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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2월호, 사색의 창] 그렇구나 - 신창선

신아미디어 2013. 3. 7. 12:18

"사실보다는 보여주는 그 무엇과 대화하고 소통하는 일은 자신의 틀, 사회의 틀을 깨는 게 시작이요,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든다. 투박하고 고통스런 현실이 아름다운 예술로 꽃피고 있다고 말을 해도 될는지 모르겠다. 정작 내 자신은 그 뜻을 모르면서도."

 

 

 

 

 

 그렇구나  신창선


   2012 부산비엔날레의 주제는 ‘배움의 정원’이다. ‘현고 학생 부군’이라는 제사상 복판에 있는 지방문이 생각난다. 한국인은 죽어서도 학생이니 ‘배움’이라는 단어는 영원한 그 무엇이다.
   미술관 입구 외벽에 검은 가림막과 비계飛階 파이프를 설치하여 공사장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리얼리티 장소성site이 나의 오감을 자극하고, 새로운 공간을 경험해야 하는 상상력의 모티브가 되고 있다.
   비 오는 날, 건물 입구 사물함에 우산을 보관해 두듯이 ‘배움의 정원’ 미술관에 들어서기 전에 자기-동일성이라는 개념을 버리라는 총감독 로저 뷔르겔의 말을 이리저리 뒤집어 본다. 그렇더라도 안개에 싸여 있는 이곳에서, 작가의 언어에 내 감성이 고문당하지나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나름대로의 미학적 체험을 하기로 한다.

 

   레바rebar 41
   콘크리트 보강용인 철근 세 개가 사방 1m 정도 크기의 초록판에 구부러진 채 놓여 있는 게 전부다. 하나는 가짜 철근이요, 두 개는 복제품이다.
   2008년 중국 사천성을 강타한 대규모 지진으로 6만 명 이상이 죽고, 수백만 명이 집을 잃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그런데 희생자 대부분이 학생이었다. 베이징 올림픽 주경기장을 설계했다는 설치미술작가 아이 웨이웨이Ai weiwei는 파편 더미로 내려앉은 학교 건물과는 달리 근처의 다른 건물들은 피해가 적었다는 데에 주목한다. 공무원들과 건설업자들의 부패사슬, 콘크리트 강철봉 대신 얇은 철사로 대체하여 만든 ‘두부빌딩’이 문제였음을 밝혀내고 작품화한다.
   지진 때문에 휘어진 부조리 현상, 실제적 캘리그래피calligraphies는 인간의 통제를 넘어선 자연의 힘의 무서움을, 인간의 탐욕을 냉소적으로 질타하고 있다. 작가는 끔찍한 희생을 불러온 철물을 모더니즘적 예술작품으로 보여주고 있다.
   지진과 인재가 만들어낸 ‘레바 41’은 우리의 현실임을 확인하는 부끄러운 체험이었다. 지진과는 무관하게 순전히 인재로만 이루어진 와우아파트, 삼풍백화점의 붕괴, 두 동강 난 성수대교는 사천성의 ‘두부빌딩’이었다. 사천성에서 발견된 부실한 레바와 복제품 두 개는 무한한 심연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NO. 18
   작가는 한국적인 집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부산 특유의 도시적 풍경에서 최초의 도시재개발 사업의 결과물인 좌천아파트에 주목한다. 산복도로에 위치한 좌천아파트에서 우리가 무엇을 예술작품으로 받아들이는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에 답하고자 한다. 개념적, 형식적으로 조직된 예술작품의 건축적 구조를 드러내고, 직접 움직이게perform 하는 프로젝트 단위의 작품을 진행한다.
   이러한 수행장치로 조직한 것은 그린루프, 모델․공간, 전세-공간으로 볼 수 있다. 지형학적으로 부산의 옛 중심지였던 이곳의 산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자연환경을 시각화한 것이 그린루프다. ‘평’, ‘전세’, ‘동의’ 등의 특별한 거래 단위를 통한 일련의 수행과정을 예술적 경험으로 표현하고 있다.
   NO.18은 이곳 산복도로 아파트의 번지다. 전세공간 4평에서 모든 가구를 들어내고 모듈 공간을 잠시 개입시키는 것이다. 그린루프는 좌천아파트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주택 옥상에 설치한 정원이다. 전세 공간에서 그린루프와 바다를 감상하며 대화가 이루어진다. 이곳에서 부산의 삶의 양식, 부동산 문화, 종교와 철학 등에 관한 사람들의 대화와 모습은 실시간으로 시립미술관 전시장에 전송된다.
   내가 참여하고 있는 좌천동 마을학교 학생들과 함께 전세공간에서 작가와 차를 마시며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우리의 모습을 보고 있는 미술관의 관람객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작가의 개념미술, 설치미술, 생태건축 퍼포먼스가 넘나들고 있음을 느낀다.
   누군가가 ‘메이 사드’의 글을 읽는다. 그린루프를 보면서 글의 내용을 음미하며 잠시나마 정원사가 되어 본다.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어둠이 없으면 어떤 것도 탄생하지 않고/ 빛이 없으면/ 어떤 것도 꽃피지 않음을 아는/ 희망을 품은 영원의 정원사가/ 되게 하소서

 

 

   진혼
   신발 수백 켤레가 둥그렇게 놓여 있고, 신발 사이 사이에 여러 색의 종이꽃이 장식되어 있다. 신발은 해고노동자들이 신었던 작업화요, 종이꽃은 작가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과 함께 만든 것이다. 작업화에 꽃을 다는 행위는 쌍용자동차 스물두 사람의 죽음에 대한 진혼의 의미이다. 노동자들의 혼과 고통이 담겨 있는 작업화는 노동의 상징이고, 노동의 신성성을 보여 주고 있다.
   한국의 집에 들어갈 때 그 집이 음식점이든, 사찰이든, 개인 주택이든 여기저기 흩어진 신발들이 맞아준다고 놀랄 필요는 없다. 그 신발들은 외부 공간과 내부 공간의 경계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신발의 주인이 가로지르는 경계의 표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011년 한 달여 동안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들의 파업이 있었고, 어느 한 여성의 이백여 일 동안 대형 크레인 점거 농성이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크레인 점거 농성은 위험한 정치적 퍼포먼스였고, 이를 응원하기 위해 동원된 희망버스 대열은 한국 사회의 진보․보수의 갈등 현상이 극한점에 이르렀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작가가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들과 함께 종이꽃을 만드는 동안 온갖 종류의 이야기가 쏟아졌을 것이다. 슬프거나 고통스러웠던 이야기들이 오래도록 공유되고 있었을 것이다. 흘러간 그들의 이야기, 나도 한 점 이야기가 되어 새벽을 맞는 기분을 떨쳐 낼 수 없었다.

 

   오데사의 계단
   이 작품의 주제는 에이젠슈타인이 감독한 영화 <전함 포테킨(1925)>에 나오는 오데사 계단의 전설적인 장면에서 차용하고 있다.
   전함 포테킨의 수병들은 장교들의 학대와 열악한 근무 조건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다. 전함을 장악한 수병들은 승리감에 젖어 흑해 오데사 항구로 향하고,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시민들은 수병들을 환영하러 부두로 나온다. 노인과 여자, 어린이를 포함한 오데사의 민중들은 갑작스런 차르 군대에 의해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간다. 오데사 계단의 연속적인 학살 장면 중 한 어머니가 총에 맞아 쓰러지면서 손잡이를 놓친 유모차가 층계에 부딪치며 굴러 떨어지는 장면은 명장면으로 손꼽힌다. 이 유모차의 장면에 상응하도록 작품 ‘오데사의 계단’ 발치에 쇼핑 카트를 배치했다.
   작가가 구한 오브제는 전직 대통령이 살았던 빌라의 리모델링 과정에서 나온 쓰레기들 중 골프화, 카펫, 사무용 의자, 일본산 비데, 타일 등이다.
   이 작품은 현재 한국사의 한 장면과 에이젠슈타인의 신화적 영화 장면 사이의 어떤 관련성을 상상할 것을 요구한다. 러시아처럼 한국의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도 피로 얼룩져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작품 속 계단 위의 쓰레기 주인인 전직 대통령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1905년 포템킨호의 반란 사건을 주제로 러시아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한 영화가 우리의 현실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오데사의 계단>을 보는 관람객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자기만의 수사학에 빠졌던 경험을 반성하는 계기가 됐음 직하다.

 

   분재
   비틀어지고, 잘려지고, 묶여 있는 분재 두 그루.
   식물을 원하는 모양으로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가지를 구부리고, 대나무 지지대, 철 지지대로 모양을 잡아 납띠나 놋쇠끈으로 비튼다. 눈에서 벗어난 가지는 잘려 나간다. 잘려 나간 자리엔 페인트로 숨구멍을 막아 버린다. 키가 더 크는 걸 막기 위해 단단한 쇠그물을 씌운다. 식물을 규율하고 있는 장치와 그 속의 분재를 미니어처로 재창조하려는 것이 작가의 의도이겠다.
   분재 예술가의 예술형식은 시문학, 서예와 동등하게 간주된다고 하지만, 분재작품을 보는 내 마음은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더 앞선다.
   숙련된 인간이 자연을 손질한 모습, 무위자연을 그토록 열망했던 노자老子가 본다면 어떤 마음일까.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더니, 저 작고 비틀어진 분재가 사람 마음을 충만하게 한다니, 지독한 아이러니다.
작품에서 아름다운 폭력성 같은 걸 읽어보면서, 자유롭게 자라지 못하는 분재처럼 사회적 제약 속에 살고 있는 나도 분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응겐-푸타 윈쿨Ngen-füta winkul
   작가의 설치작품에서 삶처럼 부드럽게 흔들리는 네온 글자들을 본다. 유리 탱크 속의 물 위에 떠다니는 화산석 하나 하나에 글자가 새겨져 있다. 네온으로 빛나는 글자들은 칠레 원주민인 마푸체족이 살고 있었던 지역의 아홉 개의 화산 이름이다. 반짝이는 글자는 시어詩語처럼 그들 삶을 나타내는 언어요, 화산석은 영토를 나타내고 있다. 이는 마푸체족의 세상 사는 방법, 에너지의 순환과 연결되며, 마푸체족에 대한 추모적인 성격도 지니고 있다.
   마푸체족은 계급 없이 재산을 공유하는 전설적인 원주민이다. 이들의 사회구조는 민족지학자와 인류학자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칠레 땅을 정복한 스페인 사람들을 물리친 몇 안 되는 아메리카 대륙의 부족들 중 하나다. 오랜 투쟁 끝에 마푸체족은 쫓겨나지만 아직도 칠레 정부와의 갈등은 이어지고 있으며, 그들 대부분은 가난하고 사회적 지위도 열악한 채 살고 있다. 가난한 그들이 이 작품을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아마도 반짝이는 아홉 개의 언어에서 무한한 환희를 느끼리라.
   물 위의 화산석 위에서 반짝이는 글자들을 보며 나는 한동안 감전돼 있었다.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에서, 나라를 빼앗겨도 프랑스 언어를 지키고 있으면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과 같다는 수업 장면이 떠오른다. 대지나 강, 공기는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던 북미 인디언의 절규가 살아나 글자 속에서 절규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지금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하는 철학적 사유를 복습하고 있다.

 

   난해한 몇몇 작품은 끝내 나를 안개 속 ‘배움의 정원’을 걷게 하고 있다. 반세기 전, 화가이자 조각가인 뒤샹이 화장실 변기를 미술 전시회장에 <샘>이라는 제목으로 출품했을 때 사람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그 이후 팝아트, 미니멀리즘, 설치 미술 등으로 전개되는 작품활동 자체가 철학적 사유활동을 요구하는지도 모르겠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한 올을 붙드는 일은 자신의 편견을 지우는 일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겠다.
   사실보다는 보여주는 그 무엇과 대화하고 소통하는 일은 자신의 틀, 사회의 틀을 깨는 게 시작이요,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든다. 투박하고 고통스런 현실이 아름다운 예술로 꽃피고 있다고 말을 해도 될는지 모르겠다. 정작 내 자신은 그 뜻을 모르면서도.

 

 

신창선  -------------------------------------------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어멍아, 어멍아≫.