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정말 좋은 것들을 생각해 보았다. 좋은 것들이 너무 많아서 놀랍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언제든 할 수 있으니 그 또한 좋다. 이 좋은 것들을 이만큼 나이가 들고서야 알았으니, 지금 정말 좋은 것은 ‘나이 듦’이다."
지금 정말 좋은 것은 - 허창옥
플라타너스 가지들이 바람에 건들건들 흔들린다. 가지들이 건들거릴 때 넓고 푸른 잎사귀들도 앞과 뒤를 이리저리 뒤집으며 바람을 즐긴다. 보이지 않지만 그 뿌리도 이때 세포를 한껏 열고 토양을 만족스럽게 받아들일 터, 우듬지의 마지막 한 잎조차 그 숨결을 놓치지 않고 깔깔대고 있으려니. 지금 저 나무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근심을 내려놓는다. 천상과 지상 사이에 바람이 있고 햇살이 있어서 나무가 살아있다. 나도 살아있다. 살아있음이 좋다.
등짐이 무겁다. 고뇌에 짓눌린다. 병고가 괴롭다. 만만치 않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으나 다 헛소리다. 지금 숨 쉬고 문자판을 두드리면서 세상의 온갖 소리를 듣는 것이 정말로 좋다. 소리라! 그랬다. 한때는 소리가 싫어서 고요를 넘은 적요를 원했었다. 때에 따라, 곳에 따라 혼자 있기를 그래서 모든 소리가 멎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하지만 이즈음 소리들이, 온갖 소리들이 점점 좋아진다. 소리가 좋아진 건 아흔의 할머니가 텔레비전 볼륨을 한껏 올려놓는 까닭을 짐작하면서부터이다. 소리는 할머니에게 매순간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장치였다. 할머니는 적막이 싫었다. 소리가 멈춘다는 건 곧 죽음을 의미했던 게다. 꼬맹이들의 재재거리는 말소리가 세상을 채운다. 수다에 열 올리는 파마머리 여자들의 시끌시끌한 말소리에는 사람살이의 인정이 배어있고, 온갖 애환이 서려있다. 시시비비 언성을 높여서 이 할망구 저 영감탱이! 삿대질하는 어르신들 아직도 정정하시다. 그 소리들이 없는 세상은 상상도 하기 싫다. 소리들이 좋다.
<정선아리랑>이 굽이굽이 핏속을 돌아다니고, <진도아리랑>이 어깨를 흔든다. <회심곡> 구절구절 쳐대는 꽹과리 소리가 내 한생을 돌아보게 하고, 대금소리, 가야금 소리 가슴에 녹아든다. 징소리 꽹과리 소리, 사물놀이도 신명이 난다. 정장에 핸드백을 들고라도 그 판에서 춤을 추고 싶다. 내 몸속에서 주체할 수 없는 흥이 솟구쳤다가 하릴없이 고꾸라지곤 한다. 내 속에 가락이 있는 줄 모르고 살았다. 언젠가부터 오전에 한 시간, 오후에 한 시간 우리 고전음악을 듣고 있다. 물론 일하면서 듣는 것이기에 무심히도 들었고, 시조창이나 판소리가 하염없이 길어지면 지루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락은 시나브로 내게 스며들어서 이젠 그게 본시 내 것인 양 편안하고 신명이 난다. 내 속에 가락이 있었다. 가락이 좋다.
자로 잰듯 살다가 그렇게 너무 오래 살다가 이게 뭔가 싶어서, 놓아버리자 싶어서 낮잠을 자기 시작했는데 그게 여간 달콤하지가 않다. 졌다, 나한테 내가 지고 말았다. 자고 나니 편안하고 편안하니 잠이 쏟아졌다. 하여 다른 일이 없는 휴일엔 일부러라도 낮잠을 잔다. 낮잠을 자버려서 긴 밤을 뒤척일 때도 있지만 괜찮다. 이미 낮잠의 달콤함, 그 게으름의 진수를 맛본 터이다. 늦은 아침밥을 먹고 잠시 텔레비전을 보다가 지루해지면 누워서 읽던 책을 편다. 페이지를 넘기면서 아파오는 팔과 무거워지는 눈이 나를 오수로 밀어 넣는다. 그 순간의 나른한 만족감을 표현할 길이 없다. 잠에서 깨서 목을 축이려고 냉장고로 가다가 문득 내다본 창밖 풍경이 멋지다. 먼 산 능선도 그대로 푸르고, 고가도로 위의 자동차들도 비슷한 속도로 달리고 있으며 신천의 물도 가늘게 주름져서 흐르고 있다. 잠든 동안에도 세상이 그대로 있어줘서 고맙다. 잠에서 깨어난 아기가 눈앞에 엄마가 있음을 확인하고 울지 않듯 세상이 그대로 있어줘서 나는 안도한다. 몸도 마음도 편안히 내려놓는 한두 시간의 다디단 낮잠이 또한 좋다.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것들이 나이 들어 새록새록 좋아진 것이다. 이 몇 가지, 그리고 여기에 다 쓰지는 못했지만 좋아하고 고마운 일들을 한 줄에 꿸만한 공통점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 다소 산만한 몇 가지들이 그러나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틀림없다. 바람에 건들거리는 나뭇가지들과 거기서 노니는 수천수만의 잎사귀들이 나를 살아있게 하고, 사람들이 내지르는 그 온갖 소리들에 동류의식을 느낀다. 젊어서는 클래식이나 팝을 좋아했다. 이젠 흘러간 유행가가 가슴에 사무친다. 우리가락이 진정 내 것이란 생각이 든다.
돈에 쪼들리듯 시간에 쪼들리며 살아왔지만 되돌아보면 아무것도 이룬 게 없다. 마지막까지 시간에 나를 묶어두지 않겠다. 만년은 여유롭게, 적당히 게으르게 보내고 싶다. 낮잠 늘어지게 자고 찢어지도록 하품을 하다가 한참을 멍하니 앉아서 자신도 타자도 세계도 잊어버리고 해가 지는 것도 잊어버리면 참 좋겠다.
지금 정말 좋은 것들을 생각해 보았다. 좋은 것들이 너무 많아서 놀랍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언제든 할 수 있으니 그 또한 좋다. 이 좋은 것들을 이만큼 나이가 들고서야 알았으니, 지금 정말 좋은 것은 ‘나이 듦’이다.
허창옥 ----------------------------------------
월간 ≪에세이≫ 등단, 수필집: ≪말로 다 할 수 있다면≫, ≪길≫, ≪먼 곳 또는 섬≫, 산문집: ≪국화꽃 피다≫. 수필선집: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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