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꽁꽁 싸맨 보따리가 비에 젖을까봐 무척 조심을 하고 있었다. 보따리 속엔 무엇이 들어 있을까? 나는 순간 보따리 속이 궁금했다. 저 보따리 속의 물건으로 생활을 하고 있는 걸까? 빈손으로 있는 남자보다 오히려 여자가 더 궁금해진 것이다. 보따리는 그녀가 가진 것의 전부인 듯했다."
너무나 부자인 ‘나’ - 박영빈
가을비가 내리는 을씨년스러운 날이었다. 추위를 몰고 올 기세로 비는 세차게 쏟아졌다. 비 맞을까 조심스럽게 우산을 받쳐들고 걷던 나는, 노숙자 두 명이 각자 비를 피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들의 행색은 한눈에 노숙자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이나 게접스러웠다. 상가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 사람은 여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상가 앞의 버스 승강장 의자에 앉아 비를 피하고 있었는데 머리를 길게 기른 남자였다. 둘이 아는 사이 같지는 않았다. 우연히 가까운 장소에서 비를 피하게 된 듯 보였다.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날, 그들에게는 편히 쉴 집이 없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쓰러웠다. 그들을 지나치면서 순간이나마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특히 눈에 띈 것이 있었다. 남자는 아무런 짐도 없이 빈손으로 앉아 있는데, 여자는 짐 보따리가 큰 게 두 개나 있었던 것이다. 여자는 꽁꽁 싸맨 보따리가 비에 젖을까봐 무척 조심을 하고 있었다. 보따리 속엔 무엇이 들어 있을까? 나는 순간 보따리 속이 궁금했다. 저 보따리 속의 물건으로 생활을 하고 있는 걸까? 빈손으로 있는 남자보다 오히려 여자가 더 궁금해진 것이다. 보따리는 그녀가 가진 것의 전부인 듯했다.
여자의 보따리가 하루 종일 어른거렸다. 볼 일을 보는 내내 생각의 갈피에 껴들어 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내가 갖고 있는 많은 것들과 여자의 보따리가 자꾸만 같이 떠올랐다. 오후에 집에 돌아온 나는 우리 집 안의 살림을 둘러보았다. 여자의 보따리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나와 가족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너무나 많았다. 노숙자와 나를 비교해 본다는 것이 무리일지 모르겠으나 나는 무엇을 이렇게 많이 갖고 살고 있는지 한번쯤 생각해 보게 되었다. 주방에는 쓰지 않는 그릇들이 가득했다. 두 아이의 돌잔치에 사용했던 그릇들을 지금은 쓰지도 않으면서 그 의미 때문에 누구에게 주지도, 버리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삼십 년 살림살이에 불어난 그릇도 만만치 않다. 정작 가족들이 쓰는 그릇은 몇 개 되지 않는데도 그 모든 것들을 껴안고 있는 것이다. 냉장고에도 음식이 가득했다. 냉동실의 음식만 보아도 열흘 이상은 충분히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입지도 않으면서 버리지도 못하는 옷들이 서랍을 차지하고 있으며, 쓰지도 않으면서 모셔 둔 물건들이 창고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일 년 전, 이사를 하면서 책도 많이 버렸다. 차마 아까워서 버리지 못했던 책들을 버리고 또 버렸지만 아직도 책은 넘쳐난다. 미처 방 안 책꽂이에 꽂히지 못한 책은 신발장 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 붙박이 TV가 방마다 있으며 김치를 좋아하는 남편 덕에 김치냉장고는 두 개나 된다. 이 외에도 필요하다고 갖춰 놓고는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만 사용하는 것도 있다. 낱낱이 밝히자니 마치 부끄러움을 열거하는 것 같아 낯이 뜨거워진다.
<무소유>를 읽어보면 법정스님은 잘 가꾸던 ‘난’도 마음을 빼앗기게 하는 물건이라며 남에게 줘버린 일화를 적고 있다. 그에 비하면 나는 나의 마음을 빼앗고 있는 물건들을 서랍 속 깊숙이, 또는 창고 깊숙이 채워두고 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몇 년 전, 동암문화연구소장 전혜성 선생의 ‘가치있게 나이 드는 법’을 읽은 적이 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미국에서 비교문화를 공부한 학자다. 책 속에는 ‘삶의 단순화’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나는 특히 그 부분을 감명 깊게 읽었다. 그녀는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넓은 집을 지니고 있는 것이 부담스러워 휘트니 센터(실버타운)에 가기로 결심한다. 휘트니 센터에 가면서 그녀는 그동안의 생활 속에서 불필요하다고 느꼈던 것들을 모두 없앴고, 많은 것들을 정리하고 나니 의외의 곳에서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게 되었다고 했다. 요즘처럼 무엇이든 넉넉하고 풍요로운 세상에 살면서 삶을 단순화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삶을 단순화하는 일은 나이가 들지 않아도 모두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노숙자의 보따리 두 개를 보고 나의 삶을 뒤돌아보며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면 지금 무심히 떨어지고 있는 저 노란 은행잎도 자연의 이치에 의한 것이지만 버려야만 삶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깨우치게 하기 위함일지도 모르겠다.
무엇을 버릴 것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는데 휴대폰에서 문자 왔다는 신호가 울린다. 휴대폰을 열어 문자를 보았다.
‘내일 단 하루, 초특가!! 고객을 위한 특별 이벤트가 있습니다!!’
아뿔싸! 사회는 아직도 우리에게 무언가 더 끊임없이 살 것을 권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더 가져야 할 것이 있는 것일까?
박영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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