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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4월호, 지상에서 길찾기] 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 심인자

신아미디어 2013. 5. 11. 08:14

"오늘따라 너의 외할아버지가 왜 그리 그립고 생각나는지 모르겠구나. 우리 딸이 장성해서 시집을 가고 아이를 낳으면 엄마 얘기를 어떻게 들려줄지 궁금하구나. 좋은 추억거리를 많이 만들어 줄게."

 

 

 

 

 

  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  심인자


   딸, 오늘은 잠이 쉬이 오지 않네. 너의 외할아버지 기일이 며칠 남지 않아서 그런가 봐. 자꾸 어린 시절이 생각나는구나. 외할아버지가 궁금하다고 했지. 눈 감고 상상하며 잘 그려 봐.
   엄마가 예닐곱 살이었으니 아주 어렸을 때 일이야. 새벽녘에 선잠이 깨면 베개를 안고 무작정 아래채로 내려갔어. 인기척에 눈을 뜬 너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동시에 반겨주셨지. 방파제에 떠밀려왔다 다시 쓸려나가는 파도소리가 참 포근하게 들려와 스르르 눈이 감기곤 했지. 더구나 부모님 가운데에 누웠기 때문에 자장가 소리로 들렸을 거야.
   포근함도 잠시, 나의 단잠을 깨우는 소리가 있었어. 고깃배의 투박한 기계음 소리야. 통, 통, 통. 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려왔어. 그것은 어른들이 일어나야 할 때를 알리는 알람소리였지. 이른 시간에 논에도 나가고, 바다에도 나가야 했으니까.
   할아버지는 라디오를 켜셨지. 제일 먼저 뉴스부터 들으셨어. 그 다음은 언제나 수순이듯 일본 방송 채널에 귀를 모으셨지. 너의 할아버지는 그곳에서 한참 동안 사시다가 해방되기 전에 나오셔서 일본에 관심이 되게 많으셨던 것 같아.
   그날도 할아버지는 일본 방송을 들으시곤 그 얘길 해 주시겠다는 거야. 무슨 얘길 하시려나 궁금했는데, 동화였어. 너무 재밌어서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지. 두 가지였는데 차례로 해 줄게.
   할아범이 나무를 하러 갔어. 그런데 너무 깊숙이 들어가는 바람에 날은 어두워지고 설상가상 길까지 잃게 되었대. 여기저기 헤매다 겨우 불빛을 발견한 거야. 너무 반가워 한달음에 달려갔는데 산속이라 여겨지지 않을 만큼 화려하고 근사한 집이더래.
   노인은 그곳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시간가는 줄 몰랐대. 하루는 그 집 주인이 방을 구경시켜 주겠다고 했대. 네 개의 방을 차례로 봤는데, 첫째 방은 진달래, 개나리, 살구꽃이 핀 봄이고, 두 번째 방은 시원한 개울에서 멱 감는 여름이더래. 셋째는 얘기 안 해도 알겠지. 곡식이 무르익은 가을과 눈 내리는 겨울을 차례로 봤대. 그런데 그때 갑자기 할멈 생각이 난 거야.
   주인에게 많이 놀았으니 집에 가야겠다고 했대. 주인의 안내로 동네 앞까지 무사히 돌아온 할아범은 깜짝 놀랐대. 너무 많이 바뀌어서 눈을 비비고 다시 봤대. 지나가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도무지 모르겠는 거야. 물어봤대. 이러이러한 사람을 아느냐고. 그 할멈은 어디로 갔냐고. 그 마을에서 가장 나이 많은 노인이 얘길 하더래. 오래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데, 나무하러 가서 돌아오지 않은 할아범이 있었다고. 그래서 할멈이 기다림에 지쳐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고.
   할아범은 비로소 모든 것을 알 수 있었어. 산속에서 지낸 시간이 인간들의 세상에서완 엄청난 차이가 있었음을. 할아범이 본 사계절의 방 하나하나가 백 년의 시간이 담겨 있었던 게지. 그래서 사백 년의 시간을 보내고 인간세상으로 왔으니 당연 까마득한 후손들을 볼 수밖에.
   할아버지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어.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길지 않은 세월을 다른 곳에 허비하지 말라는 뜻이 숨겨져 있다고.
   또 하나 해 줄게.
   혼자 자식을 기르며 힘들게 살아가는 과수댁이 있었대. 그런데 어미와 달리 자식이 그렇게 망나니짓을 일삼아 동네 사람들에게 있는 대로 후레자식이라고 욕을 얻어들었대. 그래서 어미는 걱정인 게야. 정화수를 떠 놓고 정성스레 빌기도 하고 회초리로 종아릴 때리기도 했지만 그 때뿐이었대.
   어미는 어느 날 마당에 심겨 있는 큰 나무에 못을 박기 시작했대. 매일 못을 박으니 나무가 어찌 제대로 숨을 쉬겠어. 나날이 못 박은 양은 늘어가고 나무는 점점 시들시들 병들어가기 시작했어. 그 즈음 아들 녀석이 눈치를 챈 거야. 돌아다니느라 아예 모르고 있었던 거지. 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물었어. 어머닌 한숨을 쉬며 얘기했지. 그동안 네가 잘못한 일이 있을 때마다 나무에 못을 하나씩 박은 거라고.
   아들은 참회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어. 그리고 그때부터 변한 거야. 매일 물을 길어 나르고, 나무를 해 오고, 남의 밭이지만 열심히 일구는 착실한 아들이 되어 갔지. 착한 일을 하고나서는 나무에 박힌 못을 하나씩 빼내는 거야. 어느덧 나무의 못이 하나도 남지 않았어. 그런데 어머니가 시름시름 앓더니 세상을 떠나고 만 거야. 아들의 슬픔은 너무나 컸어.
   아들은 어머니를 껴안듯 나무를 어루만지고 또 만졌어. 그런데 매끈해야 할 나무가 투덜투덜 거친 거야. 자세히 보는 순간 목 놓아 울 수밖에 없었어. 망나니 아들이 착실해져서 박힌 못은 뺐지만 그로 인해 생긴 흔적은 시간이 간다 해도 결코 지울 수 없었던 거지. 어머니를 생각했어. 당신의 가슴에 수 없이 못질해 놓고 그 못을 다시 빼냈다 하더라도 아린 상처는 고스란히 남게 된다는 걸 그때서야 깨달은 거지.
   외할아버지가 이 두 가지 얘길 해 주셨어. 어릴 때는 그냥 재미있게 들었지. 그런데 살아가면서, 특히 결혼하여 어떤 일에 부닥치면 이 동화가 생각났어. 당연히 할아버지를 떠올렸지.
   사실 엄마도 어릴 때 할아버지 속 많이 썩혀드렸어. 아파서 그랬고, 고집 피워서 그랬지. 그런데 중학생이 되면서 철이 나기 시작했어. 왜냐하면 너의 외할아버지가 연세가 많을 때에 나를 낳으셔서 언제 돌아가실지 알 수 없었거든. 할아버지가 어느 순간 불쌍하게 생각되는 거야. 그래서 좋아하시는 과일주도 담가 어머니 몰래 살짝 내다드렸고, 바다에 내려가 고동과 소라도 잡아드렸어. 참 좋아하셨지.
   할아버지는 어릴 때 천재라고 불릴 만큼 머리가 좋으셨대. 그런데 시대가 불운하여 출세하지 못하고 주저앉으셨지. 한이 많으셨나 봐. 그래서 술로 사셨지. 어린 왕자가 생각나. 세 번째로 만난 술꾼, 그 사람은 술을 마신다는 것이 부끄러워 그 사실을 잊기 위해 또 술을 마시는 거야. 할아버지가 그랬나 봐. 이제 생각하니.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했다는 것이 부끄러우셨나 봐. 그게 아닌데.
   딸아, 엄마는 네 외할아버지가 엄청 그리워. 정말 큰사랑은 할아버지에게 받은 것 같아. 하나에서 열까지 전부. 그래서 이 엄마는 할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고래고래 고함을 치셔도, 동네사람이 다 듣도록 자식들 이름을 부르셔도 전혀 부끄럽지 않았어.
   할아버지가 생각나. 지금 계신다면 정말 잘 해드리고 싶은데. 그런데 늦었잖아. 할아버지가 그리 늙지만 않았어도 좀 더 같이 살 수 있었을 텐데. 보약도 해드리고, 좋아하시는 불고기에 소주 한잔을 반주로 올려놓으면 아마 할아버지는 좋아서 입이 귀에 걸리셨을 거야. 또 사랑스런 손녀딸을 보시면 땅에 내려놓으려고도 안 하셨을 걸. 엄마는 그렇게 자랐으니까. 이미 이 세상에 안 계시기에 유독 그립고 조그만 일도 크게 와 닿는 모양이야.
   오늘따라 너의 외할아버지가 왜 그리 그립고 생각나는지 모르겠구나. 우리 딸이 장성해서 시집을 가고 아이를 낳으면 엄마 얘기를 어떻게 들려줄지 궁금하구나. 좋은 추억거리를 많이 만들어 줄게.

 

 

심인자  ------------------------------------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야누스의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