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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4월호, 기획연재] 한국 현대수필의 문체론적 성찰 - 김상태

신아미디어 2013. 5. 17. 08:52

김상태 교수님의 한국 현대수필의 문체론적 성찰에 대한 기획연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독자분들의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 (글 중에 있는 옛글자는 공란으로 표시되어 있음을 양해부탁드리고, 본책에는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으니 참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한국 현대수필의 문체론적 성찰  -  김상태


1. 개화기의 수필


   한국 고전문학은 1900년을 전후해서 신문학으로 바뀐다. 주로 창가, 신소설 등을 지칭하고 있으나 당시로서는 꼭 어느 장르로 구분할 수 없는 글들이 많이 발표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거친 후,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을 통해서 청국淸國과 일본日本의 정치 사회 군사의 제도를 롤 모델로 해서 관제를 개편했다. 신분과 계급의 혁파, 공사公私 노비奴婢 제도의 폐지, 근대적 화폐제도의 수립, 과부寡婦 재가再嫁 등이 중요 골자였다. 교육면에 있어서도 귀천의 구별 없이 학교에 입학시켰으며, 근대적 교육이 실시되었다. 이때부터 고루한 유교 전통과 낡은 인습에서 벗어나 서양의 과학적 지식을 받아들이고, 보편적 교육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를 개화開化 혹은 계몽啓蒙기라고 한다. 이와 같은 개화기의 상황 속에서 이전의 문학과는 다른 새로운 문학을 창조하겠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문학에서도 주류였던 한문 문장에서 탈피하여 평상 사용하는 언어로 표현하려는 움직임이 지식인 사회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언문일치言文一致의 문학으로 전환하기 시작한 대변혁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서사적 논설’ 과 ‘논설적 서사’의 글이 많이 나타난 시기다. 어느 장르에 귀속시키기 곤란한 글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신문학으로 태동하기 위한 준비 기간의 글들이다. 서사물(narrative)로 단정하기도 곤란하고, 논설문論說文으로 단정하기도 곤란한 것도 그 때문이다. 모든 예술을 아우르고 있는 종합예술(ballad dance)이 분화되어 오늘날과 같은 각기 다른 특성을 지닌 예술로 발전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듯이 단기간이지만 신문학으로 개화되기 전에는 일종의 미분화된 장르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1897년 5월 27일 <그리스토신문>에 실린 ‘코기리와 원숭이 니야기’를 서사적 논술의 예로 김영민은 소개하고 있다.1)


   서로 친한 코끼리와 원숭이가 있었는데, 어느 날 각각 자기 자랑을 시작하였다. 코끼리는 자신의 몸이 큰 것과 힘이 센 것을 자랑하였다. 원숭이는 자신이 날쌘 것과 세상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을 자랑하였다. 둘은 우열을 가리기 위해 부엉새에게 가서 판결을 내려달라고 하였다. 부엉새는 둘에게 흐르는 강을 건너 큰 나무 열매를 따오면 판결을 내려주겠다고 답하였다. 둘이 강가에 이르렀을 때, 원숭이는 강을 건널 수 없었으므로 코끼리의 등에 업혀 강을 건넜다. 이어서 큰 나무 아래 도착했을 때는 원숭이가 나무 위에 올라가 열매를 땄다. 둘이 열매를 구해 돌아오자 부엉이는 ‘코끼리는 능히 하수를 건너고 원숭이는 능히 열매를 땄으니, 그 일을 궁구하면 각기 한 가지 재능이 있으니 더 자랑할 것이 없다.’는 말로 판결을 대신하였다.


   “<서사적 논설>의 문체는 이 양식의 발표 매체였던 당시 신문의 문장과 연관성이 깊다. 한글 전용의 신문에 발표된 <서사적 논설>의 문체는 당연히 순 한글 산문체 문장이었고, 언문일치를 지향해가는 문장이었다. 신문은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매체였다. 논설은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는 장르였고, 논설이 등장한 것은 신문을 통해서였다. 따라서 신문의 논설은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의사 표현 양식 가운데 하나였다. 전통적인 조선 후기 단형의 문학 양식들이 신문 논설이라는 근대적 장르와 합류해서 생긴 것이 <서사적 논설>이다.”2)

 서사적 논설에서는 서사가 시작되기 전이나 후에 편집자적 해설이 붙거나 서술자의 교훈적 견해가 있어서 서사적 논술을 독립된 서사로 보기 어렵다고 김영민은 말하고 있다.
   이어서 <대한매일신보>(1905년 10월 29일-11월 7일)에 연재한 우시생의 <향객담화>를 논설적 서사의 출발로 김영민은 소개하고 있다.

 

   한 사람이 말하기를 지금 세계는 휘황찬란하여 우리들의 고루한 소견으로는 알 수 없다. 태서 각국 사람들은 만리타국 나와서도 문명국의 기상을 드러내며 학문으로 업을 삼고 신의로 근본 삼아 애국지심을 드러내거늘, 우리 정부 관리들은 학문이 무엇인지 신의가 무엇인지 애국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이욕을 챙기는 일에만 관심이 있다. 관직을 돈으로 샀으니 부임 후에는 무죄한 평민을 괴롭힌다. 또 한 사람이 말하되 정부를 조직하여 시정 개선을 못한 것은 정부 대신의 책임이요, 시회를 창립하여 일심단체를 못한 것은 인민의 책임이다. 정부 대신 믿지 말고 사람마다 힘을 써서 대한제국을 굳게 하는 것도 인민의 책임이다. 또 한 사람이 말하되 남의 나라 사람들은 자기 돈을 들여 문명국을 유람하며 지식을 배워오거늘 우리나라 관인들은 여비를 주어가며 외국 제도를 시찰하라 파송하여도 아무 생각 없이 갔다 온다. 그런 것들은 어찌 일찍 죽지도 아니 하는가. 또 한 사람이 말하기를, 여보시오 지각없는 말마시오. 그 사람들이 죽게 되면 염라국으로 갈 터인데, 염라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모양 되려고 그 사람들을 잡아가겠소. 염라국 정부 사람들 우리 정부 사람의 식견으로 아지 마시오. 그러자, 그러면 그 사람들은 장생불사하겠네. 참 기가 막힌 일이로다 하며 일장 담화가 모두 시국이 잘못 되어감을 한탄하더라.3)


   이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서사적 논설로 <소경과 안즘방이 문답>를 들고 있으나 이 즈음하여 논설적 서사가 수없이 발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향로방문의생이라>, <거부오해>, <시사문답> 등이 그 예로 볼 수 있다. ‘샤셜’이나 ‘론셜’이란 제목을 붙여 발표되고 있다. ‘론셜’들은 서사의 완성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사문이나 논설문을 통하여 인민을 계몽하겠다는 데 뜻이 있다. “현실을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데에 따르는 부담을 피해가는 방식이기도 하다.”

 

   (A)아세아 서편에 한 동리가 있으니 산이 깊고 땅이 궁벽하야 세상 사람과 상관이 없는 고로 어느 사람이던지 괴로운 일이 있으면 도망하야 그 동리에 와서 사는데 수십 년을 지냄에 촌락이 풍요하고 풍속이 순박하나 다만 그 사람들의 문견이 고루하여 비컨대 우물 안 고기와 같은지라 하로는 동리 사람들이 모여 놀다가 홀연히 생각하기를 천지간에 대주재가 계실 듯하나 우리는 그가 어데 계신지 알지 못하거니와 우리가 참 감사하기는 이 산골에서 흘러 나려오는 물이라 이 물이 아니면 목마를 때 무엇을 마시리요 하고 물가에서 제사하며 물을 대주재로 섬기더니 그 이듬해 봄에 장마가 지매 물이 넘쳐 집이 모두 뜨고 사람이 많이 상하는지라 동리 사람이 서로 놀래어 가로되 우리가 물귀신을 잘 섬기지 못한 고로 이런 재앙이가 있으니 불가불 사람으로 재물을 삼아 물속에 넣으리라 하고 각기 자식을 다리고 물가에서 울더니 홀연이 한 손님이 와서 말하되 공연이 인명을 살해치 말고 나를 따르라 하고 여러 사람을 불러 큰 돌을 운전하야 언덕을 쌓으니 그 후에는 비가 많이 와도 물이 넘어들지 않는지라 무리가 길벗하야 손님에게 치하하되 그대가 대주재로다 하니 손님이 웃으며 가로되 나는 사람이니 어찌 대주재가 되리오 무리가 물으되 그러면 대주재가 뉘시뇨 하고 각각 호미를 메고 밭에 나가 백곡이 비와 이슬에 자라는 것을 보고 절하며 말하되 대주재가 반드시 구름 속에 계시도다 그러나 우리가 그 형상을 보지 못하니 어찌 써 은혜를 갚으리오 손님은 우리를 위하야 대주재의 형상을 만들라 하거늘 그 손님이 나무로 사람의 형상을 새겨 장막 안에 두고 가로되 이것이 대주재가 계신 데라 하니 무리가 다 목인에게 제사하거늘 손님이 탄식하야 가로되 너희가 참 이것이 대주재인 줄 아느뇨 하고 그 목인과 장막을 다 불 사르니 무리들이 놀래거늘 손이 그제야 하늘을 가르쳐 말하되 참 대주재자는 형상도 없으시고 소리도 없으시며 온전히 능하시고 지극히 거룩하사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 하신다 하니 무리가 그제야 깨닫고 다시는 묻지 아니 하고 일심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며 영광을 돌려 보내었으나 이 산중에 사는 백성들이 처음은 어리석으나 나종은 슬기 있는 것이 가히 거울할 만한 고로 이같이 기재하노라. (대한그리스토인회보, 1998, 3, 9. ‘샤셜’ 띄어쓰기, 맞춥법은 필자가 읽기 쉽게 조정함)

 

   당시 신문에 게재되는 ‘론셜’, ‘논셜’, ‘샤셜’ 등의 문체나 내용은 대체로 이와 비슷하다고 보아도 좋다. 대부분의 국문학자들은 이러한 ‘론셜’ 다음으로 ‘신소설’을 가상하고 있다. 근대소설, 현대소설은 그 다음으로 이루어내는 과정의 끝에 두고 있다. 이들 글들은 작품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전제가 놓여 있다. 그러나 이들 글들은 미숙하지만 수필 형태의 글로 볼 수도 있다. 다른 장르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현대수필의 특성과도 연관성이 있는 것이다.

   동서양의 문학사적 발전에 있어서 리듬을 가진 서정시를 예술(문학의 본령)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공통적이다. 산문을 예술의 장르로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근대가 시작되면서였다고 생각된다. 근대소설의 효시嚆矢로 인정하고 있는 세르반테스(Cervantes)의 돈키호테(Don Quixote)는 1605년에 나타났다. 스토리가 있는 서사물이 왜 그 이전에 없었겠는가. 수필의 창시자로 알려진 몽테뉴 역시 그의 수필(Essais)을 집필하기 시작한 것은 1581~5년경이다. 산문으로 된 훌륭한 글들이 왜 그 이전에 없었겠는가. 우선 오늘날로 보면 훌륭한 수필 작품으로 볼 수 있는 글들이 그리스나 로마 시대에 수없이 있다. 그러나 시 아닌 글, 특히 산문으로 된 글이 문학 작품으로 인정되기 시작한 것은 이 즈음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구성이나 언어적 수사에 있어서 완성도가 떨어지기는 하지만 이 시기의 논설이나 서사물을 한국 근대 수필의 시발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문체에 있어서 고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점이 완성된 작품으로 인정하기 곤란한 점일 것이다. 신문학 연구가들은 신시와 신소설만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논설적 서사물에 대해서는 수필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A)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고투의 줄글 형태이다. “……지라”, “물이라”, “상하는지라”, “않는지라”, “계시도다”, “기재하노라” 등의 어미는 종결어미인지 연결어미인지 애매한 문체가 많다. 이는 한 문장 안에서 주어와 서술어가 분명한 근대적 문장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문장이 길어진 것도 그 때문이다. 그 내용보다는 고투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 문체 때문에 신문학의 시대로 들어서지 못한 주된 원인으로 꼽고 있다.
   서재필에 의해 주재된 <독립신문>은 1899년 4월 7일에 발간되었다. 이 신문은 첫 호부터 국문으로 쓰겠다는 사시社是를 밝힌 바 있지만, 그 철자법이라든지, 띄어쓰기 등이 거의 근대 수준으로 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창간일로부터 불과 일주일도 채 안 되는 날짜의 ‘논셜’을 거의 그대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정치학이라  학문은 문명개화 나라에셔들 여러 쳔년을 두고 여러 만명이 자기 평생에 쥬야로 생각고 공부야 든 학문이인데 정부에 관인이 되야 가지고 이학문을 배호지 안하여셔 못쓸지라 이 학문을 안후에도 본래 심지가 그 사은 못된 일 사이 만히 잇데 을며 이학문도 업이가 졍부 잇면 몰나서 잘못이도 잇고 이 글너셔 잘못이도 잇지라 졍부 속에 학문도 업고 도 그 사이 만히 잇면 그 해 백셩이 닙거시오 백셩이 해를 닙으면 나라에 화가 잇거시지 그러면 곳 기 몸에 앙화가 밋칠거시라 지금 죠선서 정치학에 능이만 뽀바 졍부 즁임을 맛길 슈가업거시 정치학을 치지 아니 엿니 엇지 알 사이 잇리요 그거 이 정직 사이나 써야 그 사이 큰 업은 못드라도 잇 법률과 규칙을 슌종터이요 남의게 해 업시 일을 행할 터이니 졍직한 사이나 골나 쓰기를 라노라 …중략… 졍부에 관인이라는 거 님군의 신하요 백성의 죵이니 우희로 님군을 셤기고 아래로 백셩을 셤기 거시라 나라 이러케 되면 님군의 권력이 놉하지고 벡성의 형세가 편 터이니 국즁에 무 변이 잇며 원망과 불평 쇼래가 엇지 잇사리요 우리가 라건대 졍부에 계신 이들은 몸 죠심도 고 라가 되기도 라거든 관찰와 군슈들을 긔들이 천거 말고 각디방 인민으로여곰 그디방에 뽑게면 국민간에 유익 일이이거 불과 일이년 동안이면 가히 알이라 (독립신문 1896, 4, 14. 논셜)

 

   이 글에는 서사는 없고, 집필자의 주장만 제시되어 있다. 그러니까 서사적 논술이 논술적 서사로 바뀌어 갔다는 말은 시간적 차이를 두고는 말할 수 없다. 구태여 말한다면 함께 섞여 있다가 후자가 후에는 다소 우세한 트렌드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 ‘논셜’을 보면, 서정 수필과는 거리가 멀지만 에세이로서 충분히 그 가치를 인정해 줄 만하다. 같은 날짜의 ‘논셜’에서 이런 말로 시작하는 구절이 있다.

 

   여러 사들이 날 다려 뭇기 엇더케여야 관찰와 원 노릇을 잘겟는냐고 기에 오날 우리 신문 우희 그 대답을 니 누구든지 이일을 알고 스분이 이신문을 노코 공부면 유죠 이일 잇기 밋노라

 

   “날 다려 뭇기” 같은 개인 간의 대화를 쓰고 있는 것을 보면, 공적인 언어와 개인적인 대화가 거의 구별되지 않고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독자를 대하는 태도에 신문사 공인으로 말하는 어법과 개인으로서 말하는 어법이 거의 구별되지 않고 있다. 초보 단계의 논설적 수필의 장르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독립신문>에 게재된 ‘논셜’의 띄어쓰기가 근대적 철자법에 근접해 있는 것만 보아도 고전문학의 글쓰기와는 판이하게 달라진 느낌을 받는다. 신문학으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인 듯이 보인다.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소년’ 1908년 게재)나 이인직의 <혈의 루>(‘만세보’ 1906년 연재) 등을 계기로 해서 한국의 신문학이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지만 이들 논설이 발표된 시기와 불과 몇 년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신문학으로의 진행 속도는 전 세계에서 거의 전례가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었고 할 수 있다. 한국근대문학의 발전 기틀은 다름 아닌 문체의 전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음 ‘론셜’은 필자를 오긍션으로 밝힌 글이다.

 

   대저 산이란 것은 흙덩이를 모아 이룬 것이오, 바다란 것은 냇물을 합하여 된 것이라 비유컨대 백성은 물과 같고, 국가는 배와 같고 함장은 임금과 같고 정부는 기계와 같으며 물이 없으면 왕래할 수 없고 배가 있고 함장이 없으면 그 배를 부리지 못하나니 그런고로 물이 있은 후에 배가 있고 배가 있은 후에 기계가 생긴지라 …중략… 그 맥주 한 잔이라도 제 돈 들여 먹지 못하고 남의 덕에 취하여 당장만 생각하고 이후는 생각지 아니하니 만일 그 사람이 맑은 술 한 잔을 주었더라면 대취는 고사하고 제 몸까지 그 사람에게 가서 종노릇하여 가면서 제 계집까지 종노릇시키려고 하는지 제 한 몸만 생각하여 남이 달라는 대로 모두 주고 이천만 동포는 생각지 않는지 …중략…왜 그 술을 먹고 그 사람 달라는 대로 주었던고 할지라 슬프다 남의 것을 제 것 같이 주는 몸은 누구며 달라는 놈은 누구요 우리나라 동포들은 아무쪼록 일심하여 동양에 일본과 서양에 영미국을 부러말고 동등으로 생각하여 못된 일 하는 놈은 세계에 행세를 못하게 하고 무례히 실례하는 놈이 있거든 분한 마음을 내어 대적할 뿐 아니라 세계에 내노라 하고 우리도 남보고 좀 달라고 하며 남에게 종노릇하기를 부끄러워하고 아무쪼록 일심하여 학문을 힘쓰고 분기를 내어 남이 나를 빰 치거든 나도 대적하여 치고 남이 내 나라를 대하여 실례하거든 몸이 죽더라도 분풀이 할 생각들 하시고 무슨 일이든지 옳은 일에 죽는 것은 영광으로 아시오 (협성회의보, 1898, 3, 12 오긍선)

 

   국가 간의 일을 가정 집 간의 일과 같은 수준으로 생각한 글이다. 오늘날 같으면 신문의 칼럼 같은 글이지만 공적인 문체가 아니다. 당시 지식인의 수준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의염치를 먼저 생각하는 유교적인 사고 방법으로 국가 경영을 비유하고 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구체적인 사실을 통하여 대의를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신문의 사설과는 다른 개인사를 다룬 수필과 비슷하다. 공적인 사설과 개인적인 수필과 아직도 미분화 상태인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당시 유행하는 패턴의 하나다.
   밑줄 친 어미를 보면, 역시 종결어미인지 연결어미인지 애매하다. 감탄으로 끝내는 종결법도 그중의 하나이지만, 이 감탄 종지도 종결어미가 아니라 연결어미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2. 서유견문西遊見聞


   <서유견문>은 유길준(1856-1914)이 1895년 한국 최초로 국한문 혼용으로 기술한 기행문으로서 서양의 근대문명을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한 책이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래 순 국문으로 기술된 기록이 많지는 않지만 더러 있다. 내간도 그중의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저술이 개화기의 언문일치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는 것은 잘못된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때까지 우리말을 기술하는 언어 실정을 안다면 수긍할 수 있는 일이다. 관공서는 물론이고 모든 공식문서에서 실제로는 한문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 이 저술이 왜 그토록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지 이해하게 된다. 유길준은 1894년 이후 외아문참의겸군국기무처회원, 의정부도헌, 내각총서, 내무협판 내부대신 등 요직을 지낸 인물로서 한국의 개화문화를 사실상 주도한 인물이다. 바로 그 점에서 그가 국한문 혼용문을 최초로 썼다는 점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언문일치言文一致의 면에서 본다면 국한문혼용문은 고전소설이나, <한중록閑中錄> 혹은 내간內簡 등에 비하여 일단 후퇴된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은 국가의 공식문서에 속할 수 없었다는 점, 관료 혹은 국가적 엘리트에 의하여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기록으로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훈민정음은 국가적 공용문자로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유길준의 <서유견문>에 의해서 비로소 문자로서의 그 유용성과 가치를 인정받게 된 셈이고, 문자로서의 지위가 역전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그 세력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한국의 언어생활에 있어서 주류를 이루었고, 한국의 기본적인 문자로서 정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의의를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물론 이 저술만으로 그 역전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뜻이 아니다. 몇 년을 사이에 두고 이런 우군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나기 시작했던 것이고, 이제 더 거부할 수 없는 한국 문자생활의 본령이 된 것이다.

 

   夫邦國은 一族의 人民이 一方의 山川을 割據야 政府를 建設고 他邦의 管轄을 不受 자이니 然 故로 其國의 最上位 占한 者  主며 最大權을 執 者도 其君主라 其人民은 其君主 服事며 其 政府 承順야 一國의 體貌 保守고 萬姓의 安寧을 維持 一國을 比건대 一家와 同야 其家의 事務 其家가 自主야 他家의 干涉을 不許고 又一人과 同야 … (西遊見聞第三編, 邦國의 權利)(띄어쓰기 필자)

 

   한 문장이 길어서 한 면 내지 두 면이 되고 있다. 한문漢文 문장을 쓰던 전통이 그대로 이어진 조사법措辭法이다. 그러나 유길준은 1896년에 창간한 <독립신문>에서도 중요한 멤버로서 참가하였다. 알다시피 <독립신문>은 순 국문의 신문이고, 철자법 띄어쓰기 등이 근대문법에 거의 근접해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유길준의 언문일치 사상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특히 그는 1895년경부터 외국 서적을 참조하여 <조선문전朝鮮文典>을 저술하고 있었던 것은 우리의 국문에 대하여 그만큼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후에 최광옥의 이름으로 <대한문전大韓文典>이란 이름으로 출간되었지만 실제로는 유길준이 저술한 것이다. 이 저서에서 확실한 그의 언어관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말의 문법체계를 처음으로 정리한 저술이라고 할 수 있다.
   유길준은 그 <서序>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 책이 완성된 지 며칠 후에 어떤 친구에게 보이고 그 비평을 청하였더니, 그 친구가 말하기를, “자네의 뜻은 퍽으나 수고로웠네만 우리글과 한자를 혼용한 것이 문필가의 본궤本軌를 벗어나서 구안자具眼者의 비웃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에 유길준은 답하기를 “이것은 그 이유가 있으니, 첫째는 말뜻을 쉽게 하기 위해서 문자를 대강 이해하는 자라도 알 수 있기 위함이고 둘째는 책을 읽은 것이 적어서 글 쓰는 것에 미숙하므로 쓰기에 편리하게 하기 위함이고 또한 세계의 안방을 두루 돌아보건대 각국의 언어와 문자는 나누면 둘이고 합하면 하나이니, 우리 문자는 곧 선왕조에서 창제한 글자이고 한자는 중국과 통용하는 것이다. 나는 오히려 우리글을 전용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다.”4)

   필자의 근대적 언어관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을 것을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우리 문학의 기술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은 기독교의 성경 번역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그 전체로서 한글에 대한 초보적인 연구가 나타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5)이라고 한 말도 그 점을 지적한 말이다. 번역하면서 국문의 중요함을 깨닫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만주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로스와 매킨타이어 목사가 이응찬, 백홍준 등의 도움으로 1882년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번역하였고, 1887년에는 신약전서 전권인 <예수셩교젼서>를 간행했던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이정현이 선교사 루미스의 권고에 의해 1883년 <신약성서 마태전>, <신약성서 마가전>, <신약성서 요한전> 등을 번역하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한국에 입국하였을 때 이 성서를 가지고 와서 신자들에게 읽혔던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국문보급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며, 신문학을 열어가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된다.6)

 

3. 리얼리즘의 세례


   이앤 와트(Ian Watt)는 ≪노블의 흥기(The Rise of the Novel)≫라는 저서 에서 18세기 초 비슷한 시기에 출현한 영국의 세 소설가 데포(Defoe), 리처드슨(Richardson), 필딩(Fielding) 등의 소설들을 분석하면서 그 속에서 발아發芽하고 있는 근대정신을 확인하고 있다. 이 새롭게 출현한 소설들을 당시 노블(novel)이라고 불렀다. 같은 서사물이지만 그 이전의 얘기들(stories)과는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즉 “노블의 리얼리즘은 표현하는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나타내는 방법에 있다.”라는 것이다. 우선 그 이전의 얘기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세계관을 담고 있다고 했다. 그 정신적 기반을 뭉뚱그려 ‘리얼리즘’이라고 불렀다. 와트는 문예사조상의 리얼리즘과는 구별하기 위하여 이를 ‘formal realism’이라고 불렀다.
   (A) 데카르트의 위대성은 우선 새로운 방법의 추구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실제 경험에서 찾지 않은 진리, 다른 사람의 말을 신뢰해서 얻어진 진리는 어떤 위대한 사람의 설득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결의의 철저성에서 그는 진리 탐색의 길을 출발한다. 그의 방법론에 대한 강의(Discourse on Method(1637)와 명상(Meditatons)은 근대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세계관을 담고 있는 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진리의 추구는 전적으로 개인적인 문제로 생각되며, 논리적으로 과거의 사상적 전통과는 독립된 것이며, 그 전통을 떠나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이 개성(individualism)이다. 이전의 문학적 형태는 문화의 일반적 전통에 따르는 경향이 있었다. 이전에는 희랍 로마의 비극, 서사시, 혹은 송시(ode) 등이 중요한 문학소재가 되어 있었지만 노블은 개인적인 경험이 중요한 소재가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이 독창성(originality)이라고 할 수 있다.
   (B) 두 번째는 “의식의 직접적인 사실에서 출현하는 사상”이다. “이것은 보편적인 것에 대한 거부이며, 철학적 리얼리즘으로 특징짓는 특수한 것에 대한 강조”로 나타나고 있다. 이전과는 다른 문학적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며, 전형화된 인물이 아니라, 개개의 성격화와 구체적 배경의 묘사로 나타난 것이다.
   (C) 세 번째는 일상에서 흔하게 만나는 고유명사의 사용이다. 이전의 서사물에서도 인물에 대해서 고유명사가 주어지기는 했지만, 그 인물들은 개성적인 실재의 인물로서 구체화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D) 네 번째는 인물의 정체성이 이전에는 실제의 인물로서 구체화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로크는 시간의 지속을 통하여 의식의 지속성을 인물의 정체성으로 규정했는데 개인은 그의 과거 사상이나 행동의 기억을 통하여 지속되는 정체성과 부단히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형태나 현상은 구체적인 대상 뒤에 존재하는 이데아가 궁극적인 실재라고 생각했다. 이는 플라톤의 철학에 영향을 받고 있는 세계관이었다. 그리스 로마의 철학과 문학은 모두 수시로 변하는 현상을 뛰어넘어서 이데아 속에서 구축하는 불변의 진리 속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포스터(E. M. Forster)는 이를 한마디로 “가치의 삶”(life by values)에서 “시간의 삶”(life by time)으로의 전환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를 근대의 시작이라고 표현했다.
   (E) 다섯 번째는 이전과는 다른 배경의 문제다. 비극, 희극, 로맨스에 있어서는 배경이 전통적으로 일반적이고 애매했다. 그러나 노블에 와서는 공간과 시간이 상호 연관되어 개인적이고 특수한 경우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두 개의 차원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과 같다. ‘present’와 ‘minute’라는 말이 각기 서로의 연관된 차원을 가리키고 있는 사실에서 충분히 암시받을 수 있다.
   (F) 다음은 산문 문체로의 전환이다. 이것은 개인의 실제 경험을 정직하게 기술하려는 의도에서 산출된 것이다. 소설에 대한 이전의 문체적 전통은 근본적으로 말과 대상 간의 대응에 관심을 두지 않고, 수사를 사용해서 묘사와 행위에 주어지는 외적인 미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데포나 리차드선은 이미 수용된 산문 문체의 규범과 단절하고 있는 것을 본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때로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와 문맥이 선택될 때도 있다.
   와트의 분석은 노블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수필에 적용시키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개화기 문학은 고전적 문학관에서 근대 문학으로의 이행을 의미하기 때문에 반드시 소설이 아니라도 고전적 세계관과 근대적 세계관 사이의 간극을 볼 수 있다. (A)에서 독창성이 문제되는 것은 수필도 마찬가지다. 당시 무서명의 글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B)에서 구체적인 사실에 그 소재의 눈을 돌리고 있지 못하는 사실을 볼 수 있다. (C)에서 저자나 글 속의 인물들이 확실한 고유명사를 갖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은 수필도 마찬가지다. (D)에서 ‘가치의 삶’에서 ‘시간의 삶’으로의 전환은 세계관의 일대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소설에서처럼 확실하게 확인할 수 없지만, 그 예인적인 서술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F)에서 아직도 창가나 운문적인 글쓰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현상에서 산문 문체의 정립은 불완전하고 보완해야 요소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신문학이나 근대문학 속에서 전개하고 있는 구체적인 작품을 통하여 그 문체적 전환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살펴보면서 확인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1) 김영민, 한국근대소설사, 솔출판사, 1997, 23면.

2) 전게서, 43면.

3) 김영민의 전게서, 58면.

4) 유길준 저 최근덕 역, 삼성미술문화재단, 1986, 서문.

5) 이만열, 한국기독교문화운동사, 대한기독교 출판사, 1987, 446면.

6) 김병학, 한국개화기 문학과 기독교, 열락, 2004, 참고.

 

 

김상태  ------------------------------------------
   전북대·한양대·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역임,  한국비교문학회·한국현대소설학회 회장,  현, 이화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생활수필쓰기 지도,  저서-수필집 ≪참말과 거짓말 사이≫, ≪여자대학의 촌티 나는 교수≫, ≪먼 꿈 가까운 꿈≫, ≪선생님 우리 선생님≫, 콩트 ≪유리구슬≫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