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것들에 애정을 갖는 순간이 있다. 그래서 나는 어둠 뒤에 깊숙이 숨은 허름한 감정의 선까지 받아들일 수가 있다. 잠자고 있는 나를 보면서 침묵으로 그렸을 광활한 세계의 펼침을, 아침이면 잠에서 깨어나 침대의 언덕에 앉아 그 미묘한 길의 흔적을 따라 한참을 보게 된다. 어둠 안에 존재하는 것들을 사랑한다 하면서 고단하여 휴식을 취하고 있을 달팽이의 이름을 불러보기도 한다. 어쩌면 서로가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하다."
달팽이가 오는 시간 - 편성희
그 동네 엘리아에 들어섰을 때 종업원은 마치 나를 어제 보고 오늘 또 만난 것처럼 친근한 인사를 건네왔다. 나도 그를 어디선가 본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체인점 안 종업원의 모습은 우리 동네에서 나와 같이 지내다 온 사람처럼 그렇게 낯설지 않다.
반듯하게 다듬어진 도랑을 따라 사람들이 걷는 모습이 보인다. 길보다 낮은 길을 걷는 사람들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곳, 대도시의 그런 낯섦이 나와는 일치하지 못하는 부대낌을 준다. 빈틈이 없이 메워져 있는 하늘과 땅, 그 도시 안에 들어선 나는 벌써 침묵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 동네 어디엔가 골목길을 찾아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한 사람을 만나러 급하게 올라온 나는 미아처럼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다.
치즈스틱이 굳어가고 커피의 양은 줄어들고 있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와야 할 시간에 그 동네에서 오래 묵은 한 사람이 방금 방에서 나온 차림 위에 낡은 잠바를 걸치고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들어와 커피 한 잔을 시켜 들고 한쪽 구석으로가 자연스럽게 앉는다. 항상 그곳이 그의 자리였던 것처럼 앉자마자 가방을 풀고 한 권의 책을 꺼내 책장을 넘기기 시작한다. 그러다 갑자기 마른 햇살을 돌돌돌 말듯 중얼거리며 콕콕콕 활자를 씹는 소리를 내다가 천천히 커피를 마시면서 참고서를 넘기는 자연스런 모습에서 나는 순간 절망을 안는다. 저 청춘이 녹아나는 시간, 침묵 안에서 부서지는 음악 소리를 혼자 들으며 세상을 잊어가는 욕망의 허물어짐에 두려움을 느낀다. 세상 앞에 홀로 서 있는 모습이 곧 나이며 골목길을 걸어 내려오고 있는 그일 수도 있다.
묵은 도시 안에서 새 꿈을 꾸는 사람들은 낯선 것을 대신하는 침묵에 익숙해지면서 스스로의 구멍으로 파고들어가고 있다. 침묵이 만들어내는 무한한 공간에 집을 지으며 사유의 시간을 만들어 가고 있다. 그곳에 살면서 또한 그곳에 있지 않은 듯 그곳의 거리는 비밀스럽게 요란하며 낯설고 고요하다. 그는 지금 때때로 내게 전해온 골목의 소식처럼 백반집 앞을 지나 제철 과일을 싸게 판다는 과일가게 앞과 세탁소, 약국을 거쳐 내려오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급한 샤워를 하느라 조금 늦어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좋겠다. 후회하지 않는 모습으로 당당하게 내 앞에 나타나 다시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약간의 허풍을 떨면서 어떤 형식을 빌어서든지 아주 반갑게, 놀라운 표정으로 웬일이세요? 해줬으면 좋겠다. 처음 본 나를 다시 만난 듯 반가운 인사를 했던 종업원처럼 정을 담뿍 담아서 그 알 수 없는 도시를 찾아온 나를 향해 그 땅의 점령자처럼 인사를 건네면 나는, 지금의 이 쓸쓸함을 잊고 화들짝 놀라며 일어설 것이다.
어젯밤 나를 찾아온 친구는 날이 새도록 사람에 대해 방관하는 나를 질타했다. 나대로의 의미인 멀리 두고본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확인한다는 것과 정답이 있는 세상의 명료함의 정당성을 들어 틈이 있는 시간 족족 채근을 했다. 부정확한 것에 대한 확인과 지극한 애정의 표현을 과감하게 보여야 한다는 말에 한쪽으로는 수긍을 하면서 움직임의 느낌 없이 서서히 다가오는 것들에 길들여진 나는 밤새 흔들렸다.
그래서 그저께 밤까지 내가 잠든 사이에 밤마다 내 창을 타고 다니며 그림을 그리는 달팽이를 어젯밤에는 만나지 못했다. 날이 새도록 불이 켜있는 창을 달팽이는 어느 구석에 숨어서 지켜봤을까, 느린 촉수를 이리저리 바지런하게 굴렸을 달팽이, 자신의 정체를 결코 드러내는 일 없이 내가 잠든 사이에 환상의 그림을 창 가득 그려놓고 미끄러지듯 숨어버리는 달팽이가 낯선 사람의 출현으로 빛에 떠밀려 어느 구석에 숨어 있다가 내게 올 기회를 놓쳐 버렸다. 끈끈한 액을 밀어내며 자신의 마음을 풀어쓰는 비밀의 문자들을 어젯밤에는 어디에다 감춰뒀을까, 그것이 사랑이었거나, 절망이었다 해도 나는 다 받아 주었을 텐데 쓰지 않고 숨겨 두었을 문자가 못내 궁금하다.
사라지는 것들에 애정을 갖는 순간이 있다. 그래서 나는 어둠 뒤에 깊숙이 숨은 허름한 감정의 선까지 받아들일 수가 있다. 잠자고 있는 나를 보면서 침묵으로 그렸을 광활한 세계의 펼침을, 아침이면 잠에서 깨어나 침대의 언덕에 앉아 그 미묘한 길의 흔적을 따라 한참을 보게 된다. 어둠 안에 존재하는 것들을 사랑한다 하면서 고단하여 휴식을 취하고 있을 달팽이의 이름을 불러보기도 한다. 어쩌면 서로가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하다.
골목길을 바쁘게 내려와 우리 앞에 와서 서툴게 인사를 나누는 그는 달팽이의 집에서 막 나온 모습과 같다. 세상을 아직도 즐기지 못하는 청춘의 고뇌가 묻어나 보인다. 어디쯤에서 약속된 미래는 오고 있는 것일까, 끊임없이 미래를 당겨보고자 하지만 더디게 세상은 다가오고만 있다. 그의 슬픔의 밑바닥에는 어떤 노래들이 고여 있을까, 언제쯤 나는 그의 노래를 생경하게라도 들어볼 수 있을까. 그의 내부 깊숙이 숨겨진 신비로움을 발산할 기회는 오고는 있는 것일까.
나의 상념이 그의 고민과 일치한다는 것을 어둠을 같이 건너온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안다. 아주 어두워져야 밖으로 나오는 달팽이처럼 -밤은 그의 세계이며 곧 빛이 되고 만다.- 그의 청춘은 결코 단조롭지 않다. 흔들림이 보여서 안타깝지만 그것이 세상에 대한 그때만이 가지는 청춘의 절대적인 힘, 절망이라는 것을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를 보면서 받아들이게 되었다.
돌아오는 시간, 나는 어느 만큼에서 깊은 잠의 수렁에 빠지며 점점 달팽이의 집으로 기어들어가듯 유리창 가득 스미는 빛이 내는 반짝임을 싸안으며 어딘가로 무한 질주하였다.
놓고 온 사람에 대한 기대인가, 어젯밤 만나지 못하는 달팽이를 향한 발걸음인지 모르게 그냥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 기억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편성희 -----------------------------------------
수필집: ≪꽃 지는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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