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말씀으로는 전생, 전전생으로부터의 인과관계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다는 것이다. 그의 투병소식은 남은 생의 방향에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어떻게 살다 죽어야 하나. 법정스님처럼 아름다운 마무리를 해야 하지 싶다."
인연 1 - 신화규
길과 길의 기로에서 나는 언제나 방황한다. 수를 헤아리면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으리라. 생각해 보면 내가 기로에서 헤매지 않은 정확한 사건은 어머니의 태胎 안에서 부모를 만날 때와 나의 태 안에서 두 딸을 만났을 때이지 싶다.
운명이란 정말 존재하는 것인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에게 선택을 종용하지 않은 것 같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프로이드가 말한 무의식의 세계에서 선택을 종용받을지도 모르겠다.
몇 년 전 전국의 국문학과 학생이 전부 모이는 큰 행사가 있었다. 나는 인천 국문학과를 대표하는 장기자랑을 준비하고 있었다. 난타 공연이었기에 드럼통부터 북에 이르기까지 장비를 세워놓고 무대에 오르려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 나를 보고 깜짝 놀라는 사람이 있었다. 엉겁결에 악수를 했는데 그의 모습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해 보였다. 그는 안산 학습관의 국문학과 신입생이었고 나는 인천 지역대학 학생회장이었다. 대선배와 신입생과의 관계였다. 그는 자기 지역 회장이나 학우들에게 나를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첫사랑 여인이라고 덧붙였다. 놀라워하는 우리 지역 후배들에게 농담이라는 전제를 하기도 했다.
어딘지 모르게 단정치 못한 모습은 30년 전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곱슬머리로 더부룩한 모습에 지금은 콧수염까지 기른 모습이었다. 국문학과에 문을 두드린 건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내 나이 스무 살 무렵에 만난 지금의 남편 친구이다. 그로 인해 남편과의 인연이 맺어졌다. 그는 내게 한창 나이에 열중할 수 있는 많은 편지와 시를 보내줬다. 당시 재수 중이었다.
어느 비 오는 날, 평소 자주 가던 명동의 찻집에 친구와 들렀다. 우연히 본 메모판에 그의 메시지가 꽂혀 있었다. 그냥 왔다가 메모만 남겨놓고 간다는…….
나는 남편과 결혼했고, 그 친구도 결혼한 후 아이들이 예닐곱 살 때쯤 가족끼리 설악산의 울산바위로 여름휴가를 함께 간 적도 있었다. 그렇게 오고가며 지내다 소식이 뚝 끊어졌다. 남편과 의견 차이가 있은 후였다.
어느 날 남편으로부터 그가 루게릭병으로 집에서 꼼짝을 못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남편이 IMF로 힘들어할 때 그 친구는 잘나가는 자리에서 부인과도 사이좋게 지내던 터였다. 그런데 어쩌다 그런 몹쓸 병에 걸려 이혼까지 했다고 한다.
몽롱한 정신 속에서 눈을 떴다. 그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고 있어 깨우지 않았다고 했다. 뇌수술을 하고 병실에 있을 때였다. 그렇게 만난 이후 간간이 소식을 듣고 있었다. 충격적인 소식이 한동안 나를 멍하게 했다. 정신은 멀쩡한데 눈동자만 움직일 수 있다니 그보다 더한 형벌이 있을까?
나는 운명 같은 병을 떨쳐버렸고 그 친구는 아직도 투병하고 있는 중이다. 나이 드신 부모님과 아들에게 의지하여 생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찾아가 봐야 하는 건가.’ 생사를 넘나들던 그 순간에 와 주었던 사람인데 어려운 병과 씨름하고 있다 하니 마음에 돌덩이 하나 얹어놓은 듯하다. 운명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소리 없이 서서히 다가와 이겨낼 의지가 있는지 실험해보는 것 같다.
부처님 말씀으로는 전생, 전전생으로부터의 인과관계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다는 것이다. 그의 투병소식은 남은 생의 방향에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어떻게 살다 죽어야 하나. 법정스님처럼 아름다운 마무리를 해야 하지 싶다.
법정스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름다운 마무리 중에는 살아온 날들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것, 타인의 상처를 치유하고 잃어버렸던 나를 찾는 것, 그리고 수많은 의존과 타성적인 관계에서 홀로 서는 것이다.
행복지수가 갈수록 낮아진다는 세상이다. 지금 행복하기 위해 미래를 포기해야 하는가, 아니면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 행복을 답보해야 하는가.
언젠가 중환자실에서 의사의 고갯짓에 생의 마감을 알리는 상황을 보며 인생의 덧없음을 많이 느꼈다. 누구나 한 호흡 한 호흡에 하루를 연명하고 한 해를 보내고 있다. 보다 절실함으로 인연을 이어가야 함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친구가 힘겹게 이어가는 한 호흡에 희망의 끈이 이어졌으면 싶다. 이루지 못한 문학도의 꿈도 내생의 새로운 인연으로 이뤄졌으면 싶다.
신화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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