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수첩만 펼치면 선생님의 필체를 만날 수 있다. 처음 뵙던 선생님은 초로의 꼿꼿한 선비였다. 그 안온하고 맑은 모습은 어디로 가고 지워지는 기억력 때문에 사람을 앞에 놓고도 슬픈 눈빛만 하고 계신다. ‘너의 얼굴은 본 듯한데 누군지 이름을 잊었노라. 어디서 본 듯한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 나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성급한 작별을 하는 중이다.’ 선생님의 초점 잃은 눈빛에서 그런 마음을 읽었다."
정향만리情香萬里 - 최정숙
서랍 속을 뒤적이다 흰 봉투가 눈에 띄었다. 선생님의 글씨체가 반가워 품에 안았다. 그동안 뵙지 못한 나날이 그리움으로 다가와 선생님과 마주 하는 것 같다. 우체국 소인에 찍힌 날짜는 안양 2005년 3월 5일. 세월만큼 빛바랜 숫자가 희미하게 살아 있었다.
“선생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허공에 대고 가슴으로 불러본다.
봉투 안에서 나온 것은 한지에 겨울 나목을 그린 수묵화 한 점이다. 가지 끝은 겨울이고 아래쪽 가지에는 터질듯한 눈들이 부풀어 있었다. 수필가이시지만, 오래전부터 취미 삼아 수묵화를 그리신 선생님의 그림은 선들이 생동감이 있게 살아 있었다. 그즈음 선생님께선 팔순이 갓 넘으신 적지 않은 연세였을 텐데도 섬세한 그림은 녹슬지 않았다.
매월 마지막 금요일은 선생님과 수필을 공부하던 네 여인이 만나는 날이다. 그날도 댁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아파트 2층 계단을 내려오는데 시간이 걸렸다. 평소에도 거동이 불편하시어 바깥출입을 자제하신다.
시원한 계곡물이 흐르고 숲속에 솔향이 짙게 퍼지는 수리산이 병풍 같다. 앞산 소나무가 울창하게 보이는 ‘고향 보리밥집’은 선생님 댁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이곳에서 우린 손등을 겹쳐 약속을 했다. 돌아가실 때까지 한 달에 한번 선생님을 모시고 이곳에 오기로……. 그렇게 2년이 가깝도록 그 약속은 깨지지 않고 지켜져 왔다.
선생님께선 이날을 무척이나 기다리고 계신다. 그날은 바지 위로 음식을 자꾸 흘리신다. 옆모습을 뵈니 천진한 아이처럼 말씀도 없고 음식만 맛있게 드신다. 몇 번을 여쭈어 본다.
“선생님 제가 누구예요?”
“선생님 저는요?”
앉아 있는 네 여인들 모두 똑같은 생각과 행동을 하고 있다. 혹시 내 이름은 기억하시겠지……. 그러나 누구도 호명되지 않았다. 선한 미소로 바라만 보시다가 고개를 저으시며
“잘 모르겠다.”
하신다. 기운찬 목소리 유쾌한 웃음은 어디로 가고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저 멍하니,
“비가 내린다. 허공 속 구름을 뚫고.”
뜻 모를 한마디를 던지신다. 우리는 당신을 귀찮게 하는 낯선 사람일 뿐이다. 넓은 창 너머 비에 젖는 수리산을 바라보고 계셨다.
봄꽃이 망울을 터뜨릴 단비이건만 선생님의 쇠잔한 모습 때문에 자꾸만 빗물이 눈물인 양 서글퍼진다.
지난겨울에 백화점에서 코발트색 조끼를 사드렸다. 무척 젊어 보이셨다.
“선생님 그 조끼 누가 사드렸어요?”
“집사람이”
“아니에요, 선생님 저희들이 선물로 사드렸잖아요!”
수첩을 펴서 선생님께 드렸다. 기억이 점점 빠르게 흐려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한자라도 선생님의 흔적을 간직하고 싶었다.
“선생님 느낌을 이곳에 적어 주세요.”
<고향 보리밥집에서 하고 싶은 말>
“고맙기 짝이 없구나!”
어쩐지 따뜻하기에 알고 보니 그것이 마음이 담긴 것을 알았다.
그래서 더욱 새삼 따뜻하게 느껴졌음을……
봄비 내리는 수리산 아래에서 2012. 3. 23일에
지금도 수첩만 펼치면 선생님의 필체를 만날 수 있다. 처음 뵙던 선생님은 초로의 꼿꼿한 선비였다. 그 안온하고 맑은 모습은 어디로 가고 지워지는 기억력 때문에 사람을 앞에 놓고도 슬픈 눈빛만 하고 계신다.
‘너의 얼굴은 본 듯한데 누군지 이름을 잊었노라. 어디서 본 듯한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 나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성급한 작별을 하는 중이다.’ 선생님의 초점 잃은 눈빛에서 그런 마음을 읽었다.
선생님의 <일장춘몽> 글 속에 ‘화향천리花香千里 정향만리情香萬里’라는 글 한 구절이 생각난다. ‘진짜 정향은 만 리를 가고 만 리뿐인가 영원히 가고 있다. 설사 생명이 다한다 해도 정에는 한계가 없다.’
우리는 커피 한잔에 정을 나누고 정향의 의미를 두고 선생님과 행복하게 담소한 것이 불과 2년도 안 됐는데…….
한파가 매섭게 몰아치던 어느 날 선생님이 부산 요양병원에 계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어디에 계신지 알 길이 없어 답답하던 차에 선생님 소식을 들은 아버지를 만난 듯 기뻤다.
다음날 아침 KTX를 타고 부산으로 달려갔다. 기차가 도착한 부산역은 때 아닌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여름에나 볼 수 있는 장맛비 같았다. 해운대를 거쳐 달맞이 병원까지 가는 동안 선생님은 어떤 모습으로 계실지 몹시 궁금했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높은 언덕에 우뚝 세워진 하얀 건물의 요양병원이 눈에 띄었다. 비를 흠뻑 맞고 올라온 우리가 안내직원에게 물으니,
“305호 그분은 며칠 전 퇴원하셨는데요.”
했다.
“어디로 가셨는지 아십니까?”
“모릅니다.” 그동안 근황을 물었지만 극히 사무적인 대답뿐이었다.
허탈한 심정으로 이곳이 인생 종착역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후미진 언덕 위에 하얀색 건물이 더 스산하고 차갑게 보였다.
“선생님, 어디 계십니까?”
‘허공 속에 구름을 뚫고 비가 내린다.’
수리산 자락에 흠뻑 비가 내리던 그날이 떠오른다. 선생님의 기억이 흐려진 그날 이후, 모임은 해체되었다. 무심히 흐르는 흰 구름에 실어 소식이라도 전하고 싶은데 선생님은 어디에 계신지 알 길이 없다.
한지 위에 그려진 수묵화, 선생님께서 내게 주신 정향이다.
최정숙 ----------------------------------
≪수필과비평≫ 등단.
'월간 수필과 비평 > 수필과비평 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수필과비평 2013년 3월호, 다시 읽는 이달의 문제작/작품론] 인생의 가을이라는 화두 - 송명희 (0) | 2013.04.06 |
|---|---|
| [수필과비평 2013년 3월호, 지상에서 길찾기] 감동적인 하모니(2) - 한무웅 (0) | 2013.04.06 |
| [수필과비평 2013년 3월호, 지상에서 길찾기] 실버카페를 아시나요? - 이정현 (0) | 2013.04.05 |
| [수필과비평 2013년 3월호, 지상에서 길찾기] 영화, 그 아련한 추억 - 서정길 (0) | 2013.04.04 |
| [수필과비평 2013년 3월호, 지상에서 길찾기] 신근이 - 백남오 (0) | 2013.04.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