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계속해서 받기만 하는 것에 비해서 나는 줄 것이 없었기 때문에 늘 고민하던 차였다. 나에게는 너무나 과분했던 만남을 통해서 남녀의 만남이라는 것이 아직도 감성이 큰 힘으로 작용한다는 것, 그리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편하다는 것을 알게 한 만남이었다. 하기야 받는 것을 미안해 할 줄 아는 것도 감성이다."
만남의 조건 - 권중대
얼굴을 보고 짝을 고르는 것은 동물 중에 사람밖에 없다고 한다.
이것은 사랑할 때 상대방의 얼굴을 마주보는 행위가 사람뿐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여자는 본능적으로 유전자가 우수해 보이는 남자를 택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남자는 뭐라 해도 얼굴 예쁜 여자가 제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는 일이 복잡해짐에 따라 사람을 만나는 데 있어서도 이기적인 조건이 하나 둘 늘어나게 되었지만 이것이야말로 원초적인 만남의 조건이다. 물론 공통된 정서를 말하는 ‘필’이라는 것의 영향이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자기가 사는 도道에서는 신랑감이 없다고 호기를 부려도 크게 이의를 달지 않은 여자 선배가 있었다. 그만큼 모든 면에서 부족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 아주 평범한 사람과 결혼을 해서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성적인 것을 제쳐두고 감성적인 결혼을 한 탓이야.”
선배의 남편은 사업에는 크게 수완을 보여서 날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그 사업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암에 걸려 아내와 아이들을 남겨두고 죽은 것이다. 그러자 선배가 걷어붙이고 나섰다.
‘결혼에는 실패했어도 인생에는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시장 아줌마가 되기를 작정했다는 것이다. 열심히 한 결과 사업은 날로 발전했다. 그런데 그 선배에게서 시장아줌마의 냄새는 풍기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일상 생활인의 모습보다는 독서, 요가, 서화, 요리, 영화, 쇼핑 등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 글을 보고 약사 중에도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놀랐다고 하면서 찾아왔기에 알게 됐었다.
나는 종종 그 집에 초대되어 식사와 티 타임을 갖는 기회가 있었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분의 엄청난 독서량에 놀라게 되고 또 틈틈이 해 온 서화 솜씨에 놀라곤 했다. 그리고 고가는 아니어도 가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그 자체가 예술이었다.
“할 말이 아닌지 몰라도 남자가 없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다 할 수 있는 거지요. 사람 하나에게 들어가는 손이 그렇게 많은 겁니다.” 그러나 내 생각엔, 남편이 없는 불행한 시간을 잘 이용한 지혜라고 생각한다.
“글 쓰는 사람이 이것 정도는 있어야지요.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은 천박해요.”
하면서 책보에 싼 아주 큰 것을 차에 실어 주었는데, 이희승 씨가 쓰고 민중서관에서 펴낸 ≪우리말 큰사전≫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십만 원이 넘는 책이었다. 그것 말고도 여러 가지 것을 주었다. 부담이 많이 갔다.
“어쩌면 남자가 그렇게 감성이 넘쳐나요?” 그는 이런 말을 자주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시를 몹시 좋아는 했지만 만들지는 못했다. 그래서 자그마한 카페를 만들어서 내가 좋아하는 시를 200수쯤 올려놓았다. 시와 그림과 음악을 곁들여서 올려놓았기 때문에 여가가 생기는 대로 음악 감상도 하고 시도 읽으면 아주 마음이 평안해졌다. 나는 이 카페를 알려주면서 한번 들러보라고 했다.
“아주 감성으로 뚤뚤 뭉쳐진 남자야. 음악을 그렇게 많이 알 줄은 정말 뜻밖이야.”
그녀의 감탄은 끝날 줄을 몰랐다.
“무엇이 얼마나 소중한가는 그 일에 투자한 시간과 노력의 분량이야.” 하면서 카페에 쏟은 노력과 시간을 알 만하다고 했다.
어느날 메일을 열어본 나는 깜짝 놀랐다. 그 선배의 메일을 보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주는 시와 음악을 받아먹으면서
어느새 당신의 영혼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저 때문에도 쉴 수가 없게 되었군요
남은 생일 헤아리기가 쉬워졌으므로
조용히
그러나 마음의 평화 찾기에는 부지런하게 삽시다
너무나 뜻밖의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엇이 얼마나 소중한가는 그 일에 열중한
시간과 노력의 분량이라는 말씀 명심하고
열심히 카페를 가꾸겠습니다. 자주 들러주세요.
며칠 후 나가서 뵙겠습니다
그 얼마 후, 선배는, ‘시인은 <휘발유>라는 메마른 소재에서도 아름다운 시를 만들어 내는 감성을 가진 사람인 모양이다.’는 글과 함께 허영자 시인의 시 <휘발유>를 보내왔다.
휘발유 / 허영자
휘발유 같은
여자이고 싶다
무게를 느끼지 않게
가벼운 영혼
뜨겁고도 위험한
가연성의 가슴
한 올 찌꺼기 남지 않는
순연한 휘발
정녕 그런
액체 같은
연인이고 싶다.
좀 부담되는 점이 있기는 했으나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우리는 그때보다 자주 만나게 되었다. 내가 사람 많은 곳을 싫어했으므로 장소에 많은 신경을 썼고 식당도 둘이만 들어가는 특실을 이용했다. 도시락을 가져오거나 커피를 가져 오거나 정성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리고 헤어질 때는 책을 위시한 여러 가지 것을 주었다. 너무 여러 가지여서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렉서스 SUV가 나왔더라고요. 그것으로 차를 바꿔드릴게요.”
“예? 내 차 아직 새 것인데요. 그리고 왜 선배가?”
“그냥 사주고 싶어요. 이유는 없어요.”
그리고 그 뒤에도 종종 “렉서스 이야기는 지금도 유효해요. 말만 해요.”
내가 너무 단호했기 때문에 그 이상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정확히, 2006년 10월 30일 우리는 교외에 있는 친구 별장 정원 층계에 나란히 앉았다. 먼 곳으로는 옥정호가 지는 석양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우리는 한참 이야기를 하다가 약간 바래진 나뭇잎을 보면서 이것들이 곱게 물드는 다음달 30일에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계속해서 받기만 하는 것에 비해서 나는 줄 것이 없었기 때문에 늘 고민하던 차였다. 나에게는 너무나 과분했던 만남을 통해서 남녀의 만남이라는 것이 아직도 감성이 큰 힘으로 작용한다는 것, 그리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편하다는 것을 알게 한 만남이었다. 하기야 받는 것을 미안해 할 줄 아는 것도 감성이다.
그 선배와 자주 만나고 있을 때 한번은 어떤 매초롬한 남자가 찾아왔었다. 그가 말했다.
“당신과 그 여자는 차이가 많이 나지 않아?”
나는 한참을 훑어본 뒤에 말했다.
“당신 나만큼 매력 있어? 또, 나만큼 톡톡 튀는 대화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내 말 잘 들어요. 중국이 원나라 청나라에 지배를 받을 때, 지배를 받던 한족들은 정치적인 억압보다 몽고족 만주족으로부터 오는 문화적인 이질감 때문에 훨씬 더 힘들어했던 것을 알아요? 저 선배는 당신처럼 마네킹 같은 스타일에 많이 식상해 있어요.”
“그리고 당신이 나만큼 풍부한 감성과 유머감각을 가졌다고 생각합니까?” 하고 돌아섰다.
그 짧은 몇 마디에는 어느 면에서 조금은 내가 그 선배에게 미치지 못할지 몰라도 그와 가까워 질 수 있었던 요소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었다.
사실 그 선배와 나는 비슷한 문화적 감각과 감성을 공유했기 때문에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화를 할 때 거침없이 나오는 내 유머가 많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권중대 --------------------------------------------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사람 그리운 날에≫, ≪행복한 착각≫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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