 못한 아내가 어머니 운운하던 내 말에 실토한다. 무엇일까? 학처럼 몸을 비우고 마음을 내려놓고 살다 가신 예전 어머님의 균형감각은 지극한 당연지사라고! 물욕과 허세로 중무장한 현대판 며느리의 뒤뚱대는 언밸런스야말로 예상한 일이 아니겠냐고 반문을 하며 몸을 낮춘다.
생의 질곡에서 어렵게 만나 못된 성깔 다 받아주며 살아온 아내를 돌아본다. 영락없이 백설이 분분한 벌판에 피어난 겨울 꽃의 향을 음미한 그날 가슴엔 안개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응철, <겨울철>에서
그리하여 “생의 질곡에서 어렵게 만나 못된 성깔 다 받아주며 살아온 아내를 돌아”보는 순간, 그것은 “백설이 분분한 벌판에 피어난 겨울 꽃의 향”과 같은 모습으로 환치된다. <겨울철>은 추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미움 속에서 사랑을, 죽음 속에서 생명을 살려내고 키워나가는 것이 우리들의 삶에서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말하자면 <겨울철>에서 글쓰기의 개별성은 보편성으로 이어지는 것과 같은 모습을 보인다. 작가는 인간과 삶에 녹아 있는 현실의 보편성을 찾고자 하며, 이는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이 작품이 진중하게 던지고 있는 물음과 진배없다. 추함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면 아름다움이, 미움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면 사랑이 도출되는 개별자와 보편자의 상호길항의 노정 속에서 찾아가는 ‘글쓰기 미학’의 새로운 모습을 작가는 구현하고자 한다.
이 같은 작가의 인식은 범상치 않은 문체를 통해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예컨대 “플라스틱 바구니들을 껴안고 을씨년스럽게 졸고 있는 오후, 토끼꼬리만 한 겨울 햇살이 설핏하다.” “아직 잔설이란 말이 무색하게 기력이 왕성한 백설이 논 그루터기 모두를 옥양목으로 감싸고 겨울 발목을 잡고 있다.” “앵무새 같은 내자의 음성이 실개천과 합류한다.” 등등과 같은 표현들은 여태 여느 수필에서 보아오던 그것들과는 달리 예사롭지 않다. 수필 평자들이 문체와 문장에 대하여 많은 강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데 비하여, <겨울철>에서의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문체는 주목할 만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박영빈의 <너무나 부자인 ‘나’>는 탐욕과 소유욕으로 가득한 우리들의 현대적 삶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화자는 가을비가 을씨년스럽게 내리는 날, 버스 승강장 의자에 앉아 비를 피하고 있는 남녀 노숙자의 모습을 보게 된다. 특히 여자 노숙자는 꽁꽁 싸맨 보따리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비에 젖을까봐 무척 조심을 하고 있다. 화자는 여자 노숙자의 보따리 속이 궁금해진다. 보따리 속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저 보따리 속의 물건으로 생활을 하고 있는 걸까? <너무나 부자인 ‘나’>의 화자가 아니더라도 물질만능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끊임없는 욕망과 탐닉 속에서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한다. 산업 사회는 기계와 기술을 개발했고, 대량 생산과 소비를 가능케 했다. 사람들은 오직 물질적 부를 즐기기 위해 사는 듯이 현대사회는 물질 만능주의로 치닫고 있다. 우리들 주변에는 어디에서나 물건이 넘쳐난다.
노숙자와 나를 비교해 본다는 것이 무리일지 모르겠으나 나는 무엇을 이렇게 많이 갖고 살고 있는지 한번쯤 생각해 보게 되었다. 주방에는 쓰지 않는 그릇들이 가득했다. 두 아이의 돌잔치에 사용했던 그릇들을 지금은 쓰지도 않으면서 그 의미 때문에 누구에게 주지도, 버리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삼십 년 살림살이에 불어난 그릇도 만만치 않다. 정작 가족들이 쓰는 그릇은 몇 개 되지 않는데도 그 모든 것들을 껴안고 있는 것이다. 냉장고에도 음식이 가득했다. 냉동실의 음식만 보아도 열흘 이상은 충분히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입지도 않으면서 버리지도 못하는 옷들이 서랍을 차지하고 있으며, 쓰지도 않으면서 모셔 둔 물건들이 창고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박영빈, <너무나 부자인 ‘나’>에서
이렇게 모든 것이 넉넉하고 풍요로운 세상에 살면서 삶을 단순화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물질과 부가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되면, 세상의 모든 것을 물질적인 가치로 판단하게 마련이다. 그것은 결국 인간 소외의 사회를 만들게 되고 삶의 주체인 인격의 균형마저도 상실하게 되고 만다. 작가의 말대로 “지금 무심히 떨어지고 있는 저 노란 은행잎도 자연의 이치에 의한 것이지만 버려야만 삶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깨우치게 하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는 자연에 대해서든 인간에 대해서든 소유와 풍요로움만을 추구한다. 독일의 철학자 한스 요나스는 ≪책임의 원칙≫에서 “너의 행위의 귀결이 지구상에서 진정한 인간의 삶의 지속과 조화하도록 행위하라. 혹은 너의 행위의 귀결이 미래에도 인간이 존속할 수 있는 가능성을 파괴하지 않도록 행위하라.”는 경고를 했지만, 인간의 탐닉과 욕망은 끝이 없다.
김공주의 <투석>, 이응철의 <겨울철>, 박영빈의 <너무나 부자인 ‘나’> 가 현존을 통하여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한 작품들이라고 한다면, 김행숙의 <오지 않은 딸에게>, 황인용의 <종이학>, 서숙의 <숨은 기억 찾기>는 부재를 통하여 존재의 의미를 찾는 작품들이다.
3.
김행숙의 <오지 않은 딸에게>는 “예쁜 원피스와 땋은 갈래머리”를 가진 딸에 대한 향수와 그 부재에 대한 작가의 심정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길가에서 예쁜 소녀를 만나면 안아보고 싶었고 여대생이 된 친구의 딸들이 눈부시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비로소 자신에게 딸이 없음을 실감하게 된다. 화자에게 딸은 언제나 가슴속에서만 자라왔고 자신의 그림자로만 살아왔다고 진술한다. 부부 사이에는 물질적 감정적 계산이 있을 수 있지만, 엄마와 딸 사이에는 그러한 계산이 없다고 한다. 부부 사이에는 항상 이별의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지만 엄마와 딸 사이는 정신적 육체적 통증까지 공유하는 관계라고 이야기된다. 그래서인지 <오지 않은 딸에게>에서 화자의 딸에 대한 소망은 더욱 지극하다.
이름도 없는 딸아.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면 너는 어쩌면 나에게서 외로움을 빼앗지 않으려고 내게 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네가 내 곁에 든든하게 있는 한 나는 외로울 틈이 없었을지도 모르므로 내게서 끊임없는 사유와 자기극복의 과정을 이루게 하기 위해 너는 내게 오던 발걸음을 멈추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내 안에서 끊임없이 깨우치며 당겨주어 젊음에서 멀어지지 않게 긴장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게도 아쉬운 것 하나쯤은 있어야 되지 않겠니?
-김행숙, <오지 않은 딸에게>에서
위 인용에서 보듯이 화자에게 딸의 부재가 주는 빈 공간은 절실하다. 딸의 부재에 대한 욕망은 이 작품의 기본적인 모티브로 작용하면서 서사의 구성방식이 된다. <오지 않은 딸에게>에서 서사가 대상과 관계 맺는 방식은 바로 욕망의 그것이다. 하나의 의미를 획득하기 위하여 끝없이 시니피앙들을 미끄러지며 치환해 가는 고정되지 않을 시니피에의 유동은 끝없이 대상을 치환해 가는 욕망의 환유적인 운동과 동일하다. 기본적으로, 시니피에는 그것이 고정될 시니피앙을 원하고 욕망은 그것이 충족될 대상을 원하지만, 동시에 그 둘은 고정과 충족을 원하기보다는 그 유희의 과정을 즐긴다. 결국 <오지 않은 딸에게>에서 작가의 ‘딸’에 대한 욕망도 그에 의한 서사도 결코 완전히 채워지지 않는 하나의 결여로서 의미가 있다. 그리하여 부재는 서사와 욕망이 지속하게 되는 이유가 되며 존재 방식이 된다.
황인용의 <종이학>도 <오지 않은 딸에게>와 마찬가지로 딸의 슬픔과 부재의 의미를 찾는 작품이다. 오랫동안 인간은 새를 통하여 자유롭고자 하는 욕망을 실현하거나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고자 하는 호기심에 사로잡혀 왔다. 그리하여 그동안 수많은 문학작품에서는 비상하는 새에게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꿈과 이상을 형상화하는 이미지로 표현하였다.
<종이학>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새의 이미지는 바로 슬픔과 불행이 지배하는 억압적 삶의 공간에서 탈출하여 생명과 비상을 이루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작중의 화자는 책상에 종이학 한 마리가 날개를 펴고 앉아 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접은 사람의 시행착오와 슬픔을 헤아리고자 한다.
한 장의 종이가 아니라 슬픔을 접고 또 접었을 그 사람! 누군지 모를 그는 슬픔을 접는 데도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함을 처음으로 깨달은 이였으리라. 사람은 접어야 하는 존재다. 접어 생각해야 하고 생각 그 자체를 접어두어야 한다. 새나 나비만 날개를 접고 쉬어야 하는 존재는 아님이다. 새나 나비가 날개를 접음은 다시 힘차게 비상하기 위해서다. 그렇듯 사람도 새 출발을 위해서는 모든 걸 접어두어야 하는 것이다.
-황인용, <종이학>에서
작가는 작품 속에서 ‘새나 나비’와 같은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작가의 느낌을 등장인물의 그것에 객관화시키고 있다. 말하자면 작가는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상응하는 이미지나 장면을 제시함으로써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옛날 딸아이가 접었던 종이학은 하루 빨리 마음의 평화 되찾기를 간절히 비는 나의 기도 속에서 태어났었다. 그때 딸아이의 종이학은 적어도 내겐 희망과 꿈의 새였음이다.”고 고백하고 있듯이, 작가는 <종이학>에서의 정서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겪는 심리적 슬픔과 좌절이었음을 토로한다. 작가는 천 마리 학을 접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딸에 대한 고뇌와 회한을 ‘학’라는 이미지의 등가물로 바꾸어 새로운 예술적 정서로 환치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종이학>에서 작가는 딸의 슬픔과 부재가 “치유와 부활과 도약이 절실히 필요한 세상의 모든 슬퍼하는 이들을 위해서” 새로운 존재방식이 되기를 기원한다.
서숙의 <숨은 기억 찾기>는 존재에 대한 기억과 그 부재가 사람에 있어서나 물건에 있어서나 마찬가지임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물건들 속에 파묻혀 살아가면서도 정작 찾고자 하는 물건이 쉽게 눈에 띄지 않을 때 여기저기를 헤매게 된다. 그러다가 지나치게 많은 물건으로 집안을 채우고 살아가는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새삼 돌아본다. 화자는 티베트 여행길에서 구입한 천주가 언제부터 눈에 띄지 않았고, 있을 법한 곳을 여기저기 뒤졌지만 좀체 그것을 찾지 못한다. 이것은 사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아내의 부재 후에야 그 존재의 크기가 깨달아지며 회한 속에 파묻힌다.”고 술회하듯이, 우리들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떤 일은 기억에서 지울 수 없어서 또 가슴이 아프기도 하다.
문득 추억의 인물이 떠오를 때면 그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궁금하게 여기는 한편으로 나는 또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그 사람은 내 기억의 회로에 다시는 안 떠오를지도 몰라 몇 번 자맥질을 하다간 종당에는 기억의 저편으로 가라앉아 다시는 수면 위에 떠오르지 않겠지. 오싹 한기가 든다. 그렇게 많은 것들이 내게서 떠나갔을 것이다. 나는 누군가를 잊고 누군가는 나를 잊고. 시간의 덫에 걸려 추억도 서서히 퇴색하며 지워진다.
-서숙, <숨은 기억 찾기>에서
실제 우리의 인연이라는 것은 어디까지이며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 없다. 한번 지나가면 그만이고 갈림길에서 다시는 되돌리지 못하는 것이 인연이다. 마찬가지로 인간관계라는 것도 좋아하는 물건들을 유리전시장 안에 넣어 보관하듯 그렇게 보관될 수 없다.
<숨은 기억 찾기>에서 작가의 강조가 아니더라도,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나 어떤 사물과 관계되는 연줄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침이 없다. 이 관계와 연줄은 바로 인간 삶의 총화이기 때문이다. 화자가 다시 찾은 천주에서 느끼는 “물건 하나에 딸려 나오는 생각, 생각들. 생생하게 살아나는 대화와 느낌 등등, 만져지고 보이는 것을 통해 만질 수 없고 보이지 않는 것을 더듬는 매력”은 정말 우리들의 새로운 삶의 의미 찾기를 위한 노력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작가는 “지금 이 천주가 내게 주는 의미가 10년 후에도 그 무게를 지니길 바라는 마음은 나의 추억, 나의 행복감이 녹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마음은 바로 이 물질만능시대에 사물과 인간의 존재와 부재에 대한 소중한 의미 찾기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4.
여태 우리가 읽은 수필들의 진정한 의미는 거칠게 말해서 존재와 부재로 추동되는 그 흔적들의 퇴적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존재와 부재하는 대상의 실체를 밝히는 일보다는 서사의 과정 그 자체이다. 서사가 진행됨에 따라 존재와 부재는 절대적이고 완결된 실재와 같이 기능하며, 또한 그 실재를 모색하는 서사는 원래의 그것과는 다른 차이와 닮음이라는 역동적 긴장관계를 이루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수필읽기’는 저자가 설정한 고정된 의미를 포착하는 작업이 아니라, 독자가 나름의 의미를 모색하고 생산해내는 창조적인 작업이 된다. 따라서 ‘수필쓰기’와 ‘수필읽기’는 존재와 부재의 의미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행위이며, 그 재생산의 과정 자체가 곧 의미의 생산 과정이 된다. 다시 말해 의미는 창조된 의미의 저자가 전제해 놓은 것이 아니라, 서사의 과정에서 기호들 상호 간의 유희에 의해 재구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수필은 닫힌 공간이 아닌 독자의 능동적인 참여에 의한 생성과 창조라는 열린 공간이 된다.
서사를 통해 새로운 공간을 구성하는 일은 존재와 부재의 의미를 모색하는 일, 즉 새로운 진실을 만들어 내어 새롭게 생성하는 일과 같다. 진실의 생성이 영원한 것이듯이, 서사 역시도 영원한 것이다. 서사는 바로 존재에서 부재의 의미를 찾고, 부재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는 삶의 작업이기 때문이다.
허상문 -----------------------------------------
문학평론가. 영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문학평론집: ≪문학과 변증법적 상상력≫, ≪현대문학비평론≫, 영화평론집: ≪우리 시대 최고의 영화≫, 산문집: ≪시베리아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실크로드의 지평에 서서≫, ≪바람의 풍경≫ 등 다수의 저서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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