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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4월호, 사색의 창] 망각忘却 - 선산곡

신아미디어 2013. 4. 29. 08:51

"망각. 어떤 조건에 의해 기억을 잃어버렸거나 아니면 잊히지 않은 일을 잊고 싶어 들먹이는 말, 그것은 어차피 슬픈 일이 아닌가. 더러 잊어버리고 싶은 것이 많은 게 우리들 인생사다. 이 세상 살아가는 사람들 더러는 잊고 싶은 상처를 지니고 있었을 것이고 그 상처들은 되살아나므로 덧을 내는 것이다. 오늘날 사회 문제되고 있는 치매도 곧 망각이니 슬픈 일 이전의 불행이다."

 

 

 

 

 

 

  망각忘却  선산곡


   병원에 한 여자가 사고를 당해 입원을 한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여자는 과거의 기억을 모두 잊어버렸다. 젊은 담당의사의 치료를 받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연정이 싹튼다. 여자가 끼고 있던 반지, 어느 날 그 반지를 사랑의 징표로 남자에게 준다. 그러나 모든 러브스토리가 그렇듯이 행복도 잠시다. 우여곡절 끝에 여자는 잊어버렸던 과거의 기억을 되찾게 되고 자기가 환자였던 시간, 젊은 의사와의 아름다웠던 기억은 깡그리 잊어버린다. 사랑했던 여인이 준 반지를 그녀에게 되돌려주는 남자. 여자는 그 반지를 받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기의 손가락에 낀다.
   “아, 이 반지.”
   짧고 무심한 한마디만 긴 여운을 남긴다.
   이만희 감독의 영화 <망각忘却>의 대충 줄거리다. 한 시대 천재라는 소리를 듣는 이 감독이 만든 <만추晩秋>는 최고의 찬사를 받은 영화다. 그러나 <만추> 못지않게 잘 만든 영화가 바로 <망각>이다. 주연배우도 <만추>처럼 신성일 문정숙, 시나리오는 백결. 신라시대 거문고로 떡방아 찧는 소리를 낸 그 백결선생이 아니다.
   이 영화의 가치를 들추어 조명해주는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다. 인터넷 검색을 해봐도 포스터 한 장, 영화 스틸 한 장 눈에 띄지 않는다. 겨우 줄거리 두어 줄. 하긴 영화필름인들 남아있겠는가.
   영화의 주연배우가 아직도 멀쩡히 살아있다. 필름은 고사하고 포스터 한 장이나마 보존해 두지 못한 주제에 예술문화 운운하기 창피할 노릇이다. 그것도 옛날 농촌에 농부들이 쓰던 밀짚모자 장식용으로 사라져버린 우리나라 영화 필름들. 숱한 명작들의 허무한 소멸을 생각해 보면 아쉬움보다 먼저 치미는 게 분노다. 말이 옛날이지 불과 얼마 전 우리들의 무지가 빚어낸 일이었으니 할 말이 없다. 영원한 가치를 망각하여 잃어버린 작품들, 그 가운데 <만추>도 <망각>도 포함되어 있다.
   망각. 어떤 조건에 의해 기억을 잃어버렸거나 아니면 잊히지 않은 일을 잊고 싶어 들먹이는 말, 그것은 어차피 슬픈 일이 아닌가. 더러 잊어버리고 싶은 것이 많은 게 우리들 인생사다. 이 세상 살아가는 사람들 더러는 잊고 싶은 상처를 지니고 있었을 것이고 그 상처들은 되살아나므로 덧을 내는 것이다. 오늘날 사회 문제되고 있는 치매도 곧 망각이니 슬픈 일 이전의 불행이다.
   십 몇 년 행방불명이 된 어머니를 찾았더니 과거를 잃어버린 채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살고 있었다. 자식까지 낳고 가정을 꾸리며 행복하게 살고 있는 어머니는 옛날 과거의 자식들 얼굴을 끝내 기억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제주도에 실제 있었던 영화와 같은 이야기다.
   영화 <망각>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오늘날 코믹한 감초연기로 이름을 날린 배우 양택조가 TV에서 했던 얘기다. 작가가 시나리오를 쓰면 이만희 감독은 수정을 자주했고 그 일을 양택조에게 시켰다고 한다. 양택조가 시나리오를 수정할 능력이 있었는지 따져볼 필요는 없지만 고친 척 내버려 두었다는 시나리오를 이 감독은 그대로 찍었다. 양택조가 누구인가. 북한의 공훈배우로 지폐까지 찍힌 문정복. 그 문정복의 아들이 양택조다. 당대 최고의 배우 문정숙이 문정복의 동생이니 양택조가 그의 조카다. 이모가 <망각> 영화의 주연배우였으니 이 영화에서 얽힌 비사를 생각해보면 어쩐지 가슴이 찡해진다.
   자신 만의 스타일로 아르헨티나 누에보 탱고시대를 연 ‘아스트로 피아졸라’. 그는 전통적 탱고는 슬픈 것이고 인생에서 필요한 것이 망각이라고 했다. 그의 탱고음악 <망각(oblivion)>도 곧 절대적 우수다. 우리에겐 필요치 않았던 망각 때문에 잃어버린 영화 <망각>이 피아졸라 음악을 들을 때도 슬프게 떠오르는 이유다.
   영화를 사랑했던 내 큰누님도 <만추> 못지않게 이 영화에 점수가 후했다. 당대의 최고배우 중 하나라는 문정숙에 대한 내 순정은 지금도 변함이 없으니 그와 이만희 감독과의 관계스토리는 접어두자. 골목길 게시판에 풀기 말라 나풀거리던 영화 포스터. 그 포스터에 새겨진 선전 문구를 잊지 않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아야 할 수밖에 없다.

 

   하늘엔 태양이 없어도 좋다
   땅 위엔 사람이 없어도 좋다
   그녀와 별빛만 있으면 된다

 

 

선산곡  ------------------------------------------------
   수필집: ≪LA쑥대머리≫, ≪끽주만필≫, ≪속아도 꿈 속여도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