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박한 풍수관으로 짚어 본다면 일자문성은 장상배출將相輩出의 대길격大吉格이요, 노적봉은 오행으로 보아 금성산金星山이 틀림없으니 노적가리를 보는 듯 배가 부르다. 우리 집 자리가 명당일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종일 햇빛이 맑으니 적어도 무해지지無害之地는 될 듯싶다. 김수증처럼 정사精舍를 짓는다는 것은 언감생심한 일이요 형편을 보아 한 칸 남짓한 모사茅舍나 꾸미고 나의 호가 무루당無漏堂이니 문패를 그리 써 붙이고 모사기茅舍記나 쓰면서 여생을 보낼 생각이다."
청람산의 봄 - 이인희
김화金化의 대성산에서 떨어져 나온 수리산의 용맥(산맥)이 남쪽으로 비틀거리며 내려오다가 큰 계곡을 만나 문득 취기봉醉氣峯을 이루며 멈춘다.
황소 한 마리가 화악산化岳山을 향해 머리를 두고 앉아 되새김질을 하며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형국이다. 여기가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용담리 청람산靑嵐山이다.
눈 잣대로 짚어 황소의 가슴부위쯤이나 될까, 거기에 묵정밭이 천 여평 있었는데, 보은사 주지스님이 산세가 좋으니 사두기를 권했던 것이 어언 십여 년이 되었다.
청람산을 감돌아 흐르는 개여울에는 침식된 암반岩盤이 이무기처럼 다붓다붓 등허리를 수면 위로 내밀고, 그 위에 앉아 물속을 응시하고 있는 백로의 모습은 자못 선정삼매禪定三昧에 든 노승老僧의 자태요, 주변으로 번져있는 물안개는 한 폭의 선경화仙境畵를 품어 안는다. 나도 선인仙人이 되어 그 품안에서 무위삼매無爲三昧다.
동남쪽으로 해발 1468m의 화악산과 서쪽으로 백운산이 의젓하고 크고 작은 산들이 첩첩으로 산을 업었다.
흐르는 계곡물에 건각健脚을 딛고 있는 기암괴석들. 산수유, 산당화며, 개나리, 진달래가 산불을 태우고, 물가에 번져있는 물철쭉은 꽃뱀이 되어 구불구불 사행천蛇行川을 이룬다.
치마폭처럼 흘러내린 화악산 계곡마다 용틀임으로 피어오르던 운무雲霧들이 아침햇살에 힘없이 자진自盡해 버리는 뜻은 염량세태炎凉世態가 싫어서 청산계곡으로 숨어드는 은둔자의 행각이던가…….
물고기를 몰던 아이들의 재잘거리던 소리도 여울에 휩쓸려 잦아든다.
언뜻 탄공선사呑空禪師의 휘호揮毫가 떠오른다. 선사께서는 118세를 향유하신 고승이시다. 그분이 107세에 쓰신 한시漢詩 족자簇子가 내 방에 걸려있는데 그 내용이 청람산 계곡을 읊은 것 같아서 다시 풀어 적어본다.
靑山不墨萬古屛, 流水無線千年琴 - 百七歲 呑空
청산은 그리지 않았건만 만고의 병풍이요,
흐르는 물은 줄이 없으되 천년의 거문고로세.
청람산 오지랖에 펼쳐진 산하풍광山河風光은 어느 묵객墨客이 만고병풍에 그려 넣은 한 폭의 수묵화水墨畵더냐…….
숙종조 대代의 문신文臣 김수증金壽增은 평강군 현감으로 제수받아 임지로 가는 길에 이런 절경에 흠탄하여 자기의 호号를 곡운谷雲이라 칭하고 아홉 굽이[九曲] 아름다운 계곡을 선택하여 이름을 짓고 곡운구곡谷雲九曲이라 그의 정사기精舍記에 적고 있다.
그 일곡一曲이 방화계傍花溪요, 청옥협靑玉峽, 신녀협神女峽, 백운담白雲潭, 명옥뢰鳴玉瀨, 와룡담臥龍潭, 명월계明月溪, 융의연隆義淵, 첩석대疊石坮 등이다.
용담리龍潭里라는 우리 마을 이름은 와룡담에서 와臥자를 떼고 인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곡운 김수증은 명문대가에 태어났으나 성품이 우아하고 고상한지라 숙중15년 기사환국己巳換局에 동생 수항(영의정)과 송시열이 사사되고 형 수흥이 죽으니 서인西人의 세력이 기울게 되면서 벼슬도 마다하고 사탄史呑(현재 사내면)에 들어와 곡운정사谷雲精舍를 짓고 주자朱子삼매에 빠져 30년간의 은둔생활을 여기에서 한 것이다.
그동안 생업에 매달려 자주 찾지 못하고 여가가 있을 때마다 내려가 석축도 쌓고 이름있는 나무들도 사다 심었으나 제대로 가꾸지 못한 탓으로 제 모습을 갖추지 못한 것이 내심 미안했지만 제멋대로 많이 자라서 낯설어 보인다.
해마다 여름방학이 되면 손주놈들이 와서 바캉스를 즐기기 때문에 그들의 의지처로 지어 놓은 원두막이 고즈넉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내가 손수 지은 것이어서 이태만에 준공(?)을 한 것이 벌써 7년이 지났나 보다.
아무리 무더운 여름철이라 해도 해만 지면 화악산이 뿜어내는 싸늘한 한기가 용담리 계곡을 표표飄飄히 덮어 내린다. 혹여 어린것들의 건강이 염려되기로, 컨테이너 하나를 장만하여 전기판넬을 깔고, 싱크대와 냉장고를 들여놓고 보니 훌륭한 콘도가 된 것이다. 뒷산 옹달샘에서 솟는 생수를 끌어 식수난을 해결하고, 샤워실 겸 수세식 화장실까지 만들어 놓았으니 이만하면 별장임에 넉넉함이요, 야영에 필요한 하우스 그늘막도 헛간 삼아 지어 놓았으니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 우리 집이 된 셈이다.
올해는 생업을 놓고 봄부터 아내와 함께 여기에서 여름을 즐겼다. 칠백 평 남짓한 밭뙈기는 다루기가 버거워 동리 사람에게 도조賭租를 주었고, 집 주변으로 남은 삼백여 평에는 호박도 심고 옥수수며 고구마, 토마토 등속들을 심어 놓았다. 아내도 꽃모종을 가꾸며 여념 없이 여름을 보낸 것이다.
원두막에 앉아 주변을 조망眺望해 보면 멀리 서남방으로 일자문성一字文星이 그어져 있고, 가까이로는 물 건너 아담한 노적봉露積峯이 안산案山으로 보국하고 있는데 실백나무 무성한 숲 사이로 백로가 너울너울 나드는 풍정은 보는 이를 황홀케 한다.
천박한 풍수관으로 짚어 본다면 일자문성은 장상배출將相輩出의 대길격大吉格이요, 노적봉은 오행으로 보아 금성산金星山이 틀림없으니 노적가리를 보는 듯 배가 부르다.
우리 집 자리가 명당일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종일 햇빛이 맑으니 적어도 무해지지無害之地는 될 듯싶다.
김수증처럼 정사精舍를 짓는다는 것은 언감생심한 일이요 형편을 보아 한 칸 남짓한 모사茅舍나 꾸미고 나의 호가 무루당無漏堂이니 문패를 그리 써 붙이고 모사기茅舍記나 쓰면서 여생을 보낼 생각이다.
이인희 -------------------------------------
≪시대문학≫ 수필 등단, 저서: ≪당신은 죽으면 어디로 갈거요≫ 공저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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