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은 흔히 ‘인생의 가을’로 비유되어 왔다. 성숙과 풍요라는 의미보다는 박탈의 시기, 상실의 시기라는 부정적 의미가 내포된 은유이다. 노년세대 스스로가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그렇게 규정한 것이다. 마치 르네상스인들이 중세를 암흑기로 규정지었던 것처럼……. 프랑스의 실존주의 페미니스트 시몬 드 보부아르도 그의 저서 ≪노년≫에서 오늘날 추락한 노인의 지위는 노인 그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결정되어진 것이라고 했다."
인생의 가을이라는 화두 - 송명희
1. 중세의 가을, 인생의 가을
오래전에 한 역사학자의 방에서 ≪중세의 가을≫이라는 매혹적인 제목의 책을 본 적이 있다. 나는 그것이 문학 책인가 하고 방의 주인에게 물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 책을 쓴 저자는 우리에게 ≪호모 루덴스≫(1938)라는 책으로 훨씬 더 잘 알려진 네덜란드의 문화사학자 요한 호이징가이다.
그는 놀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고유한 특성이며, 문명을 창조하는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모든 문화현상의 기원을 그는 놀이 속에서 찾고자 했고, 실생활 밖에 존재하는 무목적적이고 자유로운 놀이 속에서 비로소 문화가 발달했다는 논리를 폈다. 그는 인간을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고 명명하는데, 이 개념은 호모 파베르(homo faber), 즉 노동하는 인간과 대척점에 놓인다. ‘호모 파베르와 호모 루덴스’는 이솝 우화식으로 표현하자면 ‘개미와 베짱이’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중세의 가을≫(1919)은 호이징가의 첫 번째 저서이다. 14∼15세기에 해당되는 서양의 중세는 르네상스 시대와 비교되어 단절되고 어두운 시기로 규정된다. 하지만 이러한 규정은 중세인 스스로가 내린 것이 아니었다. 르네상스기의 사람들은 자신들과 이전 시대를 분류하고 구분 짓고자 하는 열망에서 중세를 암흑기로 불렀던 것이다. 하지만 호이징가는 르네상스의 발판이 된 중세가 그렇게 어둡기만 한 시기는 아니었다는 것을 문학과 예술 등을 통해서 그 특유의 문학적 필치로 증명해내고 있다.
≪수필과비평≫ 136호에 수록된 글을 읽으면서 나는 왜 엉뚱하게도 ≪중세의 가을≫이란 책을 떠올렸던 것일까? 그것은 이번 호에 장기오의 <가을 탓인가?>를 비롯하여 노혜숙의 <오래된 풍경>, 이동이의 <위험한 방법>, 안유환의 <아내의 회갑>, 오태익의 <결혼 31주년의 단상> 등 노년의 인생을 표현한 글이 유독 많았기 때문이었던 같다.
노년은 흔히 ‘인생의 가을’로 비유되어 왔다. 성숙과 풍요라는 의미보다는 박탈의 시기, 상실의 시기라는 부정적 의미가 내포된 은유이다. 노년세대 스스로가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그렇게 규정한 것이다. 마치 르네상스인들이 중세를 암흑기로 규정지었던 것처럼……. 프랑스의 실존주의 페미니스트 시몬 드 보부아르도 그의 저서 ≪노년≫에서 오늘날 추락한 노인의 지위는 노인 그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결정되어진 것이라고 했다.
우리나라는 2000년에 65세 이상의 노인인구가 7.2%를 차지하는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2018년이 되기 전에 노인인구가 14%를 넘어서는 고령사회가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올 초 기획재정부는 노인의 연령기준을 70세나 75세로 높이는 방안을 발표했다. 청년층의 노인부양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최근 발표된 또 하나의 뉴스는 우리나라 노인의 일하는 비율이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높다는 것이었다. 연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노년층이 생계비를 벌기 위한 황혼노동을 이어가고 있다는 뜻이리라. 이래저래 노년은 저물어가는 가을날 저녁 무렵처럼 서글프기 짝이 없다.
2. 가을 그리고 늙음
계절은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순환하고, 하루의 시간은 아침, 점심, 저녁, 밤으로 순환한다. 우리 인생은 유년, 청년, 중년, 노년을 거쳐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밟아간다. 계절이든 하루의 시간이든 인생이든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흘러간다. 하지만 계절과 하루의 시간은 순환하는 데 반해 윤회나 환생을 믿지 않는 한 개체로서의 인생에는 순환이란 게 없다.
“하늘은 눈물이 날 만큼 투명하다.”로 시작하는 장기오의 <가을 탓인가?>는 가을 속을 거니는 노년의 아침부터 밤까지의 하루 동안을 그려내고 있다.
들녘이 나온다. 햇빛 가득한 가을이 거기 있었다. 하늘은 투명하고 맑았다. 인적 하나 없는 외길 위에 저녁 햇살이 드리우고 있다. 나는 서늘한 가을의 기운을 깊이 들이켜며 천천히 걸었다. 이런 산길에서도 우리는 문득 우울을 만난다. 단풍이 곱게 물든 산기슭을 혼자서 걸어가야 할 때, 이렇게 들판 한가운데 길이 있고 행인 하나 없는 적막을 만날 때, 귀가 멍해지면서 까닭 모르게 서러워진다.
-<가을 탓인가?>에서
햇빛 가득한 들녘, 투명하고 맑은 하늘, 단풍이 곱게 물든 산기슭, 서늘한 가을의 기운, 그리고 산책…. 노년의 작가가 자못 황홀하게 향유할 수도 있는 가을이란 계절을 산책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행복, 기쁨, 유유자적, 쾌적함 따위가 아니라, 까닭 모를 서러움, 그리움, 적막, 우울, 외로움, 허무이다. 이것들은 ‘슬픔’이란 감정의 여러 얼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공포, 분노, 행복, 혐오, 슬픔, 놀람 등의 여섯 가지 기본 감정이 있다. 대체로 슬픔이란 무언가를 잃어버린 상실감으로부터 발생하는 감정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리처드 래저너스와 버니스 래저너스는 인간은 상실에 저항하고 싸우다가, 심지어 부정까지 하다가, 마침내 상실을 받아들이게 된다고 했다. 상실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재평가하고 나서야 애도는 슬픔이 된다는 뜻이다. 슬픔을 자극하는 것은 단지 상실 자체가 아니라, 복구 불가능한 상실이다. 사실상 복구 불가능한 상실이 슬픔의 극적 플롯인 것이다. 피해자는 잃어버린 것을 다시 가져올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상실을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그러면 이 글의 작가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며, 어떤 복구 불가능한 것을 상실했기에 이처럼 슬픔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가?
바람은 서늘하고 별은 총총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위로 달빛이 일렁거렸다. 뱀이 풀숲을 스치며 지나가는가? 벌레들의 울음이 뚝 그쳤다. 다시 잔을 들어 술잔을 드는데 문득 잔을 잡은 손이 눈에 들어온다. 손마디 여기저기에 톡 불거져 나온 굵은 힘줄들이 어지럽고 주름 잡힌 손등에 저승꽃이 여럿이다.
그렇다. 그나마 조금 있던 머리털도 다 빠져 이제는 구제불능이고 툭하면 무얼 빠뜨리고 다닌다. 책을 읽어도 잊어버리기 일쑤고, 산 책 또 산다. 휴대전화를 어디에 두었는지 몰라 당황하기가 한두 번이 아니다. 바람 부는 날은 어머니가 보고 싶어진다. 삶도 사랑도 영원할 수야 없겠지만 어느 여름날 한잠 낮잠을 잔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빈 들의 허수아비처럼 허무하다.
-<가을 탓인가?>에서
작가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저항하고 싸우다가 심지어 부정까지 하다가 마침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복구 불가능한 상실은 바로 젊음의 상실, 즉 늙음이다. 손마디마다 불거져 나온 굵은 힘줄, 손등의 저승꽃, 빠져버린 머리털과 같은 몸을 통해 확인되는 노화는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잦은 건망증으로 다가온 정신적 노화는 시시각각 작가로 하여금 인생의 가을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리처드 래저너스와 버니스 래저너스 부부는 감정은 인간의 마음과 몸 양쪽과 관련된 복잡한 반응이라고 했다. <가을 탓인가?>라는 한 편의 수필을 관통하고 있는 지배적 감정인 슬픔은 계절상의 가을과 인생의 가을이 복합된 것으로서 노년의 작가는 이 가을을 몸과 마음 모두를 통해서 총체적으로 느끼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매사가 슬픈 감정을 환기하게 되는 것이다. “삶도 사랑도 영원할 수야 없겠지만 어느 여름날 한잠 낮잠 잔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빈 들의 허수아비처럼 허무하다”라고……. 작가는 남가일몽南柯一夢처럼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박탈감에 사로잡혀 있으니 아무리 가을 하늘이 투명해도 그것은 눈물에 비유되지 않을 수 없고, 가을날의 감미로운 적요를 감당할 수가 없고, 단풍이 곱게 물든 산기슭을 걸을 때조차 우울, 적막, 서러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고, 이태백처럼 달을 마주하고 도연명처럼 술을 마시는 유유자적을 누려보아도 외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노년에는 여러 가지 고통이 존재한다. 예컨대 병들고 쇠약함에서 오는 신체적 고통이나 우울증이나 조울증과 같은 정신적 고통, 의미 있는 일자리가 없다는 사회경제적 고통, 의식주를 걱정해야 하는 경제적 고통, 인생의 허무나 죽음에 대한 공포와 같은 실존적이고 내면적인 고통, 이야기를 나눌 친구나 동료가 없는 정서적 고통…….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운 수많은 고통이 있다. 흔히 빈곤, 질병, 고독과 소외, 무위를 노년기의 사고四苦라고 한다.
3. 낡음 늙음 오래된 것들에 대한 애정
노혜숙의 <오래된 풍경>은 작가의 말대로 “낡은 풍경 속에서 풀려나온 기억의 한 끄트머리가 풍화된 추억을 재현해낼 때 나는 오롯이 잃어버린 시간과 재회한다”라고 했듯이 오래된 풍경의 세 장면-갈매기 다방, 순덕할머니의 가을, 웃음-은 무언가 우리들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던 추억들을 소환해낸다. 말하자면 <오래된 풍경>은 각기 다른 3편의 짧은 수필을 통해서 같은 주제를 반복하고 동일한 분위기를 창조했다는 의미에서 옴니버스 형식의 수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름조차 촌스러운 1970년대식 ‘갈매기다방’에는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에 나오는 백화와 같은 이미지의 다방마담이 텔레비전 신파 드라마의 재방송을 보고 있다. 이러한 풍경은 동시대를 살았을 법한 작가의 젊은 날의 애잔한 추억들을 불러낸다. <순덕할머니의 가을>의 주인공은 시골 외딴집에 홀로 사는 독거노인이다.
순덕할머니는 내가 시골로 이사를 오면서 알게 된 이웃이다. 영감님은 진작 돌아가시고 가교리 산자락 외딴집에서 홀로 산다. 하나 있는 딸자식도 제 앞가림하고 살기 바빠 얼굴 본 지 오래다. 흙집은 주인을 따라 얼기설기한 수숫대가 빠져 나올 만큼 쇠락했다. 안방에선 오래된 괘종시계가 뎅그렁뎅그렁 느리게 열두 시를 치고, 봉당에서 바장대던 햇살은 할머니의 꼬부라진 등을 어루만진다. 어쩌다 찾아오는 사람이라곤 건넛마을 사는 황가네 할머니뿐이다. 그나마 요즘은 관절통이 도져 마실 오는 횟수가 드문드문해졌다. 종일 말 한 자락 나눌 사람이 없으니 말 못하는 신세나 다를 바 없다. 벼농사는 접은 지 오래고, 텃밭을 가꾸는 일도 힘에 부쳐 올 농사가 마지막일 것 같다고 한숨을 쉰다. 수확이라야 마른 고추 열 근 남짓, 마늘 예닐곱 접이 전부다. 그래도 면사무소에서 주는 정부미와 독거노인에게 제공되는 반찬으로 이만큼 살 수 있다며 고마워한다.
-<순덕할머니의 가을>에서
꼬부라진 등을 한 집주인 할머니의 늙고 초라한 모습, 낡고 쇠락한 흙집의 풍경, 오래된 괘종시계의 뎅그렁뎅그렁거리는 시계 소리의 절묘한 조응이 서글픈 하모니를 이루어낸다. 병들고 쇠약해진 신체와 더불어서 수년째 자식이 얼굴도 내비치지 않고 종일 말 나눌 사람 하나 없는 독거노인의 정서적 외로움과 면사무소에서 제공해주는 정부미와 반찬으로 살아가야 하는 경제적 어려움에 이르기까지 삼중의 고통 속에 빠져 있는 빈곤층 노인의 삶을 <순덕 할머니의 가을>은 가감 없이 매우 간결하게 보여주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하위 70%의 노인들에게 최고 20만 원까지 국민행복연금을 내년 7월부터 지급하겠다고 하니 독거노인들의 노년이 조금 나아지려는지 기대해 본다. “마당가 늙은 밤나무 쭈그렁 밤송이 하나, 제풀에 툭 떨어진다.”의 완벽한 조응으로 끝이 나는 <순덕할머니의 가을>은 <가을 탓인가?>보다 훨씬 더 외롭고 소외된 노년의 처량한 신세를 보여주고 있다.
<웃음>에서는 우리나라 리얼리즘 사진의 진수를 보여주는 사진가 이형록의 흑백사진 <우리 집>이 담고 있는 1950년대의 풍경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이처럼 작가가 오래된 풍경들에 애정을 나타내는 것은 잃어버린 시간과의 재회라는 낭만적인 감정 때문만은 아니다. 때로 그것은 “외면하고 싶은 상처와의 화해의 대면”을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작가는 그가 가진 오래된 상처가 무엇인지 밝히진 않았지만 1950년대는 시대 전체가 가난했고, 전쟁의 황폐함 속에 놓여 있었으니 굳이 개인적 상처가 없더라도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겪었던 보편적 고통에서 야기된 집단적인 상처와 관련된 것일 수도 있겠다 싶다.
이 글은 웃음을 잃어버린 현대인, 나아가 웃음조차 상품화하는 감정노동의 시대에 대한 성찰적 의미와 함께 “굳이 기쁨이 아닌들 어떠랴, 나는 가끔 그 풍경들과 만나고 싶다. 그리고 마침내 풍경과 하나가 되어도 좋겠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물질적으로 빈곤했던 지난 시대, 아니 가난이라는 환경 그 자체와 이미 화해를 이룬 작가의 심경을 보여준다. 그리움이라는 감정은 바로 화해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끝없이 새로움만을 추구하는 현대와 물질문명의 풍요 속에서 작가가 보여주는 낡음, 늙음, 오래된 것들에 대한 애정은 인생을 오래 산 경험에서 나오는 삶에 대한 지혜요, 여유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노인은 그저 나이만 먹은 늙고 추하고 약한 존재가 아니라 화해와 여유를 터득한 지혜로운 존재라는 새로운 의미 부여가 필요할 것이다.
4. 노인복지의 이상과 현실
이동이의 <위험한 방법>은 노인복지 문제에 관심을 환기한다. 인간은 누구나 언젠가는 노인이 된다. 노인이 된다는 것은 불행하게도 여러 차원에서 인간으로서의 주체성과 존엄성을 잃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가족에게 의존해야 하고, 의사에게 의존해야 하고, 사회복지제도에도 의존해야 한다. 그래서 노인복지법이 제정되어 노인으로서 사회복지의 혜택을 누릴 권리를 명시하고 있다. 노인복지법은 “노인의 질환을 사전예방 또는 조기발견하고 질환상태에 따른 적절한 치료·요양으로 심신의 건강을 유지하고, 노후의 생활안정을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강구함으로써 노인의 보건복지증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되어 있다.
출근시간을 삼십 분 앞당겨 노인병원에 모셔다 드린 지 한 달여 되던 날, 이웃에서 귀띔을 해주었다. 건강보험공단에 신청서를 내고 3등급이라도 받으면 통원차량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인지능력이 문제였다. 여든을 넘기고 걷기에 불편을 겪는 노인이라고 인지능력에 문제없다면 등급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참 어이가 없었다. 물로 위중한 노인이 혜택을 받아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만 고령인 노인의 건강상태를 참작해 주지 않는 건강보험공단이 규정이 야속했다.
문득 아침마다 서두르는 불편한 일들이 앞다투어 일어났다. 언제까지 이 일을 감내해야 할지 뚜렷한 답도 없는 상황이다. 등급 받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이미 들어 알지만 아버님은 썩 달갑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잠깐의 연기로 누릴 수 있는 일 년간의 편리함과 혜택의 당위성에 대해 조근조근 설명을 했다. 그래도 묵묵히 반응을 보이지 않는 아버님께 사정사정을 하여 결국 신청서를 냈다.
-<위험한 방법>에서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인용문에서 보듯이 복지가 필요한 사람에게 복지의 혜택이 제대로 주어지지 않고 있다. 물론 <위험한 방법>이라는 수필이 노인복지의 현실에 대한 고발을 목적으로 쓰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수필은 요양병원까지 왕래하는 통원차량 이용의 혜택을 받으려고 3등급 판정에 필요한 치매 연기를 아버님께 강요했야만 했던 안타까운 현실과 어리석었던 자신에 대한 반성이 기본적인 주제이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치매를, 입에 담기조차 싫은 그 질병을 아버님께 종용한 것이 아닌가. 정상인데도 비정상적인 행동과 말을 해야만 하는, 그 난처하고 기가 막히는 심정을 내가 어찌 가늠이나 하겠는가. 앞으로 몇 년을 더 연명할 거란 장담도 못하는데 사지 멀쩡한 내가 잠깐의 불편함을 참지 못해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위험한 방법>에서
그렇지만 <위험한 방법>은 독자들에게 노인복지의 기본이념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즉 “노인은 후손의 양육과 국가 및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여 온 자로서 존경받으며 건전하고 안정된 생활을 보장받으며, 능력에 따라 적당한 일에 종사하고 사회적 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보장받으며, 노령에 따르는 심신의 변화를 자각하여 항상 심신의 건강을 유지하고 그 지식과 경험을 활용하여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도록 노력하여야 함을 기본이념으로 한다.”라는 기본이념과 한참 동떨어진 노인복지의 현실을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다.
요즘처럼 가족제도가 느슨해진 시대에 국가가 개인이나 가족제도에 노인복지를 떠넘기는 것은 무책임하다. 우리의 여러 현실은 윤리적인 차원을 떠나 가족제도에 모든 것을 맡겨버리기에는 여의치가 않다. 작품 속의 부부처럼 맞벌이가정을 비롯해서 자녀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부모를 직접 모실 형편이 안 되는 등 여러 가지 사정이 있게 마련이다.
아버님이 치매 연기를 포기하고 인지능력이 확실하다는 것을 복지판정사 앞에서 보여 버린 후에 느낀 감정을 “속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하면서도 왜 이렇게 가슴이 먹먹할까”라고 작가는 표현하고 있다. 작가가 느낀 결코 명쾌할 수만은 없는 복잡한 감정은 현실의 절박함에서 비롯된다. 특히 ‘먹먹하다’라는 형용사는 아버님에게 치매연기를 종용해야 만했던 데 대한 죄책감과 함께 결국 개인에게 노인복지를 떠넘겨버리는 답답한 현실에 대한 무력감을 적절히 표현하고 있다.
5. 나오는 말
미국의 맥아더재단은 미국노인들의 신체적, 정신적 능력을 증진시키는 데 필요한 새로운 지식으로 ‘신노년학’을 수립한 바 있다. 이 연구팀의 대표자인 로우(Rowe)와 칸(Kahn)은 ‘통상적 노화’와 ‘성공적 노화’를 구분하여, 노화에 대한 시각을 부정적인 것에서 긍정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획기적 계기를 마련했다. 성공적 노화란 첫째 질병 피해가기, 둘째 높은 수준의 정신적 기능과 신체적 기능 유지하기, 셋째 적극적으로 생활에 참여하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결국 성공적 노화를 위해서는 병들지 않은 ‘건강한 몸’과 ‘물질적으로 부유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 누군들 이런 이상적 상태가 되지 않기를 원하겠는가?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이상과는 다르다는 것을 <순덕 할머니의 가을>과 <위험한 방법>은 보여주었다. 노년에는 빈곤과 질병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외에도 <가을 탓인가?>에서 볼 수 있듯이 고독과 소외, 그리고 무위라는 고통 속에서 인생의 가을인 노년은 점점 주체성을 상실하고 타자로 소외되어 가는 것이다.
송명희 --------------------------------------
부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국문학이론과비평학회’ 6대 회장 역임, ‘한국언어문학교육학회’ 회장(현), 해운대포럼 회장 역임, 달맞이언덕축제 운영위원장 역임. 부경대학교 우수교수업적상, 부경대학교 학술상, 이주홍문학상, 봉생문화상, 한국비평문학상 수상.
저서: 수필이론서 ≪디지털시대의 수필 쓰기와 읽기≫, 에세이집 ≪여자의 가슴에 부는 바람≫, ≪미주지역한인문학의 어제와 오늘≫, ≪권력과 젠더 그리고 몸≫, ≪타자의 서사학≫, ≪시 읽기는 행복하다≫, ≪소설서사와 영상서사≫, ≪여성과 남성에 대해 생각한다≫ 외 저서 및 논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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