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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3월호, 신작수필] 마음으로 흐르는 강 - 변종호

신아미디어 2013. 4. 8. 08:22

"열여섯에 시작한 객지생활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보고픔이 쌓여 외로워지고 힘겨운 일이 고통이 되면 강으로 뛰어갔다. 부딪혀 부서지는 하얀 포말泡沫과 너울거리며 흘러가는 강물에 눅눅한 마음을 띄워 보내곤 했었다."

 

 

 

 

 

 

  마음으로 흐르는 강  -  변종호


   물새가 노닐던 바위에 앉아 흐르는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그리던 고향의 강은 아니지만 흘러가는 물길을 보면 어느새 무거웠던 마음의 빗장이 스르르 풀린다. 가슴 가득한 그리움도 응어리진 서운함도 춘풍春風에 녹아내리는 잔설처럼 사라져 평온한 마음이 되곤 한다.
   그리움이 커지면 서러움이 된다고 했던가.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면 늘 그리운 고향 주천강이 내 안으로 들어선다. 떠올리기만 해도 미소가 지어지는 아름다운 추억도 내 곁을 떠나 다시는 볼 수 없는 그리운 얼굴들도 물 위에 아른거리다 사라져 버린다.
   나이 차가 많았던 형제들. 아침상을 치우기가 무섭게 들로 산으로 일을 나가시던 어머니. 한나절이 지나 그림자 길게 늘어선 텅 빈집은 온통 내 차지였다. 약골에다 소심했던 나는 커다란 미루나무가 서 있는 제방만 넘어서면 언제나 강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 강은 외롭게 커가던 나의 놀이터요, 쓸쓸함을 덜어주는 변함없는 친구였다.
   서산에 걸터앉은 석양이 일렁이는 강물에 금빛 물감을 풀 즈음이면 물 위를 차고 오르는 피라미들의 묘기는 장관이었다. 또한 그곳은 재 너머 장에 간 어머니를 땅거미 질 때까지 기다리던 곳이기도 했다.
   고향을 그려보면 동네를 둘러싼 높은 산보다는 마을을 휘감아 흘러가는 강물이 먼저 떠오른다. 강물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강을 바라보며 희망을 키웠다.
   열여섯에 시작한 객지생활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보고픔이 쌓여 외로워지고 힘겨운 일이 고통이 되면 강으로 뛰어갔다. 부딪혀 부서지는 하얀 포말泡沫과 너울거리며 흘러가는 강물에 눅눅한 마음을 띄워 보내곤 했었다.
   강물도 겉으로 보기에는 유유히 흘러가는 것 같지만 수없이 막히고 걸리며, 부딪혀 부서지고 흩어지면서도 모든 것을 아우르는 너그러운 모습이었다. 어느 것도 거스르지 않고 끌어안는 포용력, 모나고 각진 바위를 감싸 안는 슬기로운 지혜, 흩어졌다 이내 합쳐지는 친화력을 나직한 물소리로 들려주었다.
   강물에 대한 동경은 지천명이 된 지금까지 이어져 뭔가 결단을 내려야 하고 내재된 그리움이 커지면 달려가는 곳은 화양구곡을 쓸어내린 물과 청천 뒤뜰을 흘러온 두물머리 여울목이다.
   마음에 쌓인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여울져 흐르는 강물이 좋았고, 깊은 상념에 잠기기엔 산 그림자 물에 어리는 잔잔한 대청호가 좋았다.
   몇 해 전에는 오랫동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라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어야만 했다. 하루아침에 직장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눈앞이 깜깜해지며 머릿속이 텅 비어가는 것 같았다. 며칠간을 혼자 고민하고 애태우다 하루 휴가를 내서 고향으로 향했다.
   내 아픈 속내는 아랑곳없다는 듯 고향 앞을 흐르는 주천강은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바위에 걸터앉아 눈이 시리도록 강물을 바라보았다. 쓰리고 아픈 마음에는 마치 강물이 멈춰선 듯하고 초췌한 겨울 나그네인 내가 물길을 따라 너울너울 떠나가고 있었다.
   그날 밤 사랑채 문틈으로 비집는 찬바람이 온몸을 오그라들게 했다. 해 질 녘 쓸쓸하게 돌아보았던 사라진 옛집이며 꿈을 키우던 학교와 여울목을 지키던 섶다리. 모두 그리운 추억일 뿐인데 돌아갈 수 없는 유년을 회상하느라 끝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고향에서 보낸 하루는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는 강물처럼 지금은 가혹하게 느껴지지만 주어진 운명에 따라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잠시 막히고 걸릴 뿐 언젠가는 저 강물같이 흘러가리라 믿었다.
   태어나고 자란 곳이 강촌인 나는 흐르는 물같이 살길 원했다. 막히면 돌아가고 부서지면 다시 추스르며 모난 돌 울퉁불퉁한 자갈밭도 어우르고 보듬으며 살고 싶었다. 그러나 내 삶을 돌아보면 교만과 독선으로 듣는 편보다는 내 주장만 강하게 내세운 것 같았다. 강이 보여주었던 상대를 끌어안는 포용력, 거스르지 않고 넘는 슬기로운 지혜, 흩어졌다 다시 합치는 것을 잊은 채 여태껏 살아온 것만 같다.
   어려울 때마다 내게 힘이 되어주고 끊임없이 흐르며 부르는 노래가 나직하게 들리는 강. 이런 강을 바라보며 배운 교훈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내 마음에 흐르는 강처럼 그렇게 살아보고픈 마음만 간절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