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페르시안 고양이처럼 눈이 동그란 미국인 노부부가 나란히 앉아 있다. 미국 노인이 일어서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찡끗 눈인사를 한다. 나도 찡끗 눈인사를 하고 내렸다. 미국말 한 개도 못 하면서. 오! 아메리카노."
아메리카노 - 김범송
오전
입원 중이시던 시숙부께서 하루아침에 유명을 달리할 정도로 위급한 상태가 되어 미국에 사는 넷째 시동생에게도 소식을 전해야 했다. 시동생이 안부전화를 하기 전에는 전화 한 통화를 먼저 걸어주지 않고 무심하게 지냈던 터라, 오랜만에 거는 전화가 송구스러워 멈칫거려진다. 그는 매일 아침마다 고국에 있는 형제들을 위해 빠뜨리지 않고 기도한다는데, 이참에 마음의 빚이라도 갚을 요량으로 겸사 수화기를 들었다.
핸드폰 번호가 어떻게 되었는지 신호가 가는가 싶더니 갑자기 미국말이 나와 나도 모르게 후딱 끊어버렸다. 다시 집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가는 것을 한참 기다리는데, 띠이 하며 빳빳한 신호가 짧게 울림과 동시에 무슨 말인지 알 수도 없는 미국말이 보들보들한 면발 쏟아지듯 줄줄이 풀려나온다.
짐작건대 외출중이니 메시지를 녹음하라는 안내인 것 같았다. 이 전화도 그냥 끊어버릴까 하다가 시동생에게 전화했다는 흔적이라도 남겨야겠기에 끝까지 수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그놈의 미국말 때문에 지은 죄도 없이 안절부절못해 똥마려운 강아지 모양으로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띠이 하고 울리는 신호 소리에 정신이 없어서 그만 수화기를 놓고 말았다. 미국전화인데 미국말은 한 개도 없었다. 오! 아메리카노.
오후
전철로 숙부님 간병하러 분당서울대병원까지 갈라치면 광명시에서 무려 두 시간 반이나 걸린다. 나는 이 시간에 그동안 읽지 못한 책을 읽으며 간다. 책을 읽기 위해서는 자리 잡기가 우선이다. 전철 안에는 사람들이 꽉 들어차 있다. 퇴근시간대라서 애당초에 자리를 잡는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다.
그런데 이게 웬 떡이냐! 경로석 세 자리가 텅 비어 있다. 환갑을 훌쩍 넘겼어도 내 스스로 애매한 눈치가 보여 경로석은 넘겨다보지 않았었는데, 오늘은 퇴근하는 젊은이들 덕분에 앉아도 될 성싶었다. 나는 벽 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하던 대로 고개를 푹 숙이고 책을 읽는다. 한 정거장을 지나 남자구두가 내 앞으로 다가서더니 검정 바바리 자락을 내 무르팍을 스치면서 옆에 털썩 앉는다. 할아버지 몸무게치고는 꽤나 육중하게 느껴진다. 그 옆 자리에 누군가도 동시에 앉았다. 3인석 경로석이 만석이 되었다. 옆에 앉은 할아버지 무릎이 나보다 한 뼘이나 더 길게 나와 있다. 이 할아버지 키가 엄청나게 크나 보다. 다시 책을 읽고 있는데, 할아버지 옆으로 할머니의 중저음 말소리가 분명 미국말이다. 달리는 전철 진동소리에 미국말이 세찬 물결을 타고 유영을 하듯 높았다 낮았다 흔들린다. 저 미국말 소리는 언제 들어도 듣기 좋고 멋져 보인다. 초등학교 1학년생인 손자는 그놈의 미국말을 잘해야 성공하는 세상이라 오늘도 미국말 배우기에 넌더리를 내며 영어학원에 다녀왔을 것이다. 내가 미국말을 몰라서 부끄러울 것도 써 먹을 것도 없는 늙은 나이인데도, 간혹 미국사람과 맞닥뜨리면 울렁증이 드는 꼴이라니 참 가관이다. 어쨌든 미국사람들은 다 부자 같고 미국말 잘하는 사람들은 모두 실력자 같아 그 앞에서 주눅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내려야 할 정거장이 가까워 책을 접으려 하는데, 내 옆에 할아버지가 그 옆 할머니와 미국말로 소곤소곤 주고받는 소리에 내 귀가 쫑긋했다. 볼일 없는 외출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노인인 줄 알았는데, 이게 웬일일이람, 미국사람인가 봐!
미국에 가서도 미국사람과 나란히 앉아보기는커녕, 빤히 쳐다보면 예의가 아니라고 해서 흘낏 훔쳐보는 짓만 하다 왔는데, 같은 의자에 미국사람과 딱 붙어 앉아 있기는 생전 처음이다. 미국사람 얼굴을 쳐다본들 금덩이가 나올 것도 아닌데, 호기심이 발동한 아이처럼 이들이 보고 싶어 내릴 정거장을 한 개 남겨두고 서서히 일어섰다. 대수롭지 않은 척 여유로운 시선으로 미국사람을 바라보려는 예의바른 수작이다.
하얀 페르시안 고양이처럼 눈이 동그란 미국인 노부부가 나란히 앉아 있다. 미국 노인이 일어서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찡끗 눈인사를 한다. 나도 찡끗 눈인사를 하고 내렸다. 미국말 한 개도 못 하면서. 오! 아메리카노.
* 아메리카노(Americano): 미국 (이태리어).
김범송 ---------------------------------
≪에세이스트≫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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