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레 어머니를 잃은 큰 슬픔에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던 그날이었다. 손발을 만져보고 가슴속에 손을 넣어봤다. 남아있는 온기溫氣로 좀처럼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점점 싸늘하게 굳어가는 팔다리를 만져보며 힘없이 고개를 떨구어야 했다."
구리반지 - 변종호
신록의 향연이 펼쳐진 싱그러운 산하, 능선을 넘어선 산들바람이 하얀 찔레꽃 무리에 달려와 안긴다. 부끄러운 듯 몸을 흔들며 뿌리는 향기가 그윽하기만 하다. 아침운동 삼아 오르는 부모산, 오늘따라 울어대는 뻐꾸기 소리가 구성지게 들려온다. 고즈넉한 산길, 키다리가 되어버린 내 그림자를 앞세우고 휘적휘적 걷는다. 서두를 것 없이 유유히 걸으며 홀로 즐기는 이 시간이 행복하다.
자글거리는 5월의 햇살은 졸참나무 이파리 사이를 비집고 내려앉는다. 길옆에서 나물을 뜯는 장맛비에 드러난 소나무 뿌리 같은 할머니 손등에도, 주름이 깊게 팬 얼굴에도. 순간, 굼뜬 할머니의 손짓에 반짝이는 금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 반지를 보자 늘 한쪽에 쌓아두었던 싸한 아픔이 가슴을 헤집는다.
반지는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결혼반지나 다른 결합結合의 상징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이런 반지를 나는 20년이 넘도록 낀 적이 없다. 아니 낄 수가 없었다. 가슴 깊숙이 박혀버린 그 아픈 모습을 지울 수가 없어 지금까지도 반지를 끼지 못한다.
갑작스레 어머니를 잃은 큰 슬픔에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던 그날이었다. 손발을 만져보고 가슴속에 손을 넣어봤다. 남아있는 온기溫氣로 좀처럼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점점 싸늘하게 굳어가는 팔다리를 만져보며 힘없이 고개를 떨구어야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염습을 하던 염사가 어머니의 양손을 배 위로 올려놓았다. 마디가 갈라진 손가락에는 광택을 잃은 구리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생전에 금붙이라곤 몸에 지녀 본 적이 없었던 어머니셨다.
손에 낀 반지도, 옆집 할머니의 금반지를 보고 만들어 드린 것이었다. 어머니는 막내아들이 만들어 준 반지를 끼고는 많이 기뻐하셨다. 비록 구리반지였지만 금반지보다 더 소중하게 아끼셨고 가끔씩 헝겊에 치약을 묻혀 닦곤 하셨다.
반지를 손가락에서 빼낸 염사는 수의囚衣로 감싼 어머니 가슴에 깊숙이 밀어 넣었다. 금반지도 아닌 구리반지를 가슴에 품고 먼 길을 떠나시게 한다는 게 가슴을 찢는 아픔으로 밀려왔다.
어머니는 열세 살 어린 나이로 호랑이 같은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강원도 두메산골에 질기고도 고통스러운 삶의 뿌리를 내렸다. 내가 첫돌이 지날 무렵 그릇된 신앙으로 가족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를 원망할 새도 없이 홀로 사남매를 키우느라 어머니는 날품을 팔고, 지게질을 하는 고단한 몸이 되셨다.
질곡의 삶이였기에 출가 후 40년이 지나 친정을 찾아간 것도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고나서였다. 이런 어머니를 내 안에 가득한 욕심 때문에 구리반지를 가슴에 안고 가시게 만들었다. 이렇게 빨리 떠나실 줄 알았다면 짊어졌던 욕심을 내려놓고서라도 잘 해드렸을 텐데, 때늦은 후회뿐이었다.
좀 더 잘살게 되면 효도해야지 했던 생각도 다 부질없었다. 그렇게 되기도 어렵고 그것이 이루어지면 더 큰 욕심이 생긴다는 것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이후에 알게 되었다.
인간의 죽음이 슬프고 서러운 건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알면서도 행하지 못한 주자 십회훈, ‘불효부모사후회不孝父母死後悔.’ 이 평범한 가르침이 가슴을 아프게 할 줄은 어머니 생전에는 미처 몰랐다.
지난해 봄, 뜰 안의 자목련이 봉오리를 터트릴 무렵 아무도 없는 집에 도둑이 들었다. 속속들이 살림살이를 뒤진 도둑은 결혼예물과 애지중지하던 아내의 액세서리를 모두 가져갔다. 패물을 잃어버린 아내는 발을 구르며 몹시 아까워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도둑을 맞았으니 당연히 속이 쓰리고 아파야 하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오히려 20년간 짊어졌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런 마음에는 평생 금반지 하나도 못해 드린 어머니에 대한 죄스러움과, 끼지도 않고 장롱 서랍에 넣어두었던 반지라 그랬으리라.
어느 일요일이었다. 아내의 성화에 따라나선 백화점 쇼핑길. 유리진열장에 가지런히 늘어선 반짝이는 반지들. 그 앞에서 두 발이 붙어버린 아내는 이것저것 고르며 채근하듯 내게 물어본다. 이게 좋으냐? 저게 좋으냐? 하지만 나는 선뜻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아마도, 어머니 생전에 다하지 못한 효도 때문인 것 같았다. 그 순간 내 눈에는 어머니 가슴에 깊숙이 묻어놓은 푸르스름한 녹슨 구리반지만 어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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