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길은 어떤 길이며, 그 끝은 어디쯤일까. 평탄하고 좋은 길만은 아닐 게다. 일진일퇴, 희로애락, 성취와 상실의 끊임없는 반복 속에 완성되어가는 길이 어쩌면 값진 인생길 아닐는지. 버리고 싶은 아픈 기억들을 감춘 뒤안길은 사람마다 다를 터이다."
설한풍 불었는데 - 오승휴
멀지 않아 입춘立春. 텃밭의 눈 맞은 배추가 아침 밥상 위에 올랐다. 검푸른 채소의 싱싱한 맛이 기차다. 입맛을 돋우는 배추쌈에 홀딱 반한다. 모양새 좋은 배추는 김장감으로 앞서 뽑혀 팔려나갔는데, 버려진 듯 팽개쳐졌던 못난이배추가 맛으로 승부를 거나 보다. 주인이 좋아라하니 뿌듯함이 어떠할지. 한겨울의 눈바람을 이겨내고 숱한 우여곡절도 넘어선 강한 생명력. 생의 길에서 겪은 수모와 아픔이 되레 감칠맛을 빚어내는 걸까.
못난 나무가 산을 지킨다고 했다. 잘난 나무는 미리 베어 써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진짜 고수는 뛰어난 체하지 않듯이 눈 맞은 배추가 다소곳하다.
사색을 벗삼아 산행에 나섰다. 구름 사이로 맑은 햇살이 스며드니 겨울바람도 춘풍처럼 포근하다. 고내봉 오름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나를 스쳐 보광사普光寺를 휘감아 돌더니 능선을 타고 흐른다. 눈앞에 시원스레 펼쳐지는 채소밭에는 한겨울 푸성귀가 결곡하다. 배추와 브로콜리, 취나물과 양배추가 겁 없이 추운 겨울을 넘고 있다. 산사의 풍경이 딸랑거리자, 내 인생길에 몰아쳤던 설한풍雪寒風으로 멈춰 섰던 시간들이 곁으로 다가와 아픈 소리를 내며 흔들거린다. 그 세월이 잠깐이었음에도.
혹독한 눈바람이 내게 불어닥친 때는 유신시절인 1978년 봄이었다. 삼형제가 다 공직자였던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며 친척들은 야단이었다. 맏형이 교육자로 계시다 겨우 마흔 넘기고 세상을 뜨자 때맞춘 것처럼 공무원이던 둘째 형도 실직되었는데, 나 또한 직장에서 목이 날렸다. 봄을 시샘하듯 휘몰아치는 설한풍에 모두 눈 깜짝할 새 휩쓸려버린 셈이었다.
“당신 옆에는 아무도 없나요?”
서른 살 젊은 나이에 밥줄이 잘린 나를 보며 아내는 하염없이 울었다. 며칠 전부터 나의 해직 사실을 다 알고 있었는데 정작 나는 늦게 안 것이다. 외톨이요 바보가 아닌가.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기절초풍할 만큼 충격이 컸다. 가끔 속울음을 울며 쳐다보는 아내의 눈이 애절했다. ‘젊은 사람이 괜히 잘렸겠냐?’는 주위의 살천스런 눈초리는 감내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사연인즉 이러했다. 직장에서는 고구마 판매사업과 관련하여 감사원의 감사를 받았다. 이른바 ‘고구마 사건’이다. 감사를 받으면서도 경제상무인 나는 잘못을 느끼지 못했던 일. 사업이 농안법에 위배되었다며, 지도책임을 물어 군조합장, 전무, 상무들을 몽땅 징계해직시킨 것이었다. 회원조합도 일괄 문책을 받아, 전국에 해직자가 수백여 명이나 돼 참담했다. 나는 몇이서 함께 중앙회장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자기의 신상 관련 소송, 즉 명예를 회복한다며 제기한 소송에서 진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송사訟事는 이겨야 본전이고, 오랫동안의 정신적 재정적 피해가 더 크다.”면서 말리는 이가 적지 않았다. 가만히 있으면 2등인데 지면 인생이 끝나는 거란다. 불안했다. 처자식이 가엾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쩌면 내 인생의 변곡점이요 갈림길이었다.
중앙회와의 소송은 피를 말리는 고통을 수반했다. 증거 자료가 거의 다 그곳에 보관 중이었다. 더구나 십여 명이 넘는 증인도 중앙회 재직 선배들이었다.
‘기억이 안 난다.’는 증언을 재판정에서 듣고 온 날은 밤새 잠을 못 이뤘다. 가슴이 까맣게 타들었다. 알면서도 선배는 왜 그런 증언을 했을까. 이유는 나중에 알아도 늦지 않다며 스스로를 달래곤 했다.
그런 어느 날 밤 “조금만 더 힘을 내거라!”라는 그 선배의 목소리를 들었다. 영혼의 울림이었을까, 꿈속의 환청이었을까. 오, 내심 증인이 우리 원고 쪽을 편들어 주길 바라는 나의 소망! 승소勝訴를 기원하는 간절함 바로 그것 아니었겠나.
갈등 속에서 장사를 하며 삼 년 남짓 소송을 수행하였고, 결국 이겼다. 설한풍만큼이나 버거운 다툼이었다. 사실 감사원을 상대한 쟁송爭訟이었던 셈. 무서운 그 시절에도 법의 정의는 살아있었다. 재판장의 판단과 권위에 무한한 존경심이 우러났다. 해직 무효판결을 받은 것이다. 간절함이 좋은 결실을 맺게 해주었나 보다. 그날도 아내는 눈물을 흘렸다.
복직된 후, 직장은 이십 년 남짓 중책을 맡았다. 감사하는 마음이 앞선다. 시간이 여유로워진 요즘, 가끔 산행을 할 때면 지나온 날을 되돌아보게 된다.
인생길은 어떤 길이며, 그 끝은 어디쯤일까. 평탄하고 좋은 길만은 아닐 게다. 일진일퇴, 희로애락, 성취와 상실의 끊임없는 반복 속에 완성되어가는 길이 어쩌면 값진 인생길 아닐는지. 버리고 싶은 아픈 기억들을 감춘 뒤안길은 사람마다 다를 터이다.
‘세월 따라 걸어온 길, 멀지는 않았어도 돌아보니 자욱마다 사연도 많았다오. …… 잃어버린 지난 세월, 그래도 후회는 없다. 겨울로 갈 저 길에는 흰 눈이 내리겠지.’
국민 애창곡 <길>, 겨울 산행길에 흘러나오는 구성진 노랫소리가 심금을 울린다. 덩달아 채소밭 푸성귀가 바람결에 한들댄다. 고통과 슬픔이 두텁게 깔린 길에도 희망을 주는 햇볕은 찾아들리라. 눈바람 지나고 구름 걷히는 사이 얼마의 기다림이야 필요하겠지만.
후회 없는 인생길을 걷고 싶다. 흔들림 없는 아름다운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오승휴 ------------------------------------------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내 마음을 알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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